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한계(韓係)
양반 소실의 삶 살고 의(義) 위해 자살한 기생
조선 중기에 동래 정씨(東來鄭氏) 집안에서는 걸출한 인물 세 명이 동시에 나왔다.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지화(鄭知和)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은 정씨가 움직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두 정승까지 올랐다. 이런 명문가에서 소실을 위해 묘표(墓表)를 세웠으니 그 주인공은 의로운 여성이라 불리는 한계(韓係, 1643〜1669)다.
한계(韓係)는 정치화(鄭致和, 1609〜1677)의 소실로 평안도 의주 관아의 기생이었다. 본관은 청주다. 관기는 국가 소유이므로 양반이 첩을 삼는 것은 불법이었으나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한계(韓係)가 의주 생활을 정리하고 정치화 집으로 간 해는 1665년(현종 6)이었다. 한계(韓係) 나이 23세, 정치화(鄭致和) 나이 57세였다. 당시 정치화(鄭致和)는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큰형 정태화(鄭太和)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고 이미 소실까지 두어 아들도 얻은 상태였다.
한계(韓係)는 정치화(鄭致和) 집에 머무르는 5년 동안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의주에서 이미 효녀로 칭찬이 자자하던 그녀는 정성을 다해 윗사람을 받들고 예의를 갖추어 아랫사람을 대했으므로 주변 사람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 한계(韓係)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1669년이었다. 평안도 감영에서 평안도 소속 노비를 소유한 양반들에게 관기를 비롯한 노비들을 돌려보내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 조치는 관기를 소실로 삼는 행위를 금하고 변방 안보를 위해 북쪽 인구를 보존하려는 조치였다. 정치화(鄭致和)는 고위 관료를 지낸 사람으로 국법을 잘 알았다. 그는 한계(韓係)를 불러 “너도 되돌아가야 했으나 나 때문에 잠시 늦춘 것이다. 되돌아가는 일을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 말을 들은 한계(韓係)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린 결정이 독약을 먹고 자결하는 극단적 선택이었다. 나이 27세였다. 한계(韓係)의 자결은 주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천한 신분의 첩이 “아래로는 제 마음을 온전히 하고 위로는 상공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결했기 때문이다.
정치화(鄭致和)는 이 이야기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예조판서이자 사촌동생인 정지화(鄭知和)에게 글을 부탁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정지화(鄭知和)는 “그 부모형제가 모두 살아 있으니 어찌 마음에 걸리고 그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경중을 헤아릴 줄 알아 오로지 의리에 합당하게 했으니 아아! 어려운 일이다”하고 감동해 묘지명을 지었다.
한계(韓係)의 삶은 ‘의리(義)’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여느 양반 여성 못지않다. 하지만 그 죽음에 무조건 박수를 보낼 수 없다. 부인이나 딸에게 조신한 처신을 요구한 양반 남성들은 기녀를 통해 성적 만족감을 얻었다. 이런 양반이 기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묘표를 지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 할 수 있다. 한계(韓係)의 자결이 헛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는 한계(韓係)의 자결이 못내 안타깝고 슬프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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