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권(卷第十四)
대무신왕(大武神王)
대무신왕(大武神王)001 대무신왕, 혹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 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무휼(無恤)(3) 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14)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이때에 이르러 [태자가]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닫기이 즉위하였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002 광개토왕릉비에는 大朱留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즉위년조에서 소수림왕을 또 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대무신왕과 소수림왕은 왕호가 ‘朱留王’이라는 것으로 공통되는데 이 ‘朱留’는 神聖의 뜻인 ‘수리’에 해당한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229쪽).닫기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003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에서는 대무신왕의 이름을 ‘如栗’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無恤’이라는 이름 외에 ‘味留’라고 한 기록도 전하고 있는데 이는 무신왕을 大解朱留王이라고 한 것의 ‘朱留’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닫기이고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성장하여서는 영웅호걸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琉璃王)이 재위 33년 갑술에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씨(松氏)로서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2년(19) 봄 정월에 서울(京都)에 벼락이 쳐서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3년(20) 봄 3월에 동명왕(東明王)005 동명왕의 사당. 이해에 동명왕묘가 세워진 이래 고구려의 역대왕들은 즉위 후 초기에 동명왕묘에 대한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신대왕 3년, 고국천왕 2년, 동천왕 2년, 중천왕 13년, 고국원왕 2년). 특히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동명왕묘는 최초의 수도인 졸본(卒本)에 남아 있었으며 왕들은 졸본(卒本)에 와서 동명왕묘에 제사한 기록들이 계속 보인다(安臧王 3년, 平原王 2년, 영유왕 2년).닫기 사당을 세웠다.
겨울 10월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赤烏)008 까마귀는 본래 검은 색의 새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이 새는 흔히 흉조를 알리는 새로 여겨졌다. 그러나 ‘붉은 까마귀’는 이와는 반대로 상서를 나타내는 새로 여겨졌다. 이 설의 연원은 중국 주 武王이 은의 紂임금을 칠 때 붉은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데에 있다. “武王伐紂 觀兵於孟津 有火流於王屋 化爲赤烏 三足”(《尙書大傳》 泰誓). 이외에 《사기》 封禪書, 《삼국지》 吳書 孫權傳, 《後魏書》 靈徵志 참조.
본문에서 붉은 까마귀는 고구려가 부여를 아우를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주 武王이 은 紂임금을 정벌한 것과 대응시켜 이를 도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남방의 고구려를 붉은 색으로, 북방의 부여를 검은 색으로 대응시킨 것은 고구려에서 五行의 방위색 관념과 결합 적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닫기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扶餘)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하여 붉은 색이 되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합칠 것입니다.”하였다. 대소(帶素)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답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赤烏)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어서는 갖지 아니하고 나에게 보내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대소(帶素)가 그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4년(21)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扶餘)를 정벌하려고, 비류수위(沸流水上)에 도달하였다.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이 없이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 한 군대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어버렸는데, 왕이 지금 이를 얻었으니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 009 대무신왕이 負鼎氏를 신하로 얻은 이야기는 중국 은나라 湯임금의 신하 伊尹이 처음 湯임금에게 접근할 길이 없어서 鼎俎를 메고 그 맛을 湯임금에게 아뢰기 위하여 왕이 다니는 길로 나가서 湯임금을 만나 결국 湯에 의해 등용되었다는 고사를 연상케 한다(《사기》 권3 은본기).닫기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렸다.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으로 된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하늘이 준 것이다.”하고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하는데 한 사람이 나타났다.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왕에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대왕이 북쪽으로 부여(扶餘)를 정벌하신다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신은 청하옵건대 따라가서 부여왕(扶餘王)의 머리를 베어 오고자 합니다.”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이 또 허락하였다.
5년(22) 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아 왕이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扶餘王)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몰아 전진해 왔다가,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에 괴유(怪由)에게 지시하니, 괴유(怪由)가 칼을 빼서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니 대부분의 군대가 이리저리 밀려 쓰러지며 능히 지탱하지 못하였다. 곧바로 나아가 부여왕(扶餘王)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扶餘) 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다가, 하늘에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다. 왕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여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적의 눈을 속이는 가짜 군사를 만들어 놓고, 샛길을 따라 군대를 숨겨 밤에 나왔다. 골구천(骨句川)의 신마(神馬)와 비류원(沸流源)011 源은 물의 발원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앞에서 큰 솥을 얻은 것이 비류수 가라고만 하였을 뿐인데, 여기서 ‘沸流源’이라 한 것이 그 위치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또는 단지 비류수를 가리키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참고로 비류수 즉 현재의 渾江의 발원지는 백두산 서남쪽 기슭의 노령산맥의 서북단즉 중국 길림성 임강현 삼자(三子) 지역이라고 한다(《集安縣文物志》, 吉林, 1984, 2쪽).닫기의 큰 솥을 잃어 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병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급식하였다. 왕이 나라에 돌아와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012 전쟁에서 돌아와 종묘에서 술을 마시고 전공을 기리는 것을 ‘飮至策勳’이라 한다닫기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扶餘)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아직 멸하지 못하였고, 또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하였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와 아픈 자를 조문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
3월에 신마(神馬) 거루(駏䮫)가 부여말(扶餘馬) 1백 필을 거느리고 학반령(䳽盤嶺) 아래 차회곡(車廻谷)으로 왔다.
여름 4월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의 동생이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이 부여왕(扶餘王) 금와(金蛙)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帶素)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라다니는 사람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鴨渌谷)에 이르렀다. 해두왕(海頭王)013 海頭國의 위치는 미상이다.닫기이 나와서 사냥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왕(曷思王)014 曷思國을 곧 동부여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동부여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국학논집》 10, 계명대, 1983).닫기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扶餘王)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曷思)014 曷思國을 곧 동부여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동부여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국학논집》 10, 계명대, 1983).닫기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못나고 어리석어 다시 일으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이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내부(掾那部)015 고구려 5부의 하나인 絶奴部이다. 삼국사기 권16 고국천왕 12년 9월조와 삼국사기 권17 중천왕 9년 11월조에도 보이며, 삼국사기 권16 고국천왕 2년 2월조에는 提那部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絶奴部는 계루부 왕족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가진 왕비족이었다.닫기에 두었다.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씨(絡氏) 성을 주었다.
겨울 10월에 괴유(怪由)가 죽었다. 처음에 병이 위독하여 왕이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괴유(怪由)가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누차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으니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때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8년(25) 봄 2월에 을두지(乙豆智)016 고구려 대무신왕대의 인물. 25년에 처음으로 우보의 직에 임명되었다가, 2년 후 좌보로 옮겼다.닫기를 우보(右輔)017 유리왕대에 있었던 大輔(《삼국사기》 권13)를 이때에 와서 左·右輔 체제로 전환하면서 두어지게 된 관직이다. 좌보는 우보가 설치된 지 2년 후인 同王 10년에 두어지게 된다. ‘輔’의 의미에 대해서는 역시 《삼국사기》 권13에 나타난다. 대보가 한 사람 두어졌던 데 비해 좌·우보의 두 사람의 직으로 전환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대무신왕 대에 와서 정복사업이 전개되면서 새로 복속된 집단들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통치업무도 증가됨에 부응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이종욱, 「고구려초기의 좌·우보와 국상」, 《김해종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일조각, 1979). 중국 신나라의 王莽은 처음 한에서 좌보의 직에 있었는데 고구려의 좌보·우보의 제도와 어떤 관련이 없을지 과제로 남긴다. 본문에서 乙豆智는 이 해 우보로 임명되었다가 2년 후에는 좌보가 되고, 대신 松屋句를 우보로 삼았음을 볼 때 좌보가 우보 보다 상위직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좌·우보 제도가 시행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통하여 乙音(온조왕 2년), 解婁(온조왕 41년), 屹于(多婁王 7년 및 10년), 眞會(多婁王 10년), 質(古爾王 9년), 眞忠(古爾王 14년) 등이 좌보 또는 우보로 임명되었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고구려서 좌·우보제는 신대왕 때 국상제로 전환될 때까지 존속하였다.닫기로 삼고 군국(軍國)의 일을 맡겼다.
9년(26) 겨울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蓋馬國)018 현재의 蓋馬高原의 산간 지역에 있었던 소국으로 추정한다. 《한서》 권28 하 지리지에 高句驪縣, 上殷台縣과 함께 西蓋馬縣이 玄郡에 속한 것으로 보이고 있고, 《삼국지》 권30 위서 동옥저전에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이라 한 데에서 그 이름이 역시 보인다.닫기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여 안정시켰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019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개마국(蓋馬國)에 인근하였던 것 같다.닫기의 왕이 개마(蓋馬)가 멸망한 것을 듣고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이로써 땅을 개척하여 점차 넓어졌다.
10년(27) 봄 정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020 고구려의 관직이다.닫기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11년(28) 가을 7월에 한(漢)의 요동(遼東)021 중국 요하 동쪽에 두어졌던 군명이다. 秦代 이래 여러 왕조에서 이곳에 요동군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이곳을 遼州로 삼아 군이 폐지되었다. 본문 내용의 해당 시기인 후한代에는 幽州刺史部에 속하였으며, 호는 64,158호, 인구는 81,714구였고, 11성이 이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후한서》 권23 郡國志). 그런데 위의 호, 구의 수는 서로 맞지 않아 刊誤가 있는 것 같다.닫기 태수(太守)022 중국의 군의 행정장관으로 군의 民政, 司法, 監察, 軍事, 財賦 등을 관장하였다.닫기가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고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右輔) 송옥구(松屋句)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봉기하였는데도 명분이 없이 병력을 출동시켰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니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험한 곳에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작은 적(敵)이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023 《孫子》 권3에 보이는 말이다. “小敵之堅 大敵之擒也”.닫기 신은 대왕의 병력과 한(漢)나라의 병력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헤아려 보건대 계책으로는 정벌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하였다. 왕이 “계책으로 정벌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지금 한(漢)의 병력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저들의 군대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나가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는데 한(漢)의 병력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乙豆智)에게 일러 말하기를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다. 을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한(漢)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돌로 된 땅이어서 물이 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오래 포위하여 우리가 어려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漢)의 군대에 보내어 군사를 위로하십시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글을 주어 말하기를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上國)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이 어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보내 부하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한(漢)의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어 갑자기 쳐서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답하기를 “우리 황제가 나를 둔하다고 여기지 않고 영을 내려 군대를 출동시켜 대왕의 죄를 묻게 하였는데,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나도록 요령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보내온 글을 보니 말이 도리를 따르고 또 공순하니 감히 핑계를 대지 않고 황제에게 보고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13년(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투항해왔다.
15년(32) 봄 3월에 대신(大臣) 구도(仇都)·일구(逸苟)·분구(焚求) 등 세 사람을 쫓아내어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비류부장(沸流部長)024 비류부의 우두머리. 비류부는 비류수가에 위치하였던 비류국이 고구려 5부 중의 하나로 편입된 부로서 즉 《후한서》 권85 동이전 고구려전에 나오는 消奴部이다. 《삼국사기》 권13 주석 47 비류국 및 《삼국사기》 권15 참조.닫기이 되었는데 본래 욕심이 많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妻妾)·우마(牛馬)·재화(財貨)를 빼앗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여,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매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동명왕(東明王)의 옛 신하였던 까닭에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내쫓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남부(南部)025 5부 중의 하나로서 처음 灌奴部라 불렸다. 방위명으로 부를 칭한 것은 2세기 후반 이후라고 여겨지므로, 본문의 표현은 후대의 표현방식으로 수식된 결과로 여겨진다.닫기 사자(使者) 026 고구려의 관등의 하나. 부여에서도 大使·大使者·使者 등의 관명이 보이고 있어(《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 부여와 고구려에 공통된 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낙랑 채협총에서 출토된 彩畵漆에도 ‘使者’의 관명이 나오고 있어 중국의 영향으로 생긴 이름으로 추측되고 있다. 관등과 관직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을 이 시기에 그 임무는 租賦의 수취를 책임맡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체제의 확립과정에서 租賦의 수취가 중시됨에 따라 使者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뒤에 太大使者, 大使者, 收位使者, 上位使者, 小使者 등으로 분화되었다(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1975 |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學報》 86, 1978).닫기추발소(鄒㪍素)로 하여금 대신 부장을 삼았다. 026 고구려의 관등의 하나. 부여에서도 大使·大使者·使者 등의 관명이 보이고 있어(《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 부여와 고구려에 공통된 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낙랑 채협총에서 출토된 彩畵漆에도 ‘使者’의 관명이 나오고 있어 중국의 영향으로 생긴 이름으로 추측되고 있다. 관등과 관직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을 이 시기에 그 임무는 租賦의 수취를 책임맡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체제의 확립과정에서 租賦의 수취가 중시됨에 따라 使者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뒤에 太大使者, 大使者, 收位使者, 上位使者, 小使者 등으로 분화되었다(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1975 |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學報》 86, 1978).닫기추발소(鄒㪍素)가 부임하여 별도로 큰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구도(仇都) 등 죄인을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仇都) 등이 앞에 나와 고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이어서 왕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과오를 용서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026 고구려의 관등의 하나. 부여에서도 大使·大使者·使者 등의 관명이 보이고 있어(《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 부여와 고구려에 공통된 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낙랑 채협총에서 출토된 彩畵漆에도 ‘使者’의 관명이 나오고 있어 중국의 영향으로 생긴 이름으로 추측되고 있다. 관등과 관직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을 이 시기에 그 임무는 租賦의 수취를 책임맡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체제의 확립과정에서 租賦의 수취가 중시됨에 따라 使者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뒤에 太大使者, 大使者, 收位使者, 上位使者, 小使者 등으로 분화되었다(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1975 |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學報》 86, 1978).닫기추발소(鄒㪍素)가 그들을 끌어 올려 같이 앉아 말하기를 “사람이 과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과오를 고칠 수 있으면 선(善)함이 막대한 것입니다.”고 하고,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仇都) 등이 감격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026 고구려의 관등의 하나. 부여에서도 大使·大使者·使者 등의 관명이 보이고 있어(《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 부여와 고구려에 공통된 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낙랑 채협총에서 출토된 彩畵漆에도 ‘使者’의 관명이 나오고 있어 중국의 영향으로 생긴 이름으로 추측되고 있다. 관등과 관직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을 이 시기에 그 임무는 租賦의 수취를 책임맡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체제의 확립과정에서 租賦의 수취가 중시됨에 따라 使者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뒤에 太大使者, 大使者, 收位使者, 上位使者, 小使者 등으로 분화되었다(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1975 |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學報》 86, 1978).닫기추발소(鄒㪍素)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할 수 있으니 가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고는 성(姓)을 주어 대실씨(大室氏)라 하였다.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027 대무신왕의 아들로 얼굴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었다.닫기이 옥저(沃沮)028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 지방을 중심하여 있었던 사회이다. 정치 세력의 성장이 비교적 더뎌 漢郡縣의 지배를 받았고, 뒤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본문에서 낙랑왕과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만났다고 한 것은 이 지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한의 군현 세력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고구려에서는 이곳을 동옥저라 부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15 참조.닫기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어찌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好童)027 대무신왕의 아들로 얼굴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었다.닫기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崔氏) 딸에게 알려서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樂浪)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병력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崔氏)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好童)에게 알렸다. 호동(好童)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樂浪)을 습격하였다. 최리(崔理)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아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을 멸하려고 청혼을 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병기와 기물을 부수게 하였다.”029 호동왕자(好童王子)와 관련된 설은 왕에 오르는 여러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전승의 성격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 시기는 정확히 대무신왕대라 할 수 없으나,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낙랑 지배가 인정되고 晉으로부터 고구려 왕 즉 고국원왕이 樂浪公으로 봉하여지기 이전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4세기 후반 이래의 전승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 이 설의 주장이다(井上秀雄, 「高句麗大武神王觀の變遷」, 85~86쪽).닫기고 한다.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자살하였다. 호동(好童)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曷思王)의 손녀에게서 태어났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 왕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던 까닭에 호동(好童)이라 이름을 지었다. 대를 이을 자리를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첫째 왕비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호동(好童)이 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한 짓을 행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미워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왕비가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청컨대 대왕께서 몰래 살펴보시고, 만일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죽을 죄를 진 것으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장차 죄를 주려고 하였다. 혹자는 호동(好童)에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하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해명을 하면 이는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칼에 엎드려 죽었다.
논하여 말한다. 지금 왕이 헐뜯는 말을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도 없이 죽였으니, 그가 어질지 못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동(好童)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을 때에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030 舜의 아버지. ‘瞽’와 ‘瞍’자는 모두 눈이 멀었다는 뜻으로 그가 눈이 있으나 분별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였다고 하여 ‘瞽瞍’라고 불리웠다고 한다(《尙書正義》 堯典).닫기에게 한 것같이 하여 회초리는 맞고 몽둥이는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031 《孔子家語》 권4 六本(明覆宋刊本)에 나오는 말이다. “舜之事 欲使之 未嘗不在於側 索而殺之 未嘗可得 小則待過 大杖則遁走 故不犯不父之罪 而舜不失烝烝之孝”닫기호동(好童)이 이렇게 할 줄을 알지 못하여 마땅하지 않은 상황에서 죽으니 작은 일을 경계하는 데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공자(公子) 신생(申生)032 중국 춘추시대 晉나라 獻公의 太子이다. 헌공이 驪姬를 부인으로 맞이한 후, 여희는 자신의 소생 奚齊로 헌공의 뒤를 잇게 하기 위하여 신생을 曲沃으로 쫓아내고 뒤이어 모함하였으므로 신생은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春秋左氏傳》 莊公 28년조, 閔公 2년조, 僖公 4년·5년조 등 참조).닫기과 비슷하다고 할까?
12월에 왕자 해우(解憂)033 모본왕의 이름. 이때 태자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숙부인 민중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고, 그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닫기를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한(漢)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034 後漢의 초대 황제이다.닫기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035 《후한서》 권85 고구려전과 《자치통감》 권42 光武帝 建武 8년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는 《삼국사기》 권13 유리왕 22년조에 보이는 내용 즉, 王莽이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으나 고구려인이 듣지 않자 왕망은 고구려를 치고 고구려 왕을 ‘下句麗侯’라고 卑稱하였다고 하는 것에 대응하는 것이다.닫기. 이때가 건무(建武)36 후한 光武帝 때 사용된 연호. 25~55년 사이 사용.닫기 8년이다.
20년(37) 왕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24년(41) 봄 3월에 서울(京都, 국내성)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매화가 피었다.
27년(44) 가을 9월에 한(漢) 광무제(光武帝)가 병력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樂浪)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 살수(薩水)038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존속되었으므로(《삼국사기》 권17 미천왕 14년조) 이때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하였다는 것은 과장이거나 잘못 전한것일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국역 삼국사기》)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樂浪’은 崔理의 樂浪國의 경우와 같이 한의 낙랑군과는 다른 소국일 수도 있어(위의 주석 29 참조) 이를 誤謬로만 여길 수는 없다. 여기의 樂浪을 樂浪國으로 볼 경우, 본 기사는 이보다 5년 전 낙랑국을 침략하여 그 항복을 받았다는 앞의 기사를 부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를 한의 낙랑군으로 볼 경우 30년에 있었던 토착민 王調가 반란하여 낙랑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을 고구려측에서 이와 같이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닫기 이남을 한(漢)에 속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서거하였다. 대수촌(大獸村)040 대무신왕이 일명 大解朱留王이라고도 불린 것은 소수림왕이 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는 사실과 공통점을 가진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대무신왕이 묻힌 장소 ‘大獸村’은 ‘大獸林’의 잘못이라고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235쪽 및 井上秀雄, 「高句麗大武神王觀の變遷」, 《朝鮮歷史論集》 上, 1979).닫기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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