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景德王) 충담사(忠談師) 표훈대덕(表訓大德)


도덕경(德經)≫ 등을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로는 혹 대궐 뜰에 나타나 모셨다.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威儀)가 깨끗한 고승(高僧)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威儀)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 또는 삼태기(荷簣) 지고서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忠談)이옵니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朕)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朕)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이렇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기파랑(耆婆郎)을 찬미한 노래는 이렇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쫒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郎)이 지니신 마음가를 쫓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王)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8치(八寸)나 되었다. 아들이 없으므로 왕비(王妃)를 폐하여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王)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大德) 불러 말하기를, “짐(朕)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大德)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表訓)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가능하나 아들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길, “원컨대 딸을 바꿔 아들로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表訓)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 청하니, 상제(上帝)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表訓)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上帝)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스님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表訓)돌아와 천제(天帝)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위태로울지라도 아들을 얻어서 뒤를 잇는다면 족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태자가 8세 때에 왕이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大后)가 조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을 수가 없었으니, 표훈(表訓)스님의 말이 맞았다. 어린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자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였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마침내 왕은 선덕왕(宣德)김양상(金良相)에게 살해되었다. 표훈(表訓)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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