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침 필적 보물1623호
소 재 지; 대전 유성구 도안대로 398(상대동 488) 대전시립박물관
성수침(成守琛) 필적(筆蹟)은 표지에 ‘청송서(聽松書)’라고 쓰여진 이 서첩은 16세기 학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이 당나라 가도(賈島),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과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칠언시를 쓴 것이다. 종이 바탕을 줄[行]에 따라 잘라 첩장하였다. 송명흠(宋明欽, 1705~1768)후손의 기증품으로 송명흠(宋明欽)의 아버지 송요좌(宋堯佐, 1678~1723)의 '청은당(淸隱堂)'이란 인영(印影)이 있다. 성수침(成守琛)은 이황(李滉)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 명필로 필적은 드문 편이다. 현재 그의 소자(小字)는 몇몇 전하고 있는 상황이고 대자(大字)는 목판밖에 전하지 않는다. 이처럼 큰 글자로 쓴 작품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며 담묵(淡墨)을 즐겼던 그의 특징이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서예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성수침(成守琛)은 조선 중종·명종 때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청송(聽松) ·죽우당(竹雨堂), 자는 중옥(仲玉),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趙光祖)가 처형되고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대학(大學)>, <논어(論語)>를 읽고 <태극도(太極圖)>를 그리면서 조화(造化)의 근본 탐구에 몰두했다. 후에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처가가 있는 파주(坡州)의 우계(牛溪)에 은거했다. 1552년(명종 7) 예산현감(禮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다시 여러 고을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퇴했다.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을 떨치고 문하에서 많은 석학(碩學)들을 배출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