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죽서루 국보343호
소 재 지; 강원 삼척시 죽서루길 44(성내동 9-3)
「삼척 죽서루(竹西樓)」는 고려 명종(1171∼1197)대에 활동하였던 김극기(金克己, 1148∼1209)가 죽서루(竹西樓)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되었으며, 안축(安軸, 1282~1348)과 정추(鄭樞, 1333~1382) 등의 시를 통해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죽서루단청기(竹西樓丹靑記)』(1472), 허목(許穆, 1595∼1682)의 『죽서루기(竹西樓記)』(1662) 등에서 ‘1403년 삼척부사(三陟府使)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된 기록이 잘 남아있으며, 조선 후기 증축된 이후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목(許穆)은 ‘죽서루(竹西樓)라는 이름은 동쪽에 죽장사(竹欌寺)라는 절이 있어서 그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다’라는 뜻으로 붙었다고 소개되었다. 「삼척 죽서루(竹西樓)」는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팔작지붕(맞배지붕 옆에 삼각형의 합각을 남기고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리는 지붕)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확장된 좌·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의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 등에서 각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달리 보여주고 있다. 「삼척 죽서루(竹西樓)」의 기둥은 절반 이상이 자연 암반 위에 올라서 있다. 22개의 기둥 중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기둥이 13개이고, 9개는 자연석 초석을 두고 받쳤다. 증축한 남쪽 한 칸은 바닥에 마루를 깔지 않고, 자연의 암반을 그대로 둔 채 출입을 돕기 위해 가운데 한 칸 부분만 고르게 다듬은 돌을 깔았다. 내부는 벽과 창호가 없는 개방된 평면으로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어 보이는 연등천장과 우물정자 모양으로 마감된 우물천장으로 설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정자 모양의 귀틀(나무틀)에 짧은 판재를 끼워서 바닥을 구성하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는데,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삼척 죽서루(竹西樓)」에는 조선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유명한 시인과 명신들의 한시가 새겨진 현판이 많았으나, 1959년 태풍 사라의 영향으로 많이 유실되고 28점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 등을 남겼다. 죽서루(竹西樓)의 정면에 걸린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현판은 1710년(숙종 36)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왔던 이성조(李聖肇) 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憲宗) 3년(1837)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圭憲)이 쓴 것이다. 「삼척 죽서루(竹西樓)」를 표현한 그림도 많이 남아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죽서루(竹西樓)의 그림이다. 이외에도 김홍도(金弘道, 1745∼),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도 그림을 남겼다. 「삼척 죽서루(竹西樓)」는 각종 기록을 통해 중창과 후첨된 건립연대가 명확하여 역사적 가치가 크고, 조선 초기와 중기 이후의 건축 원형을 잘 유지하면서 건축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며,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과 그림이 많이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 또한 크다. 본 누의 남쪽에는 별관(別館)인 연근당(燕謹堂)이 있었다 한다. 더불어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진 죽서루(竹西樓)의 경관이 빼어난 점 등을 고려할 때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