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왕(哀莊王)
애장왕(哀莊王)097 신라의 제40대 왕. 소성왕의 태자로 재위 기간은 800년~809년이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의 숙부 김언승(金彦昇)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 6년에 공식령(公式令) 20여 조를 반포하고 808년에 12도에 사신을 보내 군·읍의 경계를 정한 것이 대표적인 치적이다. 그리고 일시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외교를 재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0).닫기이 즉위하였다. 휘는 청명(淸明)098 청명(淸明)은 애장왕의 원래 이름이었는데, 즉위년 7월에 ‘중희(重熙)’로 바꾸었다. 개명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도, 애장왕의 이름은 중희 또는 청명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0).닫기이니, 소성왕(昭聖王)의 태자로 어머니는 김씨(金氏) 계화부인(桂花夫人)이다. 즉위 때에 나이가 13세여서, 아찬(阿湌) 병부령(兵部令) 099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병부령(兵部令)에 보임될 수 있는 관등은 대아찬에서 태대각간까지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김언승은 아찬으로서 병부령의 직을 맡았다고 하여 직관지의 규정과 어긋난다. 한편 김언승은 원성왕 6년에 이미 대아찬, 동왕 11년에는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아찬(阿湌)’은 ‘이찬(伊湌)’의 오기로 판단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0).닫기언승(彦昇)100 소성왕 俊邕의 아우로 원성왕 6년에 견당사로 파견되었고 동왕 7년에 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동왕 10년에 이르러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 11년(795)에 이찬으로서 재상, 동왕 12년에 상대등, 애장왕 원년에 각간, 동왕 2년에 어룡성 사신을 거쳐 애장왕 10년 7월에 동생 悌邕과 함께 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여 헌덕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07).닫기이 섭정을 하였다.
앞서 원성왕(元聖王)이 돌아가시자 당(唐) 덕종(德宗)이 사봉낭중(司封郞中)101 당나라 이부(吏部) 소속으로, 나라의 봉작(封爵)을 담당하는 관리이다. 정원은 1명이고 관품은 종5품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0).닫기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위단(韋丹)102 당나라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출신으로 자는 문명(文明)이다. 신라에 책봉사로 파견되었다가 도중에 신라의 소성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후 위단은 용주자사(容州刺史), 하남소윤(河南少尹),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58세의 나이로 죽었다(《신당서》 권197 열전 위단전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10~311).닫기을 지절사(持節使)로 보내어 조문케 하고, 또 왕 준옹(俊邕)103 원성왕의 태자였던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인겸이 원성왕 7년에 죽자 준옹(俊邕)은 궁중에서 성장하였는데, 원성왕 5년에 견당사로 파견되었으며 동왕 6년에 파진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이듬해에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 8년에 병으로 시중직을 그만두었으나 병부령이 되었고 동왕 11년에 태자가 되어 원성왕을 이어 소성왕(昭聖王)이 되었다. 한편 여기서는 원성왕 7년(791년) 당시에 김준옹을 대아찬이라 하였으나 소성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그 보다 1년 전인 원성왕 6년에 이미 파진찬이 되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06).닫기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는데 위단(韋丹)102 당나라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출신으로 자는 문명(文明)이다. 신라에 책봉사로 파견되었다가 도중에 신라의 소성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후 위단은 용주자사(容州刺史), 하남소윤(河南少尹),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58세의 나이로 죽었다(《신당서》 권197 열전 위단전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10~311).닫기이 운주(鄆州)104 현재의 중국 산동생 제성현(諸城縣)이다. 위단이 운주까지 왔다가 되돌아간 사실은 《구당서》 권13 정원(貞元) 16년 4월 기축조, 같은 책 권199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조, 《신당서》 권220 신라전, 《자치통감》 권235 정원 16년 4월조, 《신당서》 권197 열전 위단(韋丹)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한편 《전당문(全唐文)》 권491에 실려 있는 《봉송위중승사신라서(奉送韋中丞使新羅序)》는 위단이 책봉사의 명을 받고 신라로 떠날 때 권덕여(權德輿)가 그에게 지어준 글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1). 중국 산동성 소재 지명(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p275).닫기에 이르러 왕의 죽음을 듣고는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왕이 이름을 중희(重熙)105 《구당서》 권199 신라전과 《신당서》 권220 신라전에서는 ‘중흥(重興)’으로 표기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1).닫기로 바꿨다.
8월에 전(前) 입당(入唐) 숙위학생(宿衛學生)인 양열(梁悅)을 두힐현(豆肹縣)106 백제 때부터 두힐현은 2곳이 있었다. 즉 현재의 전남 고흥군 두원면과 나주시 다시면이 그 곳이다. 여기서는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1). 여지승람(輿地勝覽 : 권35) 나주고적조(羅州古跡條)에 “會津廢縣在州西十五里, 本百濟豆肹縣, 新羅改今名來屬”이라 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 : 권40) 흥양고적조(興陽古跡條)에도 “荳原廢縣在縣西十五里, 本百濟豆肹縣, 新羅改薑原云云”이라 하였으니, 그 중 어느 두힐(豆肹)인지 알지 못하겠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56)분령군(分嶺郡)은 본래 백제 분차군(分嵯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낙안군(樂安郡)이다. 영현이 넷이었다. 충렬현(忠烈縣)은 본래 백제 조조례현(助助禮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남양현(南陽縣)이다. 조양현(兆陽縣)은 본래 백제 동로현(冬老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강원현(薑原縣)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肹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두원현(荳原縣)이다. 백주현(栢舟縣)은 본래 백제 비사현(比史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태강현(泰江縣)이다.(《삼국사기》 권제36, 지리 3, 신라 무주 분령군) 금산군(錦山郡)은 본래 백제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나주목(羅州牧)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회진현(會津縣)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肹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철야현(鐵冶縣)은 본래 백제 실어산현(實於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황현(艅縣)은 본래 백제 수천현(水川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삼국사기》 권제36, 지리 3, 신라 무주 금산군)닫기 소수(小守107 소수(小守)는 현령과 비슷한 현의 우두머리로 소수·제수(制守)라고도 하였는데, 관등이 당(幢)에서 대나마까지인 사람으로 임용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05) 소수(小守) 또는 제수(制守)라고도 하였다. 현의 장관이었다. 그 존재는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5년(789년)조에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駁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라 한 기사에 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 기사는 소수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문적(文籍) 출신(국학 출신)이어야 함을 보여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닫기)에 제수하였다. 앞서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 행행(行幸)할 때 108 봉천은 현재의 중국 섬서성(陜西省) 건현(乾縣)이다.(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p275)당나라 덕종 건중(建中) 4년(783년) 10월에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요령언(姚令言)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였으므로, 덕종은 난을 피하여 봉천으로 피신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1).닫기양열(梁悅)이 수행한 공이 있어, 황제가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109 태자를 시종하고 보좌하던 당나라의 동궁(東宮) 관속(官屬)으로, 정원은 5명이고 관품은 정5품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1)닫기를 제수하여 돌려보냈기 때문에 왕이 그를 발탁하여 썼다.
2년(801년) 봄 2월에 시조묘를 배알(拜謁)하였다.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2묘를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110 미추 이사금을 가리킴.(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p275)닫기과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明德大王), 증조부 원성대왕(元聖大王), 조부 혜충대왕(惠忠大王), 아버지 소성대왕(昭聖大王)을 오묘(五廟)111 태조와 이소(二昭)·이목(二穆)을 모셔놓은 사당으로, 오묘제는 《예기》 왕제(王制)편에 근거한 것이다. 즉 “천자(天子)는 칠묘(七廟)이니 삼소(三昭) 삼목(三穆)과 태조(太祖)의 묘를 합하여 칠묘로 삼으며, 제후(諸侯)는 오묘(五廟)이니 이소(二昭) 이목(二穆)과 태조의 묘를 합하여 오묘를 삼는다”고 하였는데, 태조는 중앙에 위치하고 소는 왼편에 목은 오른편에 각각 배열하되, 일소일목(一昭一穆)의 대립은 부(父 : 昭)·자(子 : 穆)로써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02) 신라는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5묘에 안치된 다섯 신주(神主)의 내용과 그 변동 사항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사지 외에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신문왕(神文王) 7년(687년) 4월조, 《삼국사절요》 권12 혜공왕(惠恭王) 12년(776년)조,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원성왕(元聖王) 원년(785년) 2월조, 애장왕(哀莊王) 2년(801년) 2월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신문왕대의 5묘 구성을 보면,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 용춘(龍春)의 추봉왕명(追封王名)),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으로 되어 있어서, 태조를 제외한 4신위가 신문왕 이전의 왕대순에 의한 4왕이 아니라 추봉대왕까지 합한 직조(直祖) 4명이므로, 이때의 5묘는 시조를 불천지주(不遷之主)로 하고 거기에다가 2소·2목의 4친(親)을 합하여 봉사(奉祀)하는 5묘제의 전형에 걸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5묘 구성은 김씨 시조로서의 미추왕(味鄒王) 뿐만 아니라 태종대왕과 문무대왕까지 합쳐서 세 묘를 불천묘(不遷廟)로 삼고 나머지 두 묘만을 조(祖)·고(考)의 2친으로 하여 합사(合祀)한 것이므로, 이는 5묘제의 원형에서 벗어나 신라의 필요에 의해 그 신주 설치 방식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백제·고구려 평정의 공덕이라는 명분으로 계속 종묘에 남게 하여, 혜공왕 이후의 무열계 김씨 왕실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개정된 5묘제는 제38대 원성왕 때까지 그대로 시행되었으니, 이는 선덕왕대의 5묘 구성에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각기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 : 선덕왕고(宣德王考)의 추봉왕명)만이 합사되어 있고, 원성왕대에는 흥평대왕과 명덕대왕(明德大王 : 원성왕고(元聖王考) 효양(孝讓)의 추봉왕명) 만이 합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애장왕대에는 혜공왕 때의 개정 내용을 다시 번복시켜서,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2묘를 별도로 세움으로써 5묘에서 제외시키고, 5묘 구성은 시조대왕, 고왕조(王高祖) 명덕대왕, 증조(曾祖) 원성대왕, 황조(皇祖) 혜충대왕(惠忠大王 :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의 추봉왕명), 황고(皇考) 소성대왕(昭聖大王), 즉 시조와 왕의 직조 4친으로 함으로써, 원래의 5묘제로 복귀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 《예기》 왕제(王制)편에 “천자는 7묘이니 3소(三昭)·3목(三穆)과 태조의 묘를 합해 일곱이고, 제후는 5묘이니 2소·2목과 태조의 묘를 합해 다섯이며, 대부는 4묘이니 1소·1목과 태조의 묘를 합해 셋이다”라고 하였다. 소·목은 조상의 신위를 묘당에 모시는 차례를 말한다. 북쪽 중앙에 남향하여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오른쪽이 소가 되고 왼쪽이 목이 된다. 소는 부·증조·6대조 등 짝수대의 선조를 의미하고, 목은 조·고조·7대조 등 홀수대의 선조를 의미한다.(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p247) 천자(天子) 7묘(廟), 제후(諸侯) 5묘의 사상, 즉 예기(禮記 : 왕제편(王制篇))의 “天子, 七廟, 三昭三穆與太祖之廟而七, 諸侯 五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에서 나온 것이니, 5묘는 태조(太祖 : 시조)와 2소(昭) 2목(穆)의 합칭(합칭)으로서, 태조는 중앙에 위치하고 소(昭)는 왼쪽, 목(穆)은 오른쪽에 열(列)하되, 1소 1목의 대립은 부(父 : 소)·자(子 : 목)로써 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51)닫기로 하였다.
병부령(兵部令) 언승(彦昇)112 소성왕 俊邕의 아우로 원성왕 6년에 견당사로 파견되었고 동왕 7년에 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동왕 10년에 이르러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 11년(795)에 이찬으로서 재상, 동왕 12년에 상대등, 애장왕 원년에 각간, 동왕 2년에 어룡성 사신을 거쳐 애장왕 10년 7월에 동생 悌邕과 함께 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여 헌덕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07).닫기을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113 어룡성은 내성(內省) 소속의 국왕 근시조직을 통괄하는 관청으로, 경덕왕 11년(752)에 동궁관제가 제정될 때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애장왕 2년에 김언승이 어룡성 사신이 된 것을 계기로 내성 산하에서 분리·독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신(私臣)은 어룡성의 장관이다. 《삼국사기》 권39 잡지 직관(中) 어룡성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1).닫기으로 삼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등(上大䓁)으로 삼았다.
대사면을 하였다.
여름 5월 초하루 임술(壬戌)일에 일식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에 형혹(熒惑)114 태양계의 안쪽에서 4번째 혹성인 화성(火星)의 다른 이름. 공전 주기는 780일이고 15년에서 17년마다 지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다. 이 별이 나타나면 병란(兵亂)이 일어난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이 달에 들어갔고, 별이 비처럼 쏟아졌다.
무진주(武珍州)에서 붉은 까마귀(赤烏)를 진상하였다.
우두주(牛頭州)에서 흰 꿩(白雉)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에 큰 추위가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3년(80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에 아찬(阿湌) 김주벽(金宙碧)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여름 5월에 일본국(日本國)이 사신을 파견해 황금 3백 냥을 바쳤다.
가을 7월에 알천(閼川) 가에서 크게 열병(閱兵)을 하였다.
삽량주(歃良州)에서 흰 까치(白鵲)를 진상하였다.
임해전(臨海殿)을 중수(重修)하고 동궁(東宮)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지었다.
우두주(牛頭州) 난산현(蘭山縣)120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신고산면(新高山面)으로 추정된다. 혹은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史北面) 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곳은 당시 삭주 삭정군의 영현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3). 삭정군(朔庭郡)은 본래 고구려 비열홀군(比列忽郡)이었는데, 진흥왕 17년, 양나라 태평(太平) 원년(556)에 비열주(比列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효소왕 때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180보였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등주(登州)이다. 영현이 다섯이었다. 서곡현(瑞谷縣)은 본래 고구려 경곡현(谷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난산현(蘭山縣)은 본래 고구려 석달현(昔達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상음현(霜陰縣)은 본래 고구려 살한현(薩寒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청산현(菁山縣)은 본래 고구려 가지달현(加支達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문산현(汶山縣)이다. 익계현(翊谿縣)은 본래 고구려 익곡현(翼谷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삼국사기》 권제35, 지리 2, 신라 삭주 삭정군)닫기에서 엎어져 있던 돌이 일어섰다.
9월에 망덕사(望德寺)123 현재의 경북 경주시(慶州市) 배반동(排盤洞)에 있었던 사찰로, 그 사지(寺址)는 현재 사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 문호왕 법민조에 의하면, 당나라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당나라 사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 맞은편에 새로 절을 세워 거짓으로 그것을 사천왕사라 하니 당의 사신이 “望德遙山之寺”라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효소왕 원년(692년)에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동왕 6년(《삼국사기》에서는 5년이라 하였다)에 완공하였다. 낙성재(落成齋)에서 진신석가(眞身釋迦)가 나타나 왕의 공양을 받았으며, 경덕왕 14년(755년)에 당나라에서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쌍탑이 서로 부딪쳤다고 한다. 또 이 절의 승려 선율(善律)은 600부 《반야경(般若經)》의 조성 사업과 관련하여 죽었다가 환생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지에는 현재 당간지주(보물 제69호와 쌍탑지가 남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48).닫기의 두 탑이 부딪쳤다.
6년(805년) 봄 정월에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하여 대왕후(大王后)로 삼고, 왕비 박씨(朴氏)를 봉하여 왕후(王后)로 삼았다.
이 해(805년)에 당(唐) 덕종(德宗)이 돌아가니124 《구당서》 권13 덕종본기에 의하면, 덕종은 정원(貞元) 21년(805년) 정월에 회녕전(會寧殿)에서 죽었는데 그 때 나이는 64세였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3).닫기, 순종(順宗)125 당나라 덕종(德宗)의 맏아들로 이름은 송(誦)이었다. 정원 21년(805년) 정월에 태극전(太極殿)에서 즉위하여 그 해 8월에 태자 순(純)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3).닫기이 병부낭중(兵部郞中)126 당나라 병부(兵部) 소속의 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종5품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3).닫기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원계방(元季方)127 당나라 경조윤(京兆尹)을 역임한 원의방(元義方)의 아우로 전중시어사(殿中侍禦史), 도지원외랑(度支員外郞), 금부(金部)·선부(膳部)·병부낭중(兵部郞中) 등을 역임하고 51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그는 동주자사(同州刺史)에 추증되었다. 《신당서》 권201 열전 원만경(元萬頃)전 부 계방전 참조. 원계방이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신당서》 권220 신라전,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조,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신당서》 권201 열전 원만경전에 의하면, 원계방은 왕숙문(王叔文)의 미움을 받아 신라에 파견되었는데 신라에서 덕종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조문사를 보내지 않고 또 대접이 소홀하였기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음식을 먹지 않자 신라인이 잘못을 사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계방은 《당국사보(唐國史補)》 (하)에,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던 중 바다에서 고난을 겪었다는 당나라 사신 ‘원의방(元義方)’과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13~314).닫기을 보내 상(喪)을 알렸다. 또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겸(兼)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그 어머니 숙씨(叔氏)128 《구당서》 권14 정원(貞元) 21년 2월 무신조,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조, 같은 책 권976 외신부 포이(褒異)조에서는 ‘화씨(和氏)’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4). 여기 보이는 ‘숙씨’는 소성왕의 비 계화부인으로서 대아찬 숙명의 딸이었고, 뒤의 애장왕 9년조에 보이는 ‘신씨’는 찬자에 따르면 신술각간의 딸로, 곧 원성왕의 비 김씨를 이른다. 따라서 찬자는 두 사람 모두 김씨임에도 불구하고 당 측의 책봉이 ‘신씨’, ‘숙씨’로 된 것은 그들의 아버지인 김신술과 김숙명의 이름인 ‘신’과 ‘숙’을 성씨로 오해한 데에 연유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라 측에서 외교의 필요상 동성간 족내혼의 양상이 당 측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의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한편 양조는 당의 책봉 기사가 분주의 대상이므로 중국 측 기록과 대응시켜보면, 우선 《구당서》 신라전에는 ‘신씨(申氏)’, ‘숙씨(叔氏)’로, 《신당서》 신라전은 ‘신(申)’·‘숙(淑)’으로, 《구당서》 14 순종본기(順宗本紀) 정원(貞元) 2년(805년) 2월조와 《책부원귀》 965 외신부 봉책 3 순종 정원 21년조에는 ‘숙씨(叔氏)’와 ‘화씨(和氏)’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양 《당서》의 신라전이 애장왕의 이름을 ‘중흥(重興)’이라 한 데 반해, 《구당서》 본기와 《책부원귀》가 ‘중희(重熙)’라고 한 것과 유사한 구분 양상이며, 결국 《책부원귀》는 《구당서》 본기 기사에 충실했던 것이다.(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pp254~255) 이는 당시 대외관계(對外關係 : 특히 중국과의 외교) 상, 혈족혼인(血族婚姻)의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일부러 부 숙명(叔明)의 숙(叔)자를 취하여 가성(假姓)을 삼았던 것인 듯하니 본래 기사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57닫기를 책봉하여 대비(大妃)로 삼았으며, 대비(大妃)의 아버지는 숙명(叔明)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3세손이니, 곧 어머니의 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숙씨(叔氏)라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부인 박씨(朴氏)를 책봉하여 비(妃)로 삼았다.
가을 8월에 공식(公式)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겨울 11월에 지진(地震)이 났다.
7년(806년) 봄 3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오니,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만나보았다.
왕이 하교(下敎)하기를,
“새로운 불사(佛寺) 창건을 금지하고 오직 수즙(修葺)130 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이음.닫기만을 허락한다. 또 비단에 수를 놓아 불사(佛事)하는 것과 금은(金銀)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널리 알리고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당 헌종(憲宗)131 당나라 순종(順宗)의 맏아들로 이름은 純이다. 805년 8월에 순종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820년 1월까지 재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4).닫기이 숙위왕자(宿衛王子) 김헌충(金獻忠)을 귀국하게 하고, 시비서감(試秘書監)132 정식으로 임명되기 이전의 견습 비서감(秘書監)으로, 비서감은 나라의 도서를 관장하던 비서성(秘書省)의 장관직이다. 정원은 1명이고 관품은 종3품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4).닫기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가을 8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년(807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김헌창(金憲昌)134 무열왕의 7세손으로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이다. 애장왕 8년(807년)에 시중이 되었다가 헌덕왕대에는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과 시중을 재차 역임하였으며 청주도독(菁州都督)을 거쳐 중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있던 822년 3월에 자기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신은 웅진성에서 자살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에 관하여서는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3월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4). 김헌창(金憲昌)은 앞서 선덕왕(宣德王)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뻔하던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이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58닫기 또는 김헌정(金憲貞)135 김헌창(金憲昌)을 ‘김헌정(金憲貞)’이라고도 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애장왕 8년에 시중이 된 사람이 김헌창 혹은 김헌정이었다는 뜻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로 해석하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애장왕 8년에 시중이 되었던 사람은 김헌창이 아니라 세주에서 말하는 김헌정이었다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신라하대의 집사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177쪽). 이기동, 「신라하대 왕위계승과 정치과정」,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156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15)닫기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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