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국보348호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운암리 567) 마곡사
공주 마곡사(麻谷寺)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중의 하나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640)에 신라(新羅)의 고승(高僧)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혹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징(體澄, 804~880)이 창건하였다고 기록으로 전하나,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은 없으며,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공주 마곡사(麻谷寺) 오층석탑(五層石塔)」은 조성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후기 충청과 호남 지역에 성행한 백제계 석탑 양식을 취한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2층 탑신에 조각된 사방불의 세부 표현기법 등에서 고려후기(14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후기에 조성된 5층 석탑으로, ‘풍마동(風磨銅)’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1.8m의 금동보탑을 옥개석(탑신석 위에 놓는 지붕같이 생긴 석재) 위에 올려 이른바 ‘탑 위에 탑’을 쌓은 매우 특수한 양식을 갖췄다. 특히, 금동보탑은 중국 원나라 등에서 유행했던 불탑양식을 재현하고 있으며, 제작기법이 정교하고 기술적,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당시 불교문화의 국제적인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풍마동(風磨銅)은 ‘바람에 닳아서 빛이 난다’라는 뜻으로,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이 1761년 1월 1일 북경의 궁궐을 방문한 뒤 『북원록(北轅錄, 북경 견문록)』을 통해 ‘십자각에는 금정(金頂)을 더해 놓아 빛이 유난히 찬란했는데, 이는 금이 아니요 이른바 풍마동(風磨銅)으로 외국의 소산이었다. 금보다 귀하고 바람에 마모되면 더욱 빛나는 까닭에 이름 한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마곡사(麻谷寺)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티벳, 몽골, 네팔 등 히말라야 인근의 불교국가에서 유행하는 불탑 양식이다. 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후기 충청과 호남 지역에 성행한 백제계 석탑 양식을 보인다는 점, 2층 탑신의 동·서·남·북에 조각된 사방불의 머리 위 장식이 고려후기의 불상에서만 등장하는 동그란 모양이라는 점, 사방불 중에서도 동쪽에 새겨진 약사불이 든 약함이 뚜껑이 없이 위가 볼록한 형태로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고려 1346년)에서 보이는 것과 동일하다는 점 등의 세부 표현기법으로 미루어보아 고려후기(14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2중으로 조성된 석탑의 기단(석탑의 탑신 및 옥개석 등을 받치기 위해 흙, 돌 등으로 쌓은 단)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백제계 석탑 양식을 보이며, 석탑 지대석( 석탑의 맨 아래 부분에 하중을 지탱할 힘을 높이기 위해 놓은 기초석 )에는 게의 눈과 같은 형상의 곡선 모양을 일컫는 해목형 안상(蟹目形 眼象, 게의 눈과 같은 형상의 곡선 문양을 새긴 것)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석탑에서 최초로 발견된 사례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신라의 거승(巨僧)으로 널리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고 불법(不法)을 성취(成就)하고자 당(唐)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이르러 수도할 당시 문수보살(文殊菩薩)로부터 석가(釋迦)의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전수받아 귀국하여 이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金九)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金九)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金九)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출처.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