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112 신라 제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4~57년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노례왕(弩禮王)이라고도 했다.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삼노례왕(第三弩禮王)에는 서기 23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같은 책 왕력이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유리이사금대부터 ‘이사금(尼師今)’이란 왕호를 사용하였고, 9년(32)에는 6부에 성을 내려주고 중앙의 17관등을 정하였다.닫기이 즉위했다. 남해(南解)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며 비(妃)는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113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일성 이사금조에서는 일지갈문왕을 일성왕의 아버지라 하였고,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禮夫人 日知葛文王之父(女의 誤記: 역주자 註)》라 하여 일성왕비 △禮夫人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지갈문왕은 일성왕 혹은 일성왕비의 아버지라기 보다는 본문에서와 같이 유리왕비의 아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0쪽).닫기의 딸이다. 혹은 비는 성(姓)이 박(朴)으로 허루왕(許婁王)114 허루는 漢祇部 사람으로 파사왕비인 史省夫人의 아버지이다. 성은 박씨 혹은 김씨라 하였다. 파사왕대에 그의 딸을 태자였던 祇摩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고 대신 파사왕으로부터 후대의 角干에 해당되는 酒多의 벼슬을 받았다. 한편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유리왕의 비를 辝要王의 딸 김씨라 하였으나, 사요왕이 허루왕과 同一人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닫기의 딸이라 한다.115 유리왕의 왕비는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는 전승과 더불어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김씨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고도 했다.닫기 원래 남해(南解)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리(儒理)가 즉위함이 마땅했으나 대보(大輔) 116 신라 초기에 관등이 생기기 이전에 국정을 총괄했던 직책이다. 탈해 이외에 탈해이사금대에 호공(瓠公)과 알지(閼智)가 대보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고구려에서 유리왕 22년(3) 협보를 대보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년조).닫기탈해(脫解)117 신라 제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외부에서 이주해와 석씨(昔氏)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의 집권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즉위년과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 자세하다. 또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로는 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2~53쪽 참조.닫기가 평소에 덕망이 있다고 하여 그 위(位)를 미루어 양보하자 탈해(脫解)가 말했다.
“이사금(尼師今)118 신라 초기의 왕호로 《삼국유사》에서는 제3대 유리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이사금의 왕호를 사용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제18대 실성왕까지 사용하였다. 尼叱今 또는 齒叱今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잇금’의 다른 표기이다. 金大問은 이사금을 연장자의 표징인 잇금[齒理]을 의미한다 하였고, 이병도는 ‘잇’ 혹은 ‘이스’의 對譯으로 嗣王 혹은 후계왕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유리왕대부터 왕호를 이사금이라 칭한 이유는 이때 이르러 몇개 부족의 연맹이 성립된 결과 부족연맹장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철준, 「고구려 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143쪽).닫기은 방언(方言)으로서 잇금(齒理)을 가리킨다. 예전에 남해(南解)가 죽으려 할 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5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幸)하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으려 하는 할멈을 발견하고 말했다.
9년 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하사했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123 及梁部 혹은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서는 喙部라 하였다. 6부 중에서 가장 우세한 部로서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일대 혹은 皇南洞·皇吾洞 일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中興部로 개명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이(李)였다.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124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표기되었다. 양부와 함께 6부를 주도했던 部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천 이북 서천 이동 그리고 북천 이남 일대에 그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남천 이남의 남산 서북쪽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량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山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최(崔)125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사량부의 성을 鄭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126 牟梁部 혹은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岑喙部로도 표기되었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長福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모량(牟梁)이라고도 하며 성은 손(孫)이었다.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127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本波部로도 표기되었다. 6부 중에서 양부, 사량부 다음으로 우세했던 부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通仙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정(鄭)12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본피부의 성을 崔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이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가 되었으니 성은 배(裴)였다.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129 (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설(薛)이었다.130 6촌에서 6부로의 개편과정과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전덕재, 「신라 6부 명칭의 어의와 그 위치」,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닫기 아울러 관(官)을 설치하니 모두 17등이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湌) 중의 최고 관등. 伊罰干, 于伐干, 于伐湌, 角干, 角粲, 徐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하였다.닫기13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둘째는 이척찬(伊尺湌)13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셋째는 잡찬(迊湌)13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넷째는 파진찬(波珍湌)13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湌)13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여섯째는 아찬(阿湌)13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湌)13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여덟째는 사찬(沙湌)13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8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湌)14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9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째는 대나마(大奈麻)1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0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한째는 나마(奈麻)14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두째는 대사(大舍)1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셋째는 소사(小舍)14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네째는 길사(吉士)14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다섯째는 대오(大烏)14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여섯째는 소오(小烏)14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 열일곱째는 조위(造位)14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닫기였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149 지금 8월 보름 명절인 추석(秋夕)을 한가위라고 부른다. ‘가위’는 ‘가배’에서 전래된 것이다.닫기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122 6부(部)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하다. 먼저 유리이사금대의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 연구자가 있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222~225쪽). 일반적으로는 후대의 사실이 부회된 것으로 보는데 그것도 이사금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과(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27~37쪽) 마립간 시기로 보는 설로 크게 나누어진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599~602쪽 | 선석렬, 《신라 골품제의 성립기반과 그 구조》, 《부대사학》 11, 1987 | 주보돈,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2 | 주보돈, 「신라 상고기의 통치체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한국고대사학회, 서경, 2007, 245~247쪽), 또한 성씨의 사용도 중고기 이후의 것을 상고기에 부회하여 생긴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10~27쪽).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참조.닫기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123 及梁部 혹은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서는 喙部라 하였다. 6부 중에서 가장 우세한 部로서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일대 혹은 皇南洞·皇吾洞 일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中興部로 개명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이(李)였다.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24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표기되었다. 양부와 함께 6부를 주도했던 部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천 이북 서천 이동 그리고 북천 이남 일대에 그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남천 이남의 남산 서북쪽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량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山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최(崔)125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사량부의 성을 鄭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가 되었으니 모량(牟梁)이라고도 하며 성은 손(孫)이었다.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127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本波部로도 표기되었다. 6부 중에서 양부, 사량부 다음으로 우세했던 부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通仙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정(鄭)12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본피부의 성을 崔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이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가 되었으니 성은 배(裴)였다.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129 (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설(薛)이었다.130 6촌에서 6부로의 개편과정과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자세하다. 신라 6부의 위치와 그 시대별 변동에 대해서는 전덕재, 「신라 6부 명칭의 어의와 그 위치」,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닫기 아울러 관(官)을 설치하니 모두 17등이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湌)중의 최고 관등. 伊罰干, 于伐干, 于伐湌, 角干, 角粲, 徐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하였다.닫기13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 둘째는 이척찬(伊尺湌)13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찬(伊湌)이라고도 했다.닫기, 셋째는 잡찬(迊湌)13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잡판(迊判), 소판(蘇判)이라고도 했다.닫기, 넷째는 파진찬(波珍湌)13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닫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湌)13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아찬에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닫기, 여섯째는 아찬(阿湌)13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 했으며, 중아찬(重阿湌)~4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닫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湌)13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 여덟째는 사찬(沙湌)13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8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살찬(薩湌),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했다.닫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湌)14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9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급찬(級湌), 급복간(及伏干)이라고도 했다.닫기, 열째는 대나마(大奈麻)1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0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나말(大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9중나마(九重奈麻)까지 있었다.닫기, 열한째는 나마(奈麻)14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나말(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7중나마(七重奈麻)까지 있었다.닫기, 열두째는 대사(大舍)1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한사(韓舍)라고도 했다.닫기, 열셋째는 소사(小舍)14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사지(舍知)라고도 했다.닫기, 열네째는 길사(吉士)14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계지(稽知), 길차(吉次)라고도 했다.닫기, 열다섯째는 대오(大烏)14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오지(大烏지)라고도 했다.닫기, 열여섯째는 소오(小烏)14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소오지(小烏知)라고도 했다.닫기, 열일곱째는 조위(造位)14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선저지(先沮知)라고도 했다.닫기였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149 지금 8월 보름 명절인 추석(秋夕)을 한가위라고 부른다. ‘가위’는 ‘가배’에서 전래된 것이다.닫기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 11년 서울(경도, 京都)에서 땅이 갈라지고(地裂) 샘이 솟구쳤다(泉湧). 여름 6월 홍수가 있었다. 13년 가을 8월에 낙랑(樂浪)150 낙랑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중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08년에서 서기 313년이다. 이 시기에 낙랑과 신라가 직접 충돌할 정도로 교섭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낙랑과 신라와의 관련성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곧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신라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군현(漢郡縣)의 약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진한 사람들은 낙랑의 유이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변진의 철을 매개로 낙랑군·대방군과 교역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김길식, 「삼한지역 출토 낙랑계 문물」,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편, 솔, 2001, 247쪽). 신라와 낙랑의 종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참조.닫기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14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151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이름이다. 재위 기간은 18~44년이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또는 미류(味留)라고도 불렀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즉위년 | 《삼국유사》 권1, 왕력).닫기이 낙랑(樂浪)152 낙랑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중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08년에서 서기 313년이다. 이 시기에 낙랑과 신라가 직접 충돌할 정도로 교섭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낙랑과 신라와의 관련성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곧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신라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군현(漢郡縣)의 약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진한 사람들은 낙랑의 유이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변진의 철을 매개로 낙랑군·대방군과 교역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김길식, 「삼한지역 출토 낙랑계 문물」,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편, 솔, 2001, 247쪽). 신라와 낙랑의 종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참조.닫기을 습격해 멸망시켰다.153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0년(37)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낙랑국(樂浪國)에도 노례왕[유리왕] 4년(27)에 대무신왕이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노례왕 14년의 오류로 본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회문화사, 2002, 169쪽). 낙랑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 것도 미천왕 14년(313)의 일이므로, 이 기사는 대무신왕의 낙랑군 침략과 그 파장이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차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닫기 그 나라 사람 5천이 항복해 오니 육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17년 가을 9월 화려(華麗)·불내(不耐) 2현(縣)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거수, 渠帥)가 군사들로 하여금 곡하(曲河) 서쪽을 막아 물리치게 했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貊國)과 우호를 맺었다.154 임둔 15현 중의 하나였는데, 서기전 82년에 임둔군이 현도군에 병합될 때 현도군에 예속되었다. 후에 현도군의 治所가 渾河 상류로 옮겨감에 따라 낙랑군에 이속되어 東部都尉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구려 太祖王 때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華麗縣의 위치는 현재의 함경남도 영흥군 順寧面 일대로 추정되는데, 順寧面에 있는 土城址가 아마 당시 華麗縣의 治所가 아닐까 한다(이병도, 「임둔군고」, 《한국고대사연구》, 1976, 207~208쪽).닫기불내(不耐)155 《漢書》 권28 지리지 낙랑군조에는 ‘不而’로 표기하였다. 不耐縣은 임둔 15현 중의 하나였는데, 서기전 82년에 임둔군이 현도군에 병합될 때 현도군의 관할이 되었고 후에 현도군치가 渾河 상류로 옮겨감에 따라 낙랑군에 이속되어 東部都尉의 치소가 되었다. 서기 30년경에 後漢이 동부도위를 혁파했을 때 불내현은 侯國이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불내현의 위치는 현재의 함경남도 安邊 내지 通川 부근으로 비정된다(이병도, 「임둔군고」, 《한국고대사연구》, 1976, 195~202쪽).닫기 2현(縣)156 화려현은 함남 영흥군의 옛 이름이 화령(和寧)인데 주목해, 일제시대에 한대(漢代)의 토성 터와 기와가 발견된 영흥군 순녕면(順寧面)으로 위치가 비정되었다(이병도, 「임둔군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207~208쪽). 지금의 함남 금야군 금야 추정된다.닫기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맥국(貊國)157 《삼국사기》 권35, 지리2, 삭주(朔州)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건치연혁을 참고하면, 맥국은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일대에 있었던 소국(小國)이 유력하다. 맥국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김덕원, 「맥국의 실체와 신라의 교섭」, 《역사민속학》 24, 한국역사민속학회, 2007 참조.닫기의 우두머리(거수, 渠帥)가 군사들로 하여금 곡하(曲河) 서쪽을 막아 물리치게 했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19년 가을 8월에 맥(貊)의 우두머리가 짐승을 사냥해 바쳤다. 31년 봄 2월에 살별(星孛)이 자궁(紫宮)에 나타났다.158 살별에는 패성(孛星)·혜성(彗星)·장성(長星)이 있다. 패성은 내뿜는 빛줄기가 짧고 그 빛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것이고, 혜성은 빛의 꼬리가 길게 늘어뜨려진 것이며, 장성은 빛의 꼬리가 직선으로서 대체로 긴 것을 말한다. 살별이 나타나면 나쁜 기운이 생긴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닫기이 자궁(紫宮)159 동양 고대 천문의 별자리 형식인 삼원(三垣)에서 가운데를 차지하는 북극성 주변의 천공을 말한다. ‘자미궁(紫微宮)’ ‘자미원(紫微垣)’이라고도 한다. 북극성이 천제(天帝)의 별이라면, 자궁은 황궁(皇宮)의 의미를 가진다(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137~141쪽).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에 따르면, 진흥왕이 자궁(紫宮)을 용궁(龍宮)의 남쪽에 지으려고 하는 데, 황룡(黃龍)이 나타나서 이것을 고쳐서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진흥왕대의 천문 인식이 현실 정치에 구현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닫기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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