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초서 보물1624호

소 재 지; 서울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1) 서강대학교 박물관

16세기 문신·시조작가·초서명필로 유명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필적으로 당나라 저광의(儲光羲)의 오언시「낙양도(洛陽道)」 5수 가운데 제1수를 쓴 것이다. 원래 첩이었던 것을 근대에 축으로 개장하였다. 양사언(楊士彦)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6)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초서 명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금강산과 같은 선경(仙境)을 좋아하고 세속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듯이 글씨에서도 당나라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의 방일(放逸)한 초서를 매우 애호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양사언(楊士彦)의 필적으로 『봉래유묵(蓬萊遺墨, 보물 제1539호』은 국한문을 섞어 쓴 자작시문 원고로 문학연구 자료로 귀중하다. 또『근묵(槿墨)』에 실린 시고(詩稿) 등 몇몇 소품이 전한다. 이에 비해 이 오언시 필적은 둥근 원필세(圓筆勢)의 빠르고 거침없는 대자초서(大字草書)로 자유분방하고 도가적 기풍의 예술세계를 가졌던 양사언(楊士彦)의 성품과 그가 지향한 초서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초성(草聖)이라 불렸던 그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되며, 더욱이 뒤쪽에 조선후기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1749년 발문(3건)과 조명교(曹命敎, 1687~1753)의 발문이 딸려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양사언(楊士彦)은 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으로,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동승()을 거쳐 삼등현감()·평창군수()·강릉부사(使)·함흥부사·철원군수·회양군수(陽郡守)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陽郡守)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재임 중 지릉()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시()와 글씨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초서()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김구(絿)·한호()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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