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리 패총 

선사유적

황새바위 

출여의 낭자

봉황대 여의각

김해 봉황동 유적 사적2호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 외

패총(貝塚)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骨角製品)으로서도 골촉(骨鏃)·골침(骨針)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첨두류, 尖頭類)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硬質)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打形)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新羅土器)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1920년의 발굴 때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의 돈인 화천(貨泉) 1개가 나와 이 패총(貝塚)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南方式支石墓)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있다. 이 유적들 사이의 층위적 관계(層位的關係)는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貨泉)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봉황대(鳳凰臺)란 조선 후기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구릉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준 이름이다. 가야 숙왕 때 장군인 황세(黃洗)와 출여의(出如意) 낭자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며 전설 속의 여의각과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다. 수로왕이 김해에 건국한 가락국 제 9대 임금인 겸지왕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쯤이 된다. 이 곳 봉황대(鳳凰臺) 아래 남대정동에 사는 출정승이라는 사람과 북대정동에 사는 황정승이라는 사람이 절친한 친구 사이로 만나 지내던 중 두 사람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굳은 약속을 한다. 그 후 출정승은 딸을 낳아 이름을 ‘여의(如意)’라 지었고, 황정승은 아들을 낳아 ‘세(洗)’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인간의 언약은 세월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인지라 마음이 변한 출정승은 황정승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혼약을 깨려 하였다. 그로 인하여 출정승의 딸 출여의(出如意)는 자라면서 사내옷을 입고 놀며 서당에 다녔고, 황세(黃洗)와는 막연한 친구사이가 되어 봉황대를 무대로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여긴 황정승의 아들 황세(黃洗)가 하루는 여의(如意)를 부추겨 봉황대(鳳凰臺) 정상에 있는 ‘개라암(介羅巖)’에 올라가서 ‘오줌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 했다. 난처해진 여의(如意)낭자는 궁리 끝에 기지를 발휘하여 재빨리 바위 뒤에 있는 삼대를 꺾어 오줌을 눔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줌바위 또는 황세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도 황세(黃洗)는 계속하여 여의(如意)를 여자라고 의심하였고, 마침내 어느 여름 날 황세(黃洗)는 여의(如意)에게 봉황대 옆으로 흐르는 거북내(龜川)에서 목욕을 같이 하자고 제의하였다.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버린 여의(如意)낭자는 편지를 써서 물에 띄워 보내 황세(黃洗)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황세(黃洗)와 여의(如意)의 깊은 사랑은 시작되었고, 결국 출정승도 황세(黃洗)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사랑하는 두 청춘 남녀의 혼약을 맺어주고 말았다. 이처럼 애틋하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을 맞게 된다. 신라군이 가락국을 침범해온 것이다. 그러자 용감한 황세(黃洗)는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고 신라군을 무찔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된다. 이에 겸지왕은 황세(黃洗)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하여 부마가 될 것을 명령한다. 이에 황세(黃洗)장군은 이미 혼약한 여의(如意)낭자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게 되어 결국 유민(流民)공주와 혼인을 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의(如意)는 혼자서 외로이 살며 다른 곳에 혼인하라는 아버지 출정승의 말도 마다하고 날마다 황세(黃洗)와 놀던 봉황대(鳳凰臺)에 올라 그리워하다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하늘문 바위에서 그만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다. 여의(如意)의 죽음을 알게 된 황세(黃洗) 또한 여의(如意)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에 마음의 병을 얻어 뒤따라 죽고 말았는데 그런 황세(黃洗)를 사랑했던 유민(流民)공주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는 출가하여 산으로 들어가 평생을 두고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봉황대(鳳凰臺) 맞은편 호랑이 입으로 전해지는 임호산(林虎山)이 바로 그 산인데 공주의 이름을 따서 ‘유민산(流民山)’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은 이 때 이후부터이다. 성안 사람들은 황세(黃洗)와 여의(如意)낭자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이라 하고,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명칭변경; 김해 회현리 패총 → 김해 봉황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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