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卷第十四)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2(第二)
대무신왕(大武神王)·민중왕(閔中王)·모본왕(慕本王)


대무신왕(大武神王)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즉위하였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성장하여서는 영웅호걸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琉璃王)이 재위 33년 갑술에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씨(松氏)로서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2년(19) 봄 정월에 서울(京都)에 벼락이 쳐서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3년(20) 봄 3월에 동명왕(東明王) 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에 왕이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이름을 거루(駏䮫)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赤烏)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扶餘)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하여 붉은 색이 되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합칠 것입니다.”하였다. 대소(帶素)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답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赤烏)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어서는 갖지 아니하고 나에게 보내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대소(帶素)가 그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4년(21)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扶餘)를 정벌하려고, 비류수(沸流水上)에 도달하였다.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이 없이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 한 군대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어버렸는데, 왕이 지금 이를 얻었으니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렸다.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으로 된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하늘이 준 것이다.”하고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하는데 한 사람이 나타났다.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왕에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대왕이 북쪽으로 부여(扶餘)를 정벌하신다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신은 청하옵건대 따라가서 부여(扶餘王)의 머리를 베어 오고자 합니다.”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이 또 허락하였다.

5년(22) 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아 왕이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扶餘王)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몰아 전진해 왔다가,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에 괴유(怪由)에게 지시하니, 괴유(怪由)가 칼을 빼서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니 대부분의 군대가 이리저리 밀려 쓰러지며 능히 지탱하지 못하였다. 곧바로 나아가 부여(扶餘王)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扶餘) 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다가, 하늘에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다. 왕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여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적의 눈을 속이는 가짜 군사를 만들어 놓고, 샛길을 따라 군대를 숨겨 밤에 나왔다. 골구천(骨句川)의 신마(神馬)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어 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병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급식하였다. 왕이 나라에 돌아와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扶餘)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아직 멸하지 못하였고, 또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하였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와 아픈 자를 조문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

3월에 신마(神馬) 거루(駏䮫)부여말(扶餘馬) 1백 필을 거느리고 학반령(䳽盤嶺) 아래 차회곡(車廻谷)으로 왔다.

여름 4월에 부여(扶餘王) 대소(帶素)의 동생이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이 부여(扶餘王) 금와(金蛙)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帶素)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라다니는 사람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鴨渌谷)에 이르렀다. 해두왕(海頭王)이 나와서 사냥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왕(曷思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扶餘王)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曷思)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못나고 어리석어 다시 일으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이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내부(掾那部)에 두었다.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씨(絡氏) 성을 주었다.

겨울 10월에 괴유(怪由)가 죽었다. 처음에 병이 위독하여 왕이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괴유(怪由)가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누차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으니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때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8년(25) 봄 2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국(軍國)의 일을 맡겼다.

9년(26) 겨울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여 안정시켰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蓋馬)가 멸망한 것을 듣고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이로써 땅을 개척하여 점차 넓어졌다.

10년(27) 봄 정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11년(28) 가을 7월에 한(漢)요동(遼東) 태수(太守)가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고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右輔) 송옥구(松屋句)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봉기하였는데도 명분이 없이 병력을 출동시켰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니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험한 곳에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작은 적(敵)이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병력과 (漢)나라의 병력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헤아려 보건대 계책으로는 정벌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하였다. 왕이 “계책으로 정벌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지금 한(漢)의 병력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저들의 군대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나가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는데 (漢)의 병력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乙豆智)에게 일러 말하기를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다. 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漢)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돌로 된 땅이어서 물이 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오래 포위하여 우리가 어려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의 군대에 보내어 군사를 위로하십시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글을 주어 말하기를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上國)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이 어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보내 부하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漢)의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어 갑자기 쳐서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답하기를 “우리 황제가 나를 둔하다고 여기지 않고 영을 내려 군대를 출동시켜 대왕의 죄를 묻게 하였는데,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나도록 요령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보내온 글을 보니 말이 도리를 따르고 또 공순하니 감히 핑계를 대지 않고 황제에게 보고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13년(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투항해왔다.

14년(31) 겨울 11월에 천둥은 치는데 눈은 오지 않았다.

15년(32) 봄 3월에 대신(大臣) 구도(仇都)·일구(逸苟)·분구(焚求) 등 세 사람을 쫓아내어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이 되었는데 본래 욕심이 많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妻妾)·우마(牛馬)·재화(財貨)를 빼앗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여,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매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동명왕(東明王)의 옛 신하였던 까닭에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내쫓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남부(南部) 사자(使者) 추발소(鄒㪍素)로 하여금 대신 부장을 삼았다. 추발소(鄒㪍素)가 부임하여 별도로 큰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구도(仇都) 등 죄인을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仇都) 등이 앞에 나와 고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이어서 왕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과오를 용서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추발소(鄒㪍素)가 그들을 끌어 올려 같이 앉아 말하기를 “사람이 과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과오를 고칠 수 있으면 선(善)함이 막대한 것입니다.”고 하고,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仇都) 등이 감격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추발소(鄒㪍素)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할 수 있으니 가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고는 성(姓)을 주어 대실씨(大室氏)라 하였다.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어찌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好童)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崔氏) 딸에게 알려서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樂浪)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병력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崔氏)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好童)에게 알렸다. 호동(好童)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樂浪)을 습격하였다. 최리(崔理)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아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을 멸하려고 청혼을 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병기와 기물을 부수게 하였다.”고 한다.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자살하였다. 호동(好童)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曷思王)의 손녀에게서 태어났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 왕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던 까닭에 호동(好童)이라 이름을 지었다. 대를 이을 자리를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첫째 왕비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호동(好童)이 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한 짓을 행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미워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왕비가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청컨대 대왕께서 몰래 살펴보시고, 만일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죽을 죄를 진 것으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장차 죄를 주려고 하였다. 혹자는 호동(好童)에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하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해명을 하면 이는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칼에 엎드려 죽었다.

논하여 말한다. 지금 왕이 헐뜯는 말을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도 없이 죽였으니, 그가 어질지 못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동(好童)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을 때에는 마땅히 (舜)이 고수(瞽瞍)에게 한 것같이 하여 회초리는 맞고 몽둥이는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好童)이 이렇게 할 줄을 알지 못하여 마땅하지 않은 상황에서 죽으니 작은 일을 경계하는 데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공자(公子) 신생(申生)과 비슷하다고 할까?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漢)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때가 건무(建武) 8년이다.

20년(37) 왕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24년(41) 봄 3월에 서울(京都, 국내성)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매화가 피었다.

27년(44) 가을 9월에 (漢) 광무제(光武帝)가 병력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樂浪)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 살수(薩水) 이남을 한(漢)에 속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서거하였다. 대수촌(大獸村)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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