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신기대보(神器大寶)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가 못된다. 내가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물어 시험해 보자.“ 유리(儒理)의 치아가 많았으므로, 좌우 사람들과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니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했다. 옛 전승이 이와 같으니, 김대문(金大問)은 말했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方言)으로서 잇금(齒理)을 가리킨다. 예전에 남해(南解)가 죽으려 할 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내가 죽으면 너희 박(朴)·석(昔) 두 성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王位)를 잇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 후 김성(金姓)도 일어나, 3성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했다.”
2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지내고 사면을 크게 단행했다.

5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幸)하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으려 하는 할멈을 발견하고 말했다.

“내가 보잘것 없는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부양하지 못하여 노인과 어린 것들을 이렇게 극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의 죄이다.” 옷을 벗어 덮어주고 음식을 주어 먹게 했다. 그리고 담당 기관에 명해 곳곳을 살펴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 자식이 없는 사람과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양식을 지급했다. 이를 듣고 이웃 나라 백성들이 많이 왔다. 이 해에 백성들의 풍속이 즐겁고 평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작이 되었다.

9년 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하사했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가 되었으니 성은 이(李)였다.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가 되었으니 성은 최(崔)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가 되었으니 모량(牟梁)이라고도 하며 성은 손(孫)이었다.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가 되었으니 성은 정(鄭)이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가 되었으니 성은 배(裴)였다.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가 되었으니 성은 설(薛)이었다. 아울러 관(官)을 설치하니 모두 17등이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湌), 둘째는 이척찬(伊尺湌), 셋째는 잡찬(迊湌), 넷째는 파진찬(波珍湌), 다섯째는 대아찬(大阿湌), 여섯째는 아찬(阿湌), 일곱째는 일길찬(一吉湌), 여덟째는 사찬(沙湌), 아홉째는 급벌찬(級伐湌), 열째는 대나마(大奈麻), 열한째는 나마(奈麻), 열두째는 대사(大舍), 열셋째는 소사(小舍), 열네째는 길사(吉士), 열다섯째는 대오(大烏), 열여섯째는 소오(小烏), 열일곱째는 조위(造位)였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

“회소(會蘇) 회소(㑹蘇)”라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했다.

11년 서울(경도, 京都)에서 땅이 갈라지고(地裂) 샘이 솟구쳤다(泉湧). 여름 6월 홍수가 있었다.

13년 가을 8월에 낙랑(樂浪)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14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17년 가을 9월 화려(華麗)·불내(不耐) 2현(縣)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거수, 渠帥)가 군사들로 하여금 곡하(曲河) 서쪽을 막아 물리치게 했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貊國)과 우호를 맺었다.

19년 가을 8월에 (貊)의 우두머리가 짐승을 사냥해 바쳤다.

31년 봄 2월에 살별(星孛)이 자궁(紫宮)에 나타났다.

33년 여름 4월에 용이 금성(金城)의 우물에 나타났다. 잠시 후 폭우가 서북쪽으로부터 몰려왔다.
34년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신료들에게 말했다.
탈해(脫解)는 몸이 왕족과 연결되고 지위가 보필하는 신하의 자리에 있어 수없이 공로와 명예를 드러냈다. 짐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게 한참 못 미친다. 내가 죽은 뒤 왕위에 즉위하게 하여 나의 유훈을 잊지 않도록 하라.”
겨울 10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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