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릉(仁陵)
인릉(仁陵)
23대 순조(純祖)
- 위치 : 서울 서초구 내곡동 13-1
- 지정번호 : 사적 제194호
- 조성시기 : 1856년(철종 7) 10월 11일
- 능의구성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純祖)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의 합장릉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인릉의 능역에는 곡장 3면, 난간석 12칸, 석양 2쌍, 석호 2쌍, 혼유석 1개,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석인과 석마 각 1쌍, 무석인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과 재실 등이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 12칸만을 둘렀으며, 기타 상설은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팔각등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무석인은 생동감 있는 표정과 힘차고 활달한 조각 기법,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어 조선 후기의 석물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최초의 조영 당시의 것이고, 하나는 고종 때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세운 것이다.
- 능의역사
순조는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 구후(舊後) 장릉(長陵) 국내에 안장하였고, 능호를 인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풍수지리상의 불길론이 대두되어 천장을 결정하게 되었다.
『철종실록』1855년(철종 6) 1월 18일의 기사에는 "인릉의 능침을 봉안한지 21년이나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외의(外議)가 서로 논쟁하고 있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머님께서도 이런 내용으로 하교하셨지만, 일이 지극히 중차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경 등과 상의하여 결정해서 행하려 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인릉의 천장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논의가 있은 다음해인 1856년(철종 7) 10월 11일에 인릉은 현재의 위치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1857년(철종 8) 8월 4일에는 창덕궁 양심각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같은 해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 순조(純祖) 생애이야기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790년(정조 14) 6월 18일,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정조는 의빈 성씨가 낳은 맏아들 문효세자가 1786년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둘째 아들을 1800년(정조 24) 1월 1일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 해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자 11세 어린 나이의 세자는 7월 4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5년 동안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영조의 계비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벽파와 반대파인 시파가 대립하고, 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1년 사이에 300명의 교인이 학살당했다.
1804년(순조 4)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금 장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정의 요직은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혈연을 중심으로 독점되었고, 척신들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더불어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순조는 3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고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조선 후기 순조의 재위 기간은 척신들의 횡포와 자연 재해 등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가운데 잦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1811년 12월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일으킨 반란은 근대 이전 조선시대에 일어난 최대의 민중반란이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순조가 즉위하던 해인 1800년 경부터 이미 한반도 북쪽 지역을 널리 돌아다니며 정세를 파악하고 동조자를 모아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뛰어난 무사들과 지식인을 모은 홍경래는 1811년(순조 11) 군대를 일으켜 8개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출하다가 정부군에게 패한 끝에 농민들과 함께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봉기군은 저항을 계속 하였으나, 1812년(순조 12) 4월 19일, 정부군이 화약을 터뜨려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였다. 홍경래는 전사하고 우군칙 등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봉기군 잔존 세력 중 1,917명이 효수 당했다.
홍경래의 난은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력도 구성하지 못하여 정부군에게 패배하였지만, 낡은 지배체제에 저항한 사건으로써 후대 민중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생애이야기
순원왕후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으로 령돈녕부사 영안부원군 김조순(領敦寧府事 永安府院君 金祖淳)의 딸로 1789년(정조 13) 5월 15일 한성부 서부 양생방에서 태어나 1802년(순조 2) 10월 13일 왕비로 책봉되고, 1834년(헌종 즉위) 11월 18일 왕대비로 봉해졌으며, 이튿날인 11월 19일 헌종의 아버지이며 순조의 원자였던 효명세자가 익종(후일 문조로 추존)으로 추존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순원왕후는 1800년(정조 24) 치러진 세자빈 간택에서,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승하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간택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1802년(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되어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크게 공헌했다.
한 때 효명 세자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가 헌종 때 다시 되찾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하자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이며 은원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 강화도령 원범을 지명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자신의 친정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했다.
순원왕후는 헌종 즉위년부터 수렴청정을 했고,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철종 2년까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7년(철종 8) 8월 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 일화
순원왕후는 1800년(정조 24) 치러진 세자빈 간택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정조실록』1800년(정조 24) 2월 26일의 기사에는 세자빈의 첫 번째 간택을 집복헌(集福軒)에서 행하고, 김조순의 딸, 진사 서기수의 딸, 유학 박종만의 딸, 유학 신집의 딸,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두 번째 간택에 들게 되었음을 알리는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같은 날의 또 다른 기사에는 “두 번째 세 번째 간택을 한다지만, 그것은 겉으로 갖추는 형식일 뿐이다. 국가에서 하는 일은 형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두 번째 세 번째 간택도 앞으로 해야겠지만 오늘 이 첫 번째 간택이 옛날로 치면 바로 두 번째 간택인 것이다.” 라는 기록과 김조순에게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 자전, 자궁이 여러 처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이어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번 보시고는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이 모두가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며 청음(淸陰)·문곡(文谷)·몽와(夢窩)·죽취(竹醉)가 쌓아올린 경사인 것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하사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렇게 세자빈 간택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삼간택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802년(순조 2) 10월에 결국 왕비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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