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건릉(健陵)
건릉(健陵)
22대 정조(正祖)
-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 지정번호 : 사적 제206호
- 조성시기 : 1800년(순조 1)
- 능의구성
건릉은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하다. 기단부가 향로와 같은 형태로 8면에 둥근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팔면에 새긴 장명등도 융릉과 같다. 또한 등신대에 가까운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원 아래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동쪽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6.25 당시 무너졌던 것을 199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각 안에는 1900년(광무 4) 고종이 어필로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자각 서쪽에 주춧돌만 있던자리에 2002년 수라간을 복원하여 세웠다. 그리고 정자각 남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융릉과 마찬가지로 참도 좌우에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놓은 것이 다른 왕릉에 비하여 특이하다.
-능의역사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길지를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냈으며,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효의왕후의 능호는 정릉이라고 하였다가 위와 같이 건릉으로 합장하게 됨에 따라 능호를 따로 쓰지 않게 되었다.
- 정조(正祖) 생애이야기
정조는 장헌(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훗날 경의왕후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창덕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2월 가례를 올렸으며, 그 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1764년에는 그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삼았다. 1775년(영조 51)부터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며, 다음 해 3월 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조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상하였으며, 아울러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 일당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드용하였으며, 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긴 정조는 1800년(정조 24)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정조 14)에서 1795년(정조 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1796년(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행궁으로 고쳐 지은 후에도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 생애이야기
효의황후는 1753년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 10세의 나이로 세손빈에 책봉되고, 정조의 어머니 혜빈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 14)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혜빈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가 올려졌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 속에 지통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1821년(순조 21)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소생없이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효의왕후는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후사를 위해 후궁을 들여야 하는 등 불운하다면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왕후의 행장에는 효의왕후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효의왕후는 아랫사람을 반드시 성의와 신의로써 대하여 일찍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정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효의 왕후는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복식과 기물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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