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권(卷第十七)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5(第五)
동천왕(東川王)·중천왕(中川王)·서천왕(西川王)·봉상왕(烽上王)·미천왕(美川王)


동천왕(東川王)


동천왕(東川王)동양(東襄)이라고도 한다. 이름이 우위거(憂位居)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교체(郊彘)이고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 들어와 산상왕(山上王)의 소후(小后)가 되었지만 역사에 그 족성(族姓)이 전해지지 않는다. 앞의 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이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보려고 왕이 다른 곳으로 나가 놀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이 갈기가 없어 불쌍하구나.”라고 하였다. 또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왕의 옷에 국을 엎질렀으나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2년(228) 봄 2월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3월에 우씨(于氏)를 봉하여 왕태후로 삼았다.

4년(230) 가을 7월에 국상(國相) 고우루(高優婁)가 죽었으므로, 우태(于台) 명림어수(明臨於漱)를 국상(國相)을 삼았다.

8년(234)(魏)가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냈다.

가을 9월에 태후 우씨(于氏)가 죽었다. 태후가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 유언하기를 “내가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을 보겠는가? 만일 여러 신하들이 차마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못하겠다고 여긴다면 나를 산상왕릉(山上王陵) 옆에 장사지내주기 바라오.”라 하였다. 마침내 그 말과 같이 장사지냈다. 무당이 말하기를 “국양왕(國壤)이 저에게 내려와서 말씀하기를 ‘어제 우씨(于氏)산상왕(山上王)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길 수 없어 결국 함께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10년(236) 봄 2월에 (吳)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사이좋게 지내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목을 베어 머리를 (魏)에 보냈다.

11년(237)에 (魏)에 사신을 보내 연호 개정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景初) 원년이다.

12년(238) (魏)의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이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병력 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돕게 하였다.

16년(242)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불의에 쳐들어가 격파하였다.

17년(243) 봄 정월에 왕자 연불(然弗)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을 베풀었다.

19년(245) 봄 3월에 동해 사람이 미녀(羙女)를 바치므로 왕이 그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쪽 변경(北邉)을 침략하였다.

20년(246) 가을 8월에 (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만 인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인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에서 싸워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를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魏)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毌丘儉)이란 자는 (魏)의 명장이나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다.”고 하고, 철갑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毌丘儉)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아군이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인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겨울 10월에 관구검(毌丘儉)이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사람을 죽이고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분산되어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홀로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추격해오는 병력이 가까이 닥쳐오니, 이 형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사적으로 저들을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 하였다. 마침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이 샛길로 달아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 “밀우(密友)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하부(下部)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싸웠던 지역에 밀우(密友)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이 그를 무릎에 눕혔더니 한참 만에 깨어났다.
왕이 샛길로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남옥저(南沃沮)에 이르렀는데 군(魏軍)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 궁하고 기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동부사람 유유(紐由)가 나서서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魏軍)에 제공하고,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략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분격하여 통쾌하게 승리를 거두소서.” 하였다. 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유유(紐由)(魏軍)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큰 나라에 죄를 얻고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사구(司寇)에게 맡기려고,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을 드리어 부하들의 음식이나 하도록 하려 합니다.”라 하였다. (魏)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紐由)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魏)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더불어 죽으니, (魏軍)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를 공격하니, (魏軍)이 시끄럽고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에서 퇴각하였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는데, 밀우(密友)유유(紐由)를 제일(第一)로 삼았다. 밀우(密友)에게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옥구(屋句)에게 압록원(鴨淥原)두눌하원(杜訥河原)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유유(紐由)를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고, 그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싸움에서 (魏)의 장수가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 공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처음에 그 신하 득래(得來)가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득래(得來)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이 나는 것을 보리라”라 하고 드디어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毋丘儉)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 무덤을 허물지 말고, 그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와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불내성(不耐城)이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성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곧 환도산(丸都山)과 국내성(國內城)이 서로 접하고 있다는 뜻이다.《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니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관구검(毋丘儉)이 침략해왔다”고 하였다.《통감(通鑑)》에는 “득래(得來)가 왕에게 시정을 건의한 것을 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平壤)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22년(248)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서거하였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냈다. 이름을 동천왕(東川王)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음이 없었다. 가까운 신하들이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왕이 예(禮)가 아니라 하여 이를 금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잡목(柴)을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드디어 그 땅의 이름을 시원(柴原)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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