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권제1(卷第一) 고려사1(高麗史一)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正憲大夫 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가 교(敎)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태조1(太祖一)

 

태조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太祖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은 성이 왕씨(王氏)이고, 휘는 건(建)이며, 자는 약천(若天)이다.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세조(世祖)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이다.

당(唐) 건부(乾符) 4년(877) 정유 정월 병술 송악(松嶽)의 남쪽 집에서 태어나자 신령스러운 빛과 자주색 기운이 방을 비추고 뜰에 가득 찼으며 종일토록 둥글게 서려있어 모습이 교룡(蛟龍)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고, 용과 같은 얼굴에 이마 뼈가 불거졌으며[龍顏日角]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었다. 기세가 웅장하고 도량이 깊었으며 말소리가 우렁차 세상을 건질 만한 역량이 있었다.

그 때 신라(新羅)의 정사(政事)가 쇠퇴하여 도적떼가 다투어 일어났다.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고을에 의지해 후백제(後百濟)라 일컬었고, 궁예(弓裔)는 고구려(高句麗)의 땅에 의지해 철원(鐵圓)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세조(世祖)는 그 때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이 되었는데, 건녕(乾寧) 3년(896) 병진(丙辰)에 송악군(松嶽郡)을 가지고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弓裔)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世祖)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의 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松嶽)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그 성주로 삼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라고 하자, 궁예(弓裔)는 이를 따라 태조(太祖)에게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성주로 임명하였다. 이 때 태조(太祖)의 나이가 20세였다.

광화(光化) 원년(898) 무오(戊午) 궁예(弓裔)가 송악(松嶽)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太祖)가 찾아가 알현(謁見)하자, 정기대감(精騎大監)에 임명하였다.

3년(900) 경신(庚申) 궁예(弓裔)가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의 3주와 당성군(唐城郡)·괴양군(槐壤郡) 등의 군현(郡縣)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모두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粲)을 제수하였다.

천복(天復) 3년(903) 계해(癸亥) 3월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부터 광주(光州) 경계까지 금성군(錦城郡)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군현(郡縣)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인하여 금성(錦城)을 고쳐서 나주(羅州)라 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게 한 뒤 돌아왔다. 이 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알려오자, 궁예(弓裔)가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돌아옴에 미쳐 궁예(弓裔)가 변경의 일을 물었는데, 태조(太祖)가 변방을 안정시키고 경계를 넓힐 전략을 보고하였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주목하게 되었고, 궁예(弓裔)도 또한 기특하게 여겨 품계를 올려 알찬(閼粲)으로 삼았다.

천우(天祐) 2년(905) 을축(乙丑) 궁예(弓裔)가 철원(鐵圓)으로 환도(還都)하였다.

3년(906) 병인(丙寅) 궁예(弓裔)가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정기장군(精騎將軍) 금식(黔式) 등을 거느리고 군사 3,000명을 지휘하여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을 공격하게 하니, 견훤(甄萱)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궁예(弓裔)는 땅이 더욱 넓어지고 군대[士馬]가 점차 강해지자 신라(新羅)를 삼키려는 뜻을 가지게 되어, 멸도(滅都)라 부르면서 신라(新羅)에서 귀부(歸附)해온 자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양(梁) 개평(開平) 3년(909) 기사(己巳) 태조(太祖)는 궁예(弓裔)가 날로 교만하고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변방[閫外]에 뜻이 있었다. 마침 궁예(弓裔)가 나주(羅州)를 근심하여 드디어 태조(太祖)에게 가서 지키도록 명령하고, 품계를 올려 한찬 해군대장군(韓粲 海軍大將軍)으로 삼았다. 태조(太祖)가 정성을 다해 군사를 어루만지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행하니,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해 모두 힘껏 싸우리라 생각하였으며 국경의 적도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광주(光州)의 염해현(鹽海縣)에 머물다가 견훤(甄萱)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배를 사로잡아 돌아오니, 궁예(弓裔)는 매우 기뻐하여 후하게 포상하였다. 또 태조(太祖)로 하여금 정주(貞州)에서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알찬(閼粲)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군사 2,500명을 지휘하여 광주(光州)의 진도군(珍島郡)을 공격하게 하였다. 진도(珍島)를 함락하고 나아가서 고이도(皐夷島)에 머무니, 성 안 사람들이 군대의 위용이 엄정한 것을 멀리서 보고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나주(羅州)의 포구에 이르니, 견훤(甄萱)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戰艦)을 늘어놓았는데, 목포(木浦)부터 덕진포(德眞浦)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았고 수륙 종횡(水陸縱橫)으로 얽혀 있어서 그 군세[兵勢]가 매우 성하였다. 여러 장수가 근심하자 태조(太祖)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군대가 이기는 것은 화합에 있지 수가 많은 데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자 적 함선이 조금 물러났다. 바람을 타고 불을 지르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5백여 명의 머리를 베어 죽이자, 견훤(甄萱)이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처음에는 나주(羅州) 관내의 여러 고을이 우리와 막혀있는 데다 적병이 가로막고 있어 서로 응원할 수가 없어 자못 근심과 의심을 품었으나, 이에 이르러 견훤(甄萱)의 정예군이 꺾이자 사람들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로 인해 삼한(三韓)의 땅을 궁예(弓裔)가 절반 넘게 차지하였다. 태조(太祖)가 다시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주둔하며 수비하려 하였다. 김언(金言) 등이 스스로 전공은 큰데 상이 없다고 여겨 자못 해이해지자[觧體] 태조(太祖)가 말하기를, “삼가 게을리 하지 말고 오직 힘을 다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으면 복을 얻을 것이다. 지금 주상(主上)이 방자하고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와 아첨을 일삼는 무리가 뜻을 얻어 서로 점점 젖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내직(內職)에 있으면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변방에서 정벌에 참여하여 힘을 다해 임금을 도우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처럼 몸을 보전하는 편이 낫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가 옳게 여겼다.

드디어 광주(光州)의 서남쪽 경계 반남현(潘南縣)의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의 경내에 풀어 놓았다. 이 때 압해현(壓海縣) 도적의 우두머리[賊帥] 능창(能昌)이 있었는데, 섬에서 일어나 수전(水戰)을 잘하였으므로 수달(水獺)이라 불리었다. 유랑하는 자들[亡命]을 불러 모아 드디어 갈초도(葛草島)의 작은 도적떼와 서로 결탁하여, 태조(太祖)가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맞아 치려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능창(能昌)이 이미 내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반드시 섬의 도적들과 더불어 변란을 꾀할 것이다. 도적떼가 비록 적으나 만약 힘을 아우르고 세를 합쳐 앞뒤로 막고 끊는다면 승부를 알 수 없다. 헤엄을 잘 치는 10여 인에게 갑옷을 입고 창을 들게 하여, 가벼운 배에 태워 밤에 갈초도 나룻가에 가서 오가며 일을 계획한 자를 사로잡아 그 계책을 막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그를 따랐다. 과연 작은 배 한 척을 잡으니 곧 능창(能昌)이었다. 잡아서 궁예(弓裔)에게 보내니 궁예(弓裔)가 크게 기뻐하고 능창(能昌)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하기를, “해적(海賊)이 모두 너를 받들어 영웅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神筭] 때문이 아니겠는가?”라 하고 이에 사람들이 보는 데서 목을 베었다.

건화(乾化) 3년(913) 계유(癸酉) 태조(太祖)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을 세우자 거듭 승진시켜 파진찬 겸 시중(波珍粲 兼 侍中)으로 삼고 불러들였다. 수군(水軍)의 일은 다 부장(副將) 김언(金言) 등에게 맡겼으나, 정벌에 관련된 일은 반드시 태조(太祖)에게 보고하고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태조(太祖)의 지위가 백관(百官)의 으뜸이 되었으나 본래 뜻이 아니었고, 또 참소(讒訴)가 두려워 그 자리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매번 관청에 드나들며 국정을 공정하게 보았고, 오직 감정을 누르고 근신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 힘썼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였다. 매번 무고한 사람이 참소(讒訴)를 입는 것을 볼 때마다 여러 번 다 풀어 구해 주었다. 청주(靑州) 사람 아지태(阿志泰)가 본래 아양을 떨고 속이기를 잘 하였는데, 궁예(弓裔)가 참소(讒訴)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에 같은 고을 사람인 입전(笠全)·신방(辛方)·관서(寬舒) 등을 참소(讒訴)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이를 추궁하였지만 몇 년이 지나도 판결하지 못하자, 태조(太祖)가 바로 참과 거짓[眞僞]을 가려내어 아지태(阿志泰)가 죄를 자백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시원하다 일컬었다. 이로 말미암아 군부[轅門]의 장교(將校), 종친[宗室]과 공신, 현인, 지략과 학식을 갖춘 무리가 바람에 휩쓸리고 그림자처럼 따르지 않음이 없게 되자, 태조(太祖)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변방으로 나가기를 구하였다.

4년(914) 갑술(甲戌) 궁예(弓裔)가 또 이르기를, “수군(水軍)의 장수가 지위가 낮으니, 적에게 위엄을 보이기에 부족하다.”라고 하고 이에 태조(太祖)를 시중(侍中)에서 해임하여 다시 수군(水軍)을 지휘하게 하였다. 정주(貞州)의 포구로 가서 전함(戰艦) 70여 척을 수리하여 병사 2,000인을 싣고 나주(羅州)에 이르니, 백제(百濟, 후백제)와 해상 초적[草竊]이 태조(太祖)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모두 두려워하여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태조(太祖)가 돌아와 배를 움직이는 이로움과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보고하자, 궁예(弓裔)는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궁예(弓裔)가 반역죄를 터무니없이 얽어 하루에도 100여 명을 죽이니 장수나 재상 가운데 해를 입는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늘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체득하여 부녀자들이 몰래 간통을 한 것도 알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觀心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쇠를 두드려 3척의 쇠절구공이[鐵杵]를 만들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그것을 불에 달구어 음부에 찔러 넣어 입과 코로 연기를 뿜으며 죽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아녀자들[士女]이 무서워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노가 날로 심하였다. 하루는 태조(太祖)를 급히 부르므로 궁궐에 들어가니, 궁예(弓裔)가 바야흐로 처형한 사람에게서 적몰(籍沒)한 금은보기(金銀寶器)와 상, 장막 등 가재도구를 점검하다가 성난 눈으로 태조(太祖)를 노려보며 말하기를, “경(卿)이 어젯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반역을 꾀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궁예(弓裔)가 말하기를, “경(卿)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관심법(觀心法)을 할 수 있으므로 알 수 있다. 내가 이제 입정(入定)하여 살핀 후에 그 일을 밝히겠다.”라고 말하고,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 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옆에 있었는데,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주우면서 인하여 태조(太祖)의 곁을 빠르게 지나며 작게 말하기를,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그제야 깨닫고 말하기를, “신(臣)이 참으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궁예(弓裔)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경(卿)은 정직하다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내려주며 말하기를, “경(卿)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보장(步將) 강선힐(康瑄詰)·흑상(黑湘)·김재원(金材瑗) 등을 태조(太祖)의 부장(副將)으로 삼아 배 100여 척을 더 만들게 하니,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步)로서 위에 망루를 세우고 말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사 3,000여 인을 지휘하여 군량을 싣고 나주(羅州)로 갔다. 이 해에 남쪽 지방의 기근으로 초적[草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수자리 사는 군졸[戍卒]은 모두 콩이 반이나 섞인 밥을 먹었는데, 태조(太祖)가 마음을 다해 구휼(救恤)하니 그 덕택에 모두 살게 되었다. 예전 태조(太祖)의 나이 30세 때, 꿈에서 9층의 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가 보았다.

정명(貞明) 4년(918) 3월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어느 날 우연히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용모가 훤칠하고 수염과 머리털이 희고 머리에는 낡은 관을 쓰고 거사(居士)의 옷을 입고 왼손에는 바리 3개를, 오른손에는 사방 1척 남짓 되는 옛 거울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왕창근(王昌瑾)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살 수 있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창근(王昌瑾)이 쌀 2두를 주고 그것을 샀다. 거울 주인은 쌀을 가지고 길을 따라 가다가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갔는데 빠르기가 회오리바람 같았다. 왕창근(王昌瑾)이 그 거울을 저자(市)의 담장에 걸자, 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가느다란 글자가 은은히 나타났다. 그 글에 이르기를, “삼수(三水) 가운데 사유(四維) 아래로 옥황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내어 먼저 닭[雞]을 잡고 뒤에 오리[鴨]를 치리니 이것은 운수가 차서 삼갑(三甲)을 하나로 하는 것을 이름이라. 어둠 속에서 하늘에 올라 밝음 속에서 땅을 다스리니 자년(子年)을 만나면 대사(大事)가 중흥(中興)할 것이며, 자취와 이름이 혼돈(混沌)되니 혼돈 속에서 누가 진(眞)과 성(聖)을 알리오? 법뢰(法雷)를 떨치고 신전(神電)을 휘두르며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용(二龍)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黑金) 동쪽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보고 어리석은 자는 보지 못하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며 사람들과 더불어 가서 때로는 번성함을 드러내고 때로는 쇠퇴함을 보이기도 하나 성쇠(盛衰)는 악한 찌꺼기를 없애기 위함이라. 이 중 한 마리 용(一龍)은 아들이 서너 명인데 대를 번갈아 육갑자(六甲子)를 서로 이을 것이다. 이 사유(四維)는 반드시 축년(丑年)에 멸망하고 바다를 건너 와서 항복함은 모름지기 유년(酉年)을 기다린다. 이 글을 만약 현명한 왕이 보게 되면 나라와 백성이 크게 평안하고 왕업은 길이 창성할 것이다. 내가 적은 것은 무릇 147자이다.”라고 하였다. 왕창근(王昌瑾)이 처음 글자가 있는 줄 몰랐다가 이를 보고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겨 궁예(弓裔)에게 바쳤다. 궁예(弓裔)가 왕창근(王昌瑾)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찾도록 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였다. 오직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의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 앞에 전성(塡星)의 옛 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같고 좌우 양손에 바리와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王昌瑾)이 기뻐하며 그 모습을 갖추어 아뢰자 궁예(弓裔)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그것을 풀게 하였다. 송함홍(宋含弘) 등이 말하기를 “‘삼수(三水) 가운데 사유(四維) 아래로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용(二龍)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黑金) 동쪽에 형체를 드러낸다.’라는 것은, 청목(靑木)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龍)자 이름을 가진 이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에게 왕후(王侯)의 상이 있으니 어찌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흑금(黑金)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바인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께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끝내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것이로다! ‘먼저 닭[雞]을 잡고 뒤에는 오리[鴨]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王侍中)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이르기를, “임금께서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王侍中)이 반드시 해를 만날 것이고 우리도 또한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꾸며댄 말로 보고하였다.

6월 을묘(乙卯)에 이르러 기장(騎將)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밤에 태조(太祖)의 집으로 찾아가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太祖)가 굳이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夫人柳氏)가 손수 갑옷을 들고 와 태조(太祖)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가 옹위하며 나왔다.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면서 외치게 하기를, “왕공(王公)께서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드셨다!”라고 하니, 이에 다투어 달려와 붙는 자가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고,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치고 소리 지르며 기다리는 자도 10,000여 인이었다. 궁예(弓裔)가 이를 듣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왕공(王公)이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끝났다!”라고 하며 곧 꾀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微服)을 입고 북문(北門)으로 빠져나와 도망가니, 나인(內人)들이 궁궐을 깨끗이 하고 맞이하였다. 궁예(弓裔)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묵다가 굶주림이 심해지자 보리 이삭을 몰래 잘라 먹었다가, 부양(斧壤) 백성에게 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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