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奈解) 이사금(尼師今)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073 신라 제1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96~230년이다. 나해이사금대에 가야와의 대외관계 기록이 빈번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적이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벌휴왕(伐休王)074 신라 제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84~196년이다. 아달라이사금으로 ‘박씨왕 시대’가 끝나고 벌휴이사금이 즉위함으로써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이후 끊겼던 ‘석씨왕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왕대에 처음으로 군주(軍主)가 생겼고, 소문국을 복속하는 등 경상도 일대로의 영역 확장 사업을 본격화하였다.닫기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075 아달라왕의 왕비와 이름이 같다.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아달라왕 死後에 伊買에게 시집와서 나해를 낳았는지 분명하지 않다.닫기이다. 왕비는 석씨(昔氏)로서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동생이다.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이전 왕의 태자인 골정(骨正)076 제9대 왕이었던 벌휴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와 12대 왕으로 즉위하는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홀쟁(忽爭)이라고도 했는데, 첨해이사금이 즉위한 원년(247)에 죽은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과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가 먼저 죽었고 큰 손자가 아직 어려 이매(伊買)의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이가 곧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다.
073 신라 제1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96~230년이다. 나해이사금대에 가야와의 대외관계 기록이 빈번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적이다.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벌휴왕(伐休王)074 신라 제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84~196년이다. 아달라이사금으로 ‘박씨왕 시대’가 끝나고 벌휴이사금이 즉위함으로써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이후 끊겼던 ‘석씨왕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왕대에 처음으로 군주(軍主)가 생겼고, 소문국을 복속하는 등 경상도 일대로의 영역 확장 사업을 본격화하였다.닫기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075 아달라왕의 왕비와 이름이 같다.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아달라왕 死後에 伊買에게 시집와서 나해를 낳았는지 분명하지 않다.닫기이다. 왕비는 석씨로서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동생이다.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이전 왕의 태자인 골정(骨正)076 제9대 왕이었던 벌휴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와 12대 왕으로 즉위하는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홀쟁(忽爭)이라고도 했는데, 첨해이사금이 즉위한 원년(247)에 죽은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닫기과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가 먼저 죽었고 큰 손자가 아직 어려 이매(伊買)의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이가 곧 나해이사금이다. 후에 큰아들 골정이 이미 죽었다고는 하지만 직계 대손(大孫)인 조분이 있었다. 당시 왕위계승권의 1순위는 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에는 조분이 어렸기 때문에 이매의 아들 나해를 즉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석씨 왕실이 집권한 후 혈연 집단이 직계 골정계와 방계 이매계로 분기된 현상에 주목한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골정계와 이매계는 정치적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곧 나해의 즉위를 비정상적인 정치적 갈등의 산물로 본 것이다. 나해왕의 즉위 기사에 그의 용모라든지 주술적인 능력을 강조된 까닭도 나해이사금의 즉위가 비정상적 행위임을 상쇄시키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이다(장창은,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2008, 52~55쪽
이 해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는데 왕이 즉위하는 날에 큰 비가 내리자 백성들이 기뻐하며 경축했다.
2년(197)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078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에 배알하였다.,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에 배알하였다.
3년(198) 여름 4월에 시조묘(始祖廟)앞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079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 앞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5월에 나라 서쪽에 큰 홍수가 나서 수해를 입은 주(州)·현(縣)의 1년 조세와 공물의 부담을 면제해 주었다.
가을 7월에 사자를 보내 위로하였다.
4년(199)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境)에 침입하였다.
5년(200) 가을 7월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庚午)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閼川)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081 《後漢書》 권9 獻帝 建安 5년(200) 9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닫기알천(閼川)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加耶國)이 화친을 청하였다.3 가야에 대한 표기는 기록에 따라 ‘가야(伽倻)’ ‘가라(加羅)’ ‘가락(駕洛)’ ‘구야(狗邪)’ 등 다양하다. 나해이사금대에 신라와 관계를 맺었던 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3~64쪽).닫기이 화친을 청하였다.
3월 초하루 정묘(丁卯)에 일식이 있었다. 84 《後漢書》 권9 獻帝 建安 6년(201) 3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닫기크게 가물어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해 주었다.
8년(203) 겨울 10월에 말갈(靺鞨)085 신라사에서의 말갈은 동예(東濊) 세력의 일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약용, 《여유당전서》 6, 지리집(地理集), 강역고(彊域考), 말갈전(靺鞨傳) 참조. 말갈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이강래,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군사활동》, 《영토문제연구》 2, 고려대 민족문제연구소, 1985 참조.닫기이 변경(境)을 침범하였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10년(205) 봄 2월에 진충(眞忠)을 일벌찬(一伐湌)08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이벌찬은 이벌간(伊罰干), 각간(角干), 서불한(舒弗邯), 서발한(舒發翰) 등으로 다르게 불리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 참조.닫기으로 삼아 국정(國政)에 참여시켰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고, 태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8월에 여우가 금성(金城)087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과 시조묘(始祖廟)088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를 참고하면,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1년에 4차례 제사지냈다. 남해왕 3년(6)에 처음 세웠는데, 그는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시조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의 왕은 일반적으로 즉위 의례의 차원에서 시조묘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165~174쪽). 시조묘는 ‘조묘(祖廟)’ ‘국조묘(國祖廟)’ ‘선조묘(先祖廟)’ ‘조고묘(祖考廟)’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의 뜰에서 울었다.
12년(207) 봄 정월에 왕자 이음(利音)을 이벌찬(伊伐湌)09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내외병마사, 內外兵馬事)을 겸하여 맡도록 하였다. 혹은 나음(奈音)이라고도 하였다.
13년(208) 봄 2월에 서쪽의 군읍(郡邑)을 돌아보고 10일이 지나서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왜인(倭人)091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변경(境)을 침범하여, 이벌찬(伊伐湌) 09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이음(利音)093 이음은 《삼국사기》 권48, 열전8, 물계자전(勿稽子傳)에는 날음(捺音)으로, 《삼국유사》 권5, 피은8, 물계자에는 내음(㮈音)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같은 인물이다. 한편 조분왕의 장인인 내음갈문왕(奈音葛文王)은 이음(利音)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나음갈문왕의 성은 박씨인데 반해 이음은 석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해왕의 아들과 조분이사금의 장인은 세대상으로도 맞지 않는다(장창은,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2008, 55쪽).닫기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094 《삼국사기》 권48, 열전8, 물계자전과 《삼국유사》 권5, 피은8, 물계자를 참고하면, 8국 중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고사포국(古史浦國),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이 확인된다. 일연은 고자국은 경남 고성에, 사물국은 경남 사천시에 있었던 나라로 고증하였다. 다른 나라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낙동강 하류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닫기가 가라(加羅)095 《삼국사기》 권48 열전 勿稽子傳에는 阿羅國(함안)이라 하였으나, 浦上 8국이 침입한 加羅는 현재의 경남 김해시에 있던 금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1989, 336쪽). 이기동, 《于老傳說의 世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186쪽). 金泰植, 《한국사연구》 86, 1994, 55~57쪽). 여기서의 加羅를 함안의 安羅加耶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金泰植은 토기 문화권의 측면에서 함안지역은 마산의 서쪽지방과 유사한 반면에 김해지역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浦上 8국의 공격대상이 아라국일 수는 없다고 한다(金泰植, 《咸安 安羅國의 成長과 變遷》, 《한국사연구》 86, 1994, 55~57쪽). 그리고 丁若鏞은 《弁辰別考》에서, 이들 나라는 원래 首露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수로가 죽자 8나라가 마침내 난을 일으켰으므로 居登王이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한다.닫기를 침입하려고 하자 가라(加羅)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096 나해이사금의 둘째 아들이자 제16대 왕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다. 나해이사금대 태자로서 이음(利音)과 포상 8국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조분이사금 2년(231)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했고, 같은 왕 4년(233)에는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을 물리쳤다. 이러한 군공을 바탕으로 조분이사금 15년(244)에는 서불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이사금 16년(245)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첨해이사금 3년(249)에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다가 갑작스럽게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권45에 그의 열전(列傳)이 전한다.닫기와 이벌찬(伊伐湌) 09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이음(利音)098 이음과 우로의 관계는 사료상 모호하다. 이에 대해 이음이 이벌찬이 되어 중외(中外)의 병마사(兵馬事)를 장악한 것은 나해왕 12년(207)인데 비해, 우로가 서불한으로서 병마사를 맡은 것은 그보다 37년 뒤인 조분왕 15년(244)임에 주목해 관력(官歷)이 앞선 이음을 태자(太子), 우로를 차자(次子)로 본 견해가 있다(이기동, 「우로전설의 세계」, 《신라사회사연구》, 일조각, 1997, 24~25쪽).닫기에게 명해 6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099 《삼국사기》 권48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이때 于老 등이 이끌고 간 군사는 6부의 군사뿐만 아니라 隣近 郡의 군사도 함께 거느리고 갔다고 한다.닫기가서 구해주어,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해 죽이고 포로로 잡혔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15년(210) 봄과 여름에 가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군읍(郡邑)의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용서해 주었다.
16년(211) 봄 정월에 훤견(萱堅)을 이찬(伊湌)10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一吉湌)으로 삼았다.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다.
17년(212) 봄 3월에 가야(加耶)102 가야에 대한 표기는 加羅·加耶·伽倻·駕洛·伽耶·狗邪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대부분 ‘加耶’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가야’는 처음에는 金海의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는 高靈의 대가야 세력이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다고 한다(金泰植, 《加耶聯盟史》, 일조각, 1993, 16~20쪽).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 17년조에 나오는 가야는 同王 14년(209)에 포상 8국의 침입에 대하여 구원을 요청한 ‘加羅’ 곧 김해의 金官加耶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닫기가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여름 5월에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떠내려가고 부서졌다.
19년(214) 봄 3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가을 7월103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는 이와 동일한 기사가 신라본기보다 꼭 10년 빠른 백제 초고왕 39년(204) 7월조에 수록되어 있다.닫기에 백제가 나라 서쪽의 요거성(腰車城)10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상주목(尙州牧) 역원에 요제원(要濟院)이 주 동쪽 37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목해서 요거성을 이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는 데(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50쪽), 근거가 부족하다.닫기에 쳐들어와 성주(城主) 설부(薛夫)105 활동 연대가 비슷하고 ‘부(夫)’와 ‘지(支)’의 자형상 유사점으로 벌휴왕 7년(190) 좌군주에 임명된 설지(薛支)와 같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쪽). 설령 동일 인물이 아닐지라도 신라 상고기 인명에 공통 자가 있는 인물은 같은 친족 집단의 구성원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을 참고하면(김영하, 《한국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220쪽) 두 인물은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닫기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伊伐湌) 10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이음(利音)107 이음은 《삼국사기》 권48, 열전8, 물계자전(勿稽子傳)에는 날음(捺音)으로, 《삼국유사》 권5, 피은8, 물계자에는 내음(㮈音)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같은 인물이다. 한편 조분왕의 장인인 내음갈문왕(奈音葛文王)은 이음(利音)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나음갈문왕의 성은 박씨인데 반해 이음은 석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해왕의 아들과 조분이사금의 장인은 세대상으로도 맞지 않는다(장창은,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2008, 55쪽).닫기에게 명령해 정예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쳤다.
23년(218) 가을 7월에 무기 창고의 병기가 스스로 나왔다. 백제인이 와서 장산성(獐山城)109 《삼국사기》 권34, 지리1, 양주(良州) 장산군(獐山郡)에 따르면, 장산군은 지마이사금(112~134) 때 복속된 압량소국(押梁小國)이라고 한다. 압량소국은 일명 압독국(押督國)으로서 지금의 경북 경산에 있었다.닫기을 포위하자 왕이 몸소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5년(220) 봄 3월에 이벌찬(伊伐湌) 11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이음(利音)112 이음은 《삼국사기》 권48, 열전8, 물계자전(勿稽子傳)에는 날음(捺音)으로, 《삼국유사》 권5, 피은8, 물계자에는 내음(㮈音)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같은 인물이다. 한편 조분왕의 장인인 내음갈문왕(奈音葛文王)은 이음(利音)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나음갈문왕의 성은 박씨인데 반해 이음은 석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해왕의 아들과 조분이사금의 장인은 세대상으로도 맞지 않는다(장창은,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2008, 55쪽).닫기이 죽자 충훤(忠萱)113 나해이사금 25년(220)에 이벌찬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았다. 같은 왕 27년(222)에 우두주(牛頭州)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해 진(鎭)의 우두머리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닫기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도록 했다.
가을 7월에 양산(楊山)114 일명 남산(南山) 또는 금오산(金鰲山)이라 불리는 산으로 경주 분지의 남쪽에 있다.닫기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27년(222) 여름 4월에 우박(雹)이 내려 콩과 보리(菽麥)를 해쳤다. 남신현(南新縣)의 사람이 죽었는데 한 달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우두주(牛頭州)11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건치연혁에 따르면 우두주는 우수주(牛首州)로 불렸으며 지금의 춘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35, 지리2, 삭주(朔州)에는 신라가 선덕왕 6년(637)에야 우수주로 삼고 군주(軍主)를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이 기록을 믿지 않는 경우가 있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50쪽).닫기에 들어오자, 이벌찬(伊伐湌) 11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충훤(忠萱)117 나해이사금 25년(220)에 이벌찬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았다. 같은 왕 27년(222)에 우두주(牛頭州)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해 진(鎭)의 우두머리로 좌천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닫기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웅곡(熊谷)118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중사(中祀)에 사진(四鎭)의 장소로 웅곡악(熊谷岳)이 나온다. 웅곡악이 비열홀군(比烈忽郡), 곧 지금의 함남 안변 일대이므로 우두주와 연계해 보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다만 이 시기 신라가 이 지역까지 북진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많다.닫기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어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으므로119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仇首王 9년(222)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닫기 진주(鎭主)120 군사상의 요지에 설치한 鎭의 우두머리 관직. 통일신라시대 鎭의 장관 명칭은 頭上大監 또는 都護(浿江鎭), 軍主(大谷鎭), 大使(淸海鎭) 그리고 鎭頭(穴口鎭) 등 각기 다르게 표기되었다.닫기로 좌천시키고 연진(連珍)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맡도록 하였다.
29년(224) 가을 7월에 이벌찬(伊伐湌) 12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연진(連珍)이 백제와 봉산(烽山)122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첨해왕과 미추왕대에도 백제와 격전을 치룬 곳이다.닫기 아래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리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8월에 봉산성(烽山城)124 나해이사금 29년(224), 첨해이사금 9년(255), 미추이사금 5년(266) 등 주로 백제와의 교전지로 자주 나오는 지명이다. 정확한 위치 비정은 어렵지만 사료 분위기상 신라 서변의 소백산맥 일대였음은 인정된다.닫기을 쌓았다.
31년(226)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하였다.
32년(227) 봄 2월에 서남의 군읍(郡邑)을 순수(巡狩)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波珍湌) 12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닫기강훤(康萱)을 이찬(伊湌)12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척찬(伊尺湌)이라고도 했다.닫기으로 삼았다.
34년(229) 여름 4월에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가을 9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큰 눈이와 5척이나 쌓였다.
35년(230)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첨해(沾解) 이사금(尼師今) (0) | 2019.10.06 |
---|---|
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조분(助賁) 이사금(尼師今) (0) | 2019.10.05 |
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벌휴(伐休) 이사금(尼師今) (0) | 2019.10.02 |
제2권(券第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아달라(阿達羅) 이사금(尼師今) (0) | 2019.10.01 |
제1권(券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일성(逸聖) 이사금(尼師今) (0) | 2019.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