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왕(哀莊王)


애장왕(哀莊王)이 즉위하였다. 휘는 청명(淸明)이니, 소성왕(昭聖王)의 태자로 어머니는 김씨(金氏) 계화부인(桂花夫人)이다. 즉위 때에 나이가 13세여서, 아찬(阿湌) 병부령(兵部令) 언승(彦昇)이 섭정을 하였다.

앞서 원성왕(元聖王)이 돌아가시자 당(唐) 덕종(德宗)이 사봉낭중(司封郞中)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위단(韋丹)을 지절사(持節使)로 보내어 조문케 하고, 또 왕 준옹(俊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는데 위단(韋丹)운주(鄆州)에 이르러 왕의 죽음을 듣고는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왕이 이름을 중희(重熙)로 바꿨다.

8월에 전(前) 입당(入唐) 숙위학생(宿衛學生)인 양열(梁悅)을 두힐현(豆肹縣) 소수(小守)에 제수하였다. 앞서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 행행(行幸)할 때 양열(梁悅)이 수행한 공이 있어, 황제가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를 제수하여 돌려보냈기 때문에 왕이 그를 발탁하여 썼다.

2년(801년) 봄 2월에 시조묘를 배알(拜謁)하였다.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2묘를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과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明德大王), 증조부 원성대왕(元聖大王), 조부 혜충대왕(惠忠大王), 아버지 소성대왕(昭聖大王)을 오묘(五廟)로 하였다.

병부령(兵部令) 언승(彦昇)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으로 삼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등(上大䓁)으로 삼았다.

대사면을 하였다.

여름 5월 초하루 임술(壬戌)일에 일식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에 형혹(熒惑)이 달에 들어갔고, 별이 비처럼 쏟아졌다.

무진주(武珍州)에서 붉은 까마귀(赤烏)를 진상하였다.

우두주(牛頭州)에서 흰 꿩(白雉)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에 큰 추위가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탐라국(耽羅國)에서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였다.

3년(80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에 아찬(阿湌) 김주벽(金宙碧)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가을 7월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8월에 가야산(加耶山)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
삽량주(歃良州)에서 붉은 까마귀(赤烏)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에 균정(均貞)에게 대아찬(大阿湌)을 제수하고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왜국(倭國)에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均貞)이 사양하였다.
4년(803년) 여름 4월에 왕이 남교(南郊)에 가서 보리 농사를 살폈다.
가을 7월에 일본국(日本國)과 교빙(交聘)하여 우호를 맺었다.
겨울 10월에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5년(804년) 봄 정월에 이찬(伊飡) 수승(秀昇)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여름 5월에 일본국(日本國)이 사신을 파견해 황금 3백 냥을 바쳤다.

가을 7월에 알천(閼川) 가에서 크게 열병(閱兵)을 하였다.

삽량주(歃良州)에서 흰 까치(白鵲)를 진상하였다.

임해전(臨海殿)을 중수(重修)하고 동궁(東宮)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지었다.

우두주(牛頭州) 난산현(蘭山縣)에서 엎어져 있던 돌이 일어섰다.

웅천주(熊川州) 소대현(蘇大縣) 부포(釜浦)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9월에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부딪쳤다.

6년(805년) 봄 정월에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하여 대왕후(大王后)로 삼고, 왕비 박씨(朴氏)를 봉하여 왕후(王后)로 삼았다.

이 해(805년)에 당(唐) 덕종(德宗)이 돌아가니, 순종(順宗)이 병부낭중(兵部郞中)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원계방(元季方)을 보내 상(喪)을 알렸다. 또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겸(兼)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그 어머니 숙씨(叔氏)를 책봉하여 대비(大妃)로 삼았으며, 대비(大妃)의 아버지는 숙명(叔明)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3세손이니, 곧 어머니의 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숙씨(叔氏)라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부인 박씨(朴氏)를 책봉하여 비(妃)로 삼았다.

가을 8월에 공식(公式)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겨울 11월에 지진(地震)이 났다.

7년(806년) 봄 3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오니,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만나보았다.

왕이 하교(下敎)하기를,

“새로운 불사(佛寺) 창건을 금지하고 오직 수즙(修葺)만을 허락한다. 또 비단에 수를 놓아 불사(佛事)하는 것과 금은(金銀)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널리 알리고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헌종(憲宗)이 숙위왕자(宿衛王子) 김헌충(金獻忠)을 귀국하게 하고, 시비서감(試秘書監)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가을 8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년(807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김헌창(金憲昌) 또는 김헌정(金憲貞)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앉아 주악(奏樂)을 감상하였다.
가을 8월에 큰 눈이 내렸다.
9년(808년) 봄 2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오니, 왕이 후한 예의로 대접하였다.
당(唐)김력기(金力奇)를 보내 조공하였다. 김력기(金力奇)가 말씀 올리기를
“정원(貞元) 16년(800년)에 조서를 내려 신의 옛 임금인 김준옹(金俊邕)을 신라 왕(新羅王)으로, 어머니 신씨(申氏)를 대비(大妃)로, 부인 숙씨(叔氏)를 왕비로 책봉하셨으나, 책봉사(冊封使)인 위단(韋丹)이 도중에서 왕의 죽음을 듣고 돌아가 그 책문은 중서성(中書省)에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지금 신이 귀국하는 길에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칙명을 내려
김준옹(金俊邕) 등의 책서(冊書)는 홍려시(鴻臚寺)중서성(中書省)에서 수령하고, 김력기(金力奇)홍려시(鴻臚寺)에서 받아 받들어 귀국하게 하라.” 또 왕의 숙부 언승(彦昇)과 그 아우 중공(仲恭) 등에게 문극(門戟)을 하사하고, 본국(本國)의 예에 준하여 그것을 주도록 하였다. 신씨(申氏)는 김신술(金神述)의 딸로, 신(神)자와 음이 같아 성을 신(申)이라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사자를 12도(道)에 보내어, 여러 군읍(郡邑)의 경계를 나누어 정하였다.
가을 7월 초하루 신사(辛巳)일에 일식이 있었다.
10년 봄 정월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犯)하였다.
여름 6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의 소금 창고가 울었는데, 그 소리가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벽사(碧寺)의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었다.
가을 7월에 대아찬(大阿湌) 김육진(金陸珍)당(唐)에 보내 사은(謝恩)을 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크게 가물었다.
왕의 숙부 언승(彦昇)과 아우 이찬(伊飡) 제옹(悌邕)이 병사를 이끌고 들어와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아우 체명(體明)도 왕을 모시고 호위하다 함께 화를 입었다. 왕을 추시(追諡)하여 애장(哀莊)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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