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法興王)


법흥왕(法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元宗)이고, 지증왕(智證王)의 맏아들이다.《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박씨(朴氏)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왕은 키가 일곱 자였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3년 봄 정월에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냈다.
용(龍)이 양산(楊山)의 우물 안에 나타났다.
4년 여름 4월에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5년 봄 2월에 주산성(株山城)을 쌓았다.
7년 봄 정월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에 대한 주자(朱紫, 붉은색과 자주빛)의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8년 (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9년 봄 3월에 가야(加耶)의 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
11년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加耶)의 국왕이 찾아와서 만났다.
12년 봄 2월에 대아찬(大阿湌) 이등(伊登)을 사벌주(沙伐州) 군주(軍主)로 삼았다.
15년에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처음에 눌지왕(訥祇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있게 하였다. 그때 (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香)을 주었다. 왕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사용 방법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사람을 보내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그 이름을 일컬으면서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첫째는 불타(佛陀)이고,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무렵에 왕의 딸이 병이 심하였는데 왕은 묵호자(墨胡子)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는데, 왕의 딸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墨胡子)가 나와 모례(毛禮)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서 작별하고자 합니다.”라 하고 잠시 후에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비처왕(毗處王)때에 이르러 아도(阿道) 또는 아도(我道)라고도 썼다. 화상(和尙)이 시중을 드는 세 명과 함께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다. 모습이 묵호자(墨胡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이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명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講讀)하였는데, 가끔 믿고 받드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였으므로 왕이 근심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 또는 처도(處道)가 아뢰기를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 도(道)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만약 도(道)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臣)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어린아이의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보통의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臣) 등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차돈(異次頓)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는데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이것을 깨뜨릴 수가 없는데,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따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관리에게 넘겨서 목을 베게 하였는데, 이차돈(異次頓)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데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여러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 이것은 김대문(金大問)의《계림잡전(鷄林雜傳)》의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16년에 영(令)을 내려서 살생(殺生)을 금지하다.

18년 봄 3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隄防)을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찬(伊湌)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의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는데, 지금(고려, 高麗)의 재상(宰相)과 같다.

19년에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 아들인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武力)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21년에 상대등(上大等)인 철부(哲夫)가 죽었다.

23년에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元年)이라고 하였다.

25년 봄 정월에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27년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의 산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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