원나라 불교

 

‘도이지략’ ‘진랍풍토기’로 세계불교 현장 소개

몽골제국에서 단일 국교란 존재하지 않았다.
티베트불교를 들여, 부처를 ‘부르한’이라고
불렀고, 많은 사찰이 만들어졌으나 불교만을
강요하는 국교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몽골인 심성 바탕에는 고대 이래 유목민의
샤먼적 전통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원대에 중국 남부에서 유행한 ‘마니교’가
종교 개방성의 좋은 예다. 복주가 그 중심…

대원제국을 지향한 몽골에는 단일국교가 없었다. 사진은 울란바토르 시내 티베트불교 사원.

 

바다를 뜻하는 달라이
몽골인은 큰 호수를 큰 바다로 간주했다. 몽골인은 바다를 뜻하는 달라이(Dalai)를 세계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놓은 민족이기도 하다. 바다와 같이 깊고 고결한 스승이라는 뜻을 지닌 달라이라마(DalaiLama)가 그것이다. 망망대해 같은 초원이 녹색의 바다라면 바다는 푸른 초원이다. 초원이나 바다나 몽골인의 인식 속에서는 하나였다.

대원(大元)의 출현은 10세기 이래 요·금·서하와 송 등의 각축장이 됐던 동아시아가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대통합으로 가는 단초를 제공했다. 지중해에서 태평양까지 몽골군이 당도했으며, 이전까지 없던 ‘팍스 몽골리카’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자면 대륙만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몽골제국을 하나의 큰 순환체계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초원로 이외에 유라시아를 꿰뚫는 해상교통 거점과 해로 확보가 선결과제였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몰락이었다. 1258년 바그다드 정복으로 칼리프를 궤멸시키고, 무역 중심을 페르시아만에서 홍해로 옮겨가게 했다. 이슬람 칼리프를 부순 몽골은 기존 무역 주도집단을 견인하여 원제국의 품에 넣었다. 몽골로서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상인과 장인집단, 기술과 행정 집단을 포용해야 했다.

1200년경부터 1300년경의 아시아는 ‘해양 아시아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기에 몽골 세계제국이 당제국 이래의 실크로드와 이슬람 상업망을 하나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향신료 로드’와 실크로드가 하나로 통합되어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에 국제적 순환 상업망이 등장했다.

종교와 무역에 무한 개방적이던 원제국
원의 종교정책은 기본적으로 개방과 관용이다.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 배화교 심지어 유대교도 포괄하는 다원 체제였다. 제국의 지배자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세력을 적절히 통제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다. 몽골제국에서 단일 국교란 존재하지 않았다.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부처를 ‘부르한’이라고 불렀고, 많은 사찰이 만들어졌으나 불교만을 강요하는 국교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몽골인의 심성 바탕에는 고대 이래 유목민의 샤먼적 전통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원나라에 전파된 인도의 자이나교 흔적.


원대에 중국 남부에서 유행한 마니교는 몽골 종교 개방성의 좋은 예다. 복주는 복건성의 마니교 신앙 중심처였다. 절강의 온주, 영파, 그리고 산동에도 마니교가 전래되었다. 원대의 천주는 유수의 국제항구로서 인도에서 마니교 역시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 천주 진강(晉江)의 초암(草庵)은 중국 동남부에 최초로 설립된 저명한 마니교 유적이다. 천주는 중국에서 마니교가 소멸한 최후의 본거지일 것이다. 중국에 마니교가 당도한 시기는 적어도 당으로 소급되지만, 신도가 세력을 얻은 시기는 원대다. 그만큼 원은 세계 종교에 개방적이었다.

나라가 망했어도 여전히 송상(宋商)이 무역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송상은 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원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가 망할 때까지 원상이라고 하기 보다는 송상을 그대로 썼다. 송상은 원대에도 일본, 고려, 중국을 삼각으로 잇는 무역로를 경영했다.

원이 일본을 정벌하려 침략하였는데도 일본과의 무역은 멈추지 않았다. 신안 해저 유물선도 바로 이러한 시기에 침몰한 원·일본 무역선이다. 경덕진요의 영청(影靑)이라 불리는 코발트60의 엷은 청색 자기와 저장성 용천요 청록색 자기를 싣고 있었다. 가마쿠라 말기의 일본은 이들 중국제 도자기를 가라모노(唐物)라고 하여 열심히 희구했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양국은 소원해졌지만 오산승(五山僧)을 중심으로 중국 유학 열풍이 다시 불었고, 민간무역을 주축으로 인적·물적 교류가 빈번해졌다.

대규모 재원이 소요되는 사원 혹은 신사 건축과 수리비 충당을 위해 상선을 보낸 경우가 종종 있었다. 1235년 건장사(建長寺) 조영 자금을 얻기 위한 파견, 1332년 스미요시(住吉) 신사 조영을 위한 상선, 1342년 천룡사선(天龍寺船) 2척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이용한 항구는 대부분 경원(영파)이었다. 무역선과 사원의 밀접한 관계는 사원이 당시 중요 경제적 주체였던 점과 함께 구법승이 이들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했기 때문이다. 원대에도 구법승이 여전히 오갔다. 중세 경제의 중심에 사찰이 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일본의 수출품은 남송대와 유사했다. 금, 사금, 철, 구슬, 약용 진주, 수은, 녹이, 복냉, 유황, 나전, 완석, 목재 부채 등을 수출했다. 원의 수출품은 동전, 자기, 불경, 각종 서적, 견직물, 약재 등이었다. 원 수출품에서 불경이 확인된다.

왕대연과 주달관이 기록한 불교왕국
원은 조선술과 항해술을 진일보시켜 해로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축적된 항해술과 지리 지식에 기초하여 사상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의 개념을 제시했으며, 항해와 해상무역 및 해외사에 관한 저술도 상당수 남겨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동양의 마르코 폴로’로 불린 왕대연의 <도이지략(島夷志略)>이다.

1330년, 왕대연은 천주에서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세계를 누비면서 진귀한 풍경과 사물을 두루 구경하고 관찰한 결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두 차례 여행했다. 1330년 광주를 떠나 1334년 여름에 돌아왔고, 1334~1337년에는 중국에 머물렀다. 1337년 광주를 다시 떠나 1339년 여름 혹은 가을에 돌아와 <도이지략>을 집필했다.

천주에서 해남도, 점성, 말레이반도, 자바, 수마트라, 미얀마,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이집트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까지 갔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궤적을 따라 북서아프리카까지 간 것이다. 귀환길에 이집트를 거쳐 홍해를 관통하여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이른다. 왕대연이 방문한 나라 중에 불교 왕국도 당연히 포함되었으며, 그의 기록을 통하여 원나라 사람들에게 방대하고 치밀한 세계 불교의 현장이 그대로 소개되었다.

원대에 진랍(캄보디아)에 관한 소중한 책으로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가 있다. 원 성종(테무르칸) 시절에 관료로서 캄보디아와 앙코르와트 사원을 둘러보고 현지 조사에 근거하여 이 책을 썼다. 1296년 8월에 앙코르에 도착했다. 1년간 머물면서 그곳을 통치하던 인드라바르만 3세 곁에서 1297년 7월까지 머물면서 기록을 남겼다. <진랍풍토기>는 진랍제국을 이해하는 기본 사료다. 바이욘(Bayon)과 바푸온(Baphuon), 앙코르와트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당시의 풍습과 일상생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당시 앙코르는 곳곳의 불교 사원이 여전히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진랍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다. 주달관은 시암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평야를 만났다. <진랍풍토기>에는 이 시기 캄보디아가 정체된 상태로 있었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지도 또 너무 몰락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불교 또한 그러한 상태였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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