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奈解) 이사금(尼師今)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벌휴왕(伐休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다. 왕비는 석씨(昔氏)로서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동생이다.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이전 왕의 태자인 골정(骨正)과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가 먼저 죽었고 큰 손자가 아직 어려 이매(伊買)의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이가 곧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다.

이 해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는데 왕이 즉위하는 날에 큰 비가 내리자 백성들이 기뻐하며 경축했다.

2년(197)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에 배알하였다.

3년(198) 여름 4월에 시조묘(始祖廟)앞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5월에 나라 서쪽에 큰 홍수가 나서 수해를 입은 주(州)·현(縣)의 1년 조세와 공물의 부담을 면제해 주었다.

가을 7월에 사자를 보내 위로하였다.

4년(199)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境)에 침입하였다.

5년(200) 가을 7월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庚午)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閼川)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加耶國)이 화친을 청하였다.

3월 초하루 정묘(丁卯)에 일식이 있었다. 크게 가물어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해 주었다.

8년(203)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변경(境)을 침범하였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10년(205) 봄 2월에 진충(眞忠)을 일벌찬(一伐湌)으로 삼아 국정(國政)에 참여시켰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고, 태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8월에 여우가 금성(金城)과 시조묘(始祖廟)의 뜰에서 울었다.

12년(207) 봄 정월에 왕자 이음(利音)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내외병마사, 內外兵馬事)을 겸하여 맡도록 하였다. 혹은 나음(奈音)이라고도 하였다.

13년(208) 봄 2월에 서쪽의 군읍(郡邑)을 돌아보고 10일이 지나서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인(倭人)이 변경(境)을 침범하여,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라(加羅)를 침입하려고 하자 가라(加羅)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에게 명해 6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가서 구해주어,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해 죽이고 포로로 잡혔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15년(210) 봄과 여름에 가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군읍(郡邑)의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용서해 주었다.

16년(211) 봄 정월에 훤견(萱堅)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一吉湌)으로 삼았다.

17년(212) 봄 3월에 가야(加耶)가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여름 5월에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떠내려가고 부서졌다.

19년(214) 봄 3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가을 7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의 요거성(腰車城)에 쳐들어와 성주(城主) 설부(薛夫)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에게 명령해 정예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쳤다.

23년(218) 가을 7월에 무기 창고의 병기가 스스로 나왔다. 백제인이 와서 장산성(獐山城) 포위하자 왕이 몸소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5년(220) 봄 3월에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이 죽자 충훤(忠萱)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도록 했다.

가을 7월에 양산(楊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27년(222) 여름 4월에 우박(雹)이 내려 콩과 보리(菽麥)를 해쳤다. 남신현(南新縣)의 사람이 죽었는데 한 달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우두주(牛頭州)에 들어오자, 이벌찬(伊伐湌) 충훤(忠萱)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웅곡(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어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으므로 진주(鎭主)로 좌천시키고 연진(連珍)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맡도록 하였다.

29년(224) 가을 7월에 이벌찬(伊伐湌) 연진(連珍)이 백제와 봉산(烽山) 아래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리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8월에 봉산성(烽山城)을 쌓았다.

31년(226)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하였다.

32년(227) 봄 2월에 서남의 군읍(郡邑)을 순수(巡狩)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波珍湌) 강훤(康萱)을 이찬(伊湌)으로 삼았다.

34년(229) 여름 4월에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가을 9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큰 눈이와 5척이나 쌓였다.

35년(230)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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