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해(訖解) 이사금(尼師今)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나해왕(奈解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角干) 우로(于老)이고, 어머니는 명원부인(命元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우로(于老)가 임금을 섬기는 데 공이 있어, 여러번 승진하여 서불한(舒弗邯)이 되었다. 흘해(訖解)의 용모가 뛰어나고 담력이 있으며 머리가 뛰어나 일을 하는 것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고 제후(諸侯)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이때 이르러 기림(基臨)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흘해(訖解)가 어리지만 노련한 덕이 있다.”고 하며 이내 그를 받들어 세웠다.
2년(311) 봄 정월에 급리(急利)를 아찬(阿湌)으로 삼아 정치의 중요한 일을 맡기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2월에 몸소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3년(312) 봄 3월에 왜국(倭國)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여 아찬(阿湌)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4년(313) 가을 7월에 가물었고 누리(蝗)의 피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사신을 보내 그들을 구휼하였다.
5년(314) 봄 정월에 아찬(阿湌) 급리(急利)를 이찬(伊湌)으로 삼았다.
2월에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이내 그만두었다.
8년(317)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왕이 몸소 죄수의 정상을 살펴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9년(318) 봄 2월에 영을 내렸다.
“예전에 가뭄의 재해 때문에 그 해의 농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곧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계속 일어나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무릇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모두 그만두어라.”
21년(330)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28년(337) 봄 2월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3월에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35년(344) 봄 2월에 왜국(倭國)에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했다고 하여 사절하였다.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궁 남쪽의 큰 나무를 뽑아버렸다.
36년(345) 봄 정월에 강세(康世)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았다.
2월에 왕(倭王)이 문서를 보내 국교를 끊었다.
37년(346)에 병(倭兵)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상대하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벌찬(伊伐湌) 강세(康世)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늦추었다가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다해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굳센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그들을 쫓았다.
39년(348)에 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41년(350) 봄 3월에 황새(鸛)가 월성(月城) 귀퉁이에 집을 지었다.
여름 4월에 큰 비가 열흘 동안 내려 평지에 물이 3~4척(尺)이 되었고,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으며 산 13곳이 무너졌다.
47년(356)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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