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近肖古王)


근초고왕(近肖古王)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契王)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2년 봄 정월에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真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임명했는데, 진정(真淨)은 왕후(王后)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21년 봄 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23년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사신을 시켜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24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雉壤)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는데,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26년에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27년 봄 정월에 사신을 (晉)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28년 봄 2월에 사신을 (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禿山) 성주(城主)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30년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北鄙)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겨울 11월에 왕이 사망하였다. 고기(古記)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흥(高興)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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