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景文王)
경문왕(景文王)046 신라 제48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861~875년이다. 김계명(金啓明)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화랑으로서 헌안왕의 장녀와 혼인함으로서 왕위를 이어 받았다.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경문왕조에, 경문왕은 밤마다 뱀을 가슴에 덮고 잠을 잤으며 귀가 당나귀만큼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8쪽)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응렴(膺廉) 또는 의렴(疑廉)이고, 희강왕(僖康王)의 아들인 아찬(阿湌) 계명(啓明)047 《삼국사절요》 권13에서는 김계명을 희강왕의 손(孫)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8쪽)닫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 또는048 신무왕의 딸로 경문왕 6년(866)에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봉해졌다.닫기 광의(光義)이고, 비는 김씨(金氏) 영화부인(寧花夫人)049 헌안왕의 맏딸로 응렴과의 결혼 과정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헌안왕 4년조 및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경문왕조에 상세히 살려 있다.닫기이다.
3월 왕이 무평문(武平門)에 나와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년(862) 봄 정월에 이찬(伊飡) 김정(金正)050 경문왕 2년(862)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동왕 14년 정월에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닫기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아찬(阿湌) 위진(魏珍)051 경문왕 2년(862)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14년에 상대등 김정이 죽자 그 직을 이어 받았다.닫기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친히 신궁(神宫)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7월에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8월에 당(唐)에 사신으로 갔던 아찬(阿湌) 부량(富良) 등 일행이 물에 빠져 죽었다.
3년(863) 봄 2월에 왕이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박사(愽士) 이하 여러 사람에게 경서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겨울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겨울 11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寧花夫人)의 동생을 맞아들여 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그 뒤 어느 날 왕이 흥륜사(興輪寺) 스님에게 묻기를
4년(864) 봄 2월에 왕이 감은사(感恩寺)에 행차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겨울 10월에 이찬(伊湌) 윤흥(允興)061 일찍이 남원 소경의 장관이 되어,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던 귀금선생(貴金先生)으로 하여금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에게 슬도(瑟道)를 전수해 주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삼국사기》 권32, 잡지 樂條)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닫기이 아우 숙흥(叔興), 계흥(季興)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岱山郡)062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지금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七寶面)이 아닐까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0쪽)닫기으로 달아났다. 왕이 명을 내려 추격해서 체포하여 목을 베고 일족을 멸하였다.
7년(867) 봄 정월에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큰 물난리가 나서 곡식이 익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해 위문(무문, 撫問)하였다.
12월에 객성(客星)이 태백성(太白星)을 범하였다.
8년(868) 봄 정월에 이찬(伊湌) 김예(金銳)063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에 의하면, 문성왕의 종제(從弟)로 문성왕 17년(855) 4월에 창림사 무후정탑을 건립할 때 수조탑사(修造塔使)였으며 당시의 관등은 사지(舍知)였고 관직은 행웅주(行熊州) 祁梁사 현령(縣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외의 행적은 미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0쪽)닫기, 김현(金鉉) 등이 반역을 꾀하다 목베였다.
여름 6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에 벼락이 쳤다.
가을 8월에 조원전(朝元殿)을 중수하였다.
2월에는 월상루(月上樓)를 중수하였다.
여름 4월에 수도(경사, 京師)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가을 8월에 나라 안의 주군에 누리(蝗)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피해를 입혔다.
13년(873) 봄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자,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9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이 완성되었는데 9층으로 높이가 22장이었다.067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에서는 경문왕 11년(871) 8월 12일에 수리 공사를 착공하여 다음해 7월에 공사를 마쳤다고 하여 《삼국사기》의 기록과 약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1쪽)닫기, 9층으로 높이가 22장이었다.
14년(874) 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김정(金正)이 죽어, 시중(侍中) 위진(魏珍)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인흥(藺興)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당(唐)나라 희종(僖宗)069 당나라 懿宗의 다섯째 아들이다. 873년 7월에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888년 3월까지 재위하였다.닫기 사신을 보내 황제의 말씀을 선포했다.
5월 이찬(伊湌) 근종(近宗)이 반역을 꾀해 대궐을 침입하므로, 금군(禁軍)이 출동하여 쳐부수었다. 근종(近宗)이 그의 무리와 더불어 밤에 성을 빠져나감에, 추격하여 사로잡아 수레에 묶고 찢어 죽였다.
가을 9월에 월정당(月正堂)을 중수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서 과거에 급제했다.
15년(875) 봄 2월072 《삼국사기》 권31 연표(하)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年號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경문왕 15년 2월 22일에 알고 신라에서도 연호를 건부 2년이라 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1 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2쪽)닫기에 서울(경도, 京都)과 동쪽 지방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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