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法興王)
16년에 영(令)을 내려서 살생(殺生)을 금지하다.
18년 봄 3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隄防)을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찬(伊湌) 철부(哲夫)081 유력한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를 상대등(上大等)082 상신(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상대등(上大等)은 대등(大等)이라는 원래의 관직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등은 부족장적인 성격이 짙은 부족연맹체 회의의 구성원이었다. 상대등은 부족연맹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으로서 신라에서는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주재자이며 의장이었다. 법흥왕(法興王) 때 상대등이 설치된 것은 왕권이 성장하여 부족연맹장의 지위에서 초월한 존재로 성장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상대등에 임명된 자는 진골(眞骨) 귀족 중에서 고위 관등(官等)을 지닌 사람으로, 신라의 상대(上代)에는 왕의 교체 시기에 함께 교체되었다(이기백, 「상대등고」, 《역사학보》 19, 196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89~128쪽).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 상대등(上大等)조 참조.닫기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083 상신(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상대등(上大等)은 대등(大等)이라는 원래의 관직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등은 부족장적인 성격이 짙은 부족연맹체 회의의 구성원이었다. 상대등은 부족연맹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으로서 신라에서는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주재자이며 의장이었다. 법흥왕(法興王) 때 상대등이 설치된 것은 왕권이 성장하여 부족연맹장의 지위에서 초월한 존재로 성장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상대등에 임명된 자는 진골(眞骨) 귀족 중에서 고위 관등(官等)을 지닌 사람으로, 신라의 상대(上代)에는 왕의 교체 시기에 함께 교체되었다(이기백, 「상대등고」, 《역사학보》 19, 196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89~128쪽).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 상대등(上大等)조 참조.닫기의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는데, 지금(고려, 高麗)의 재상(宰相)과 같다.
19년에 금관국(金官國)084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가락국(駕洛國)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 또는 본가야(本加耶)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수로(首露)가 건국하여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닫기의 왕인 김구해(金仇亥)085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양주(良州) 김해소경(金海小京)조와 《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에는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로 기록되었고,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구형(仇衡) 또는 구충(仇衝)이라고 기록되었다. ‘형(衡)’은 ‘충(衝)’의 오자(誤字)이고, ‘차휴(次休)’는 ‘충(衝)’의 반절(反切)로 보면 ‘해(亥)’는 ‘충(充)’의 와자(訛字)로 이해하기도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57쪽).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해는 겸지왕(鉗知王)의 아들로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구형왕의 능(陵)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에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데, 그 사실성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닫기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 아들인 무력(武力)086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아들이며,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로 기록된 후에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잡간(迊干)으로,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진흥왕 때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553년(진흥왕 14)에 아찬(阿湌)으로서 신주 군주(新州 軍主)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聖王)을 전사시키는 등의 공을 세웠다.닫기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087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繼體) 23년조에 신라에서는 대신(大臣)을 ‘상신(上臣)’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등(上等)을 대등(大等) 또는 그것에 버금가는 관직의 이칭(異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10쪽 주 68) 참조).닫기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088 국가에서 왕족이나 공신, 또는 봉작(封爵)을 받은 사람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지역의 수조권(收租權) 또는 수조호(收租戶)이다. 삼국시대의 식읍은 주로 주변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원래 그곳을 지배하던 지배층에게 식읍으로 주던 것이 일반적이었다.닫기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武力)086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아들이며,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로 기록된 후에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잡간(迊干)으로,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진흥왕 때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553년(진흥왕 14)에 아찬(阿湌)으로서 신주 군주(新州 軍主)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聖王)을 전사시키는 등의 공을 세웠다.닫기은 벼슬이 각간(角干)08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에 이르렀다.
21년에 상대등(上大等)인 철부(哲夫)가 죽었다.
23년에 처음으로 연호(年號)090 왕이 즉위한 해에 붙이는 칭호로, 한 왕이 재위 중에 여러 번 고치는 수도 있다. 법흥왕(法興王)대 연호의 사용은 대내적으로 왕권의 확립, 대외적으로는 중국 등과 대등한 국가임을 표방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한다.닫기를 칭하여091 법흥왕대의 연호 사용은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립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등과 대등한 국가임을 표방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연호로써 연대를 표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관행이 멸망까지 지속되지 못하였으므로 연대 표기방식으로서는 부적당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닫기 건원(建元)092 신라 최초의 연호(年號)로 원래 의미는 ‘연호를 처음으로 정한다’는 뜻이다.닫기 원년(元年)이라고 하였다.
25년 봄 정월에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27년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093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망성산(望聖山) 기슭에 있던 사찰이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이 남아 있다.닫기 북쪽의 산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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