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閔哀王)


민애왕(閔哀王)이 즉위하니, 성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明)으로,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증손이다. 대아찬(大阿湌) 충공(忠恭)의 아들로, 여러 번 벼슬하여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시중(侍中) 이홍(利弘)과 왕을 핍박하여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선강대왕(宣康大王)의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고, 어머니 박씨(朴氏) 귀보부인(貴寶夫人)선의태후(宣懿太后)라 하였으며, 부인 김씨(金氏)윤용왕후(允容王后)라 하였다.

이찬(伊湌) 김귀(金貴)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아찬(阿湌) 헌숭(憲崇)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에 김양(金陽)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우징(祐徵)을 만났다. 우징(祐徵)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김명(金明)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청해진(淸海鎭) 대사 궁복(弓福)에게 말하기를,
김명(金明)은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으며 이홍(利弘)도 임금과 아버지를 죽였으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원컨대 장군의 병사에 기대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궁복(弓福)이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의(義)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용렬(庸劣)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 하고, 드디어 병사 5천 명을 내어 친구 정년(鄭年)에게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김양(金陽)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과 함께 군대를 통솔하여 무주(武州) 철야현(鐵治縣)에 이르렀다. 왕은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서 싸우게 하였는데, 낙금(駱金)이순행(李順行)이 기병 3천 명으로 돌격하게 하여 거의 다 섬멸하였다.

2년(839년) 봄 윤 정월에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언덕에 이르렀다.

왕이 병사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伊湌) 대흔(大昕), 대아찬(大阿湌) 윤린(允璘), 억훈(嶷勛)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막도록 하였다. 또다시 일전을 벌여 크게 이기니, 왕의 군사 중 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이때에 왕은 서쪽 교외의 큰 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측근 신하들이 모두 흩어지자 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쳐 들어갔으나 병사들이 찾아내 죽였다.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諡號)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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