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치아사리와 보드가야의 보리수가 당도하다

 

갠지스강 하구 벵골만에서 떠난 선물

인도 보드가야(부다가야)에서 바다를 건너 스라랑카에 온 2000여 년 역사의 보리수나무.


부처님 열반 이후에 바다를 건너 진신 치아사리를 모셔와 불치사(佛齒寺)를 조성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고대사회에서 대단한 사건이었고, 불교사를 뒤바꿀만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스리랑카는 상좌부(上座部)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불치사리 이동에 벵골만 오리샤 호숫가의 칼링가 상인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최고의 품격을 갖춘 의식을 통해 옮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칼링가의 수도 단타푸라는 ‘부처님의 치아’를 뜻한다. 전설에 따르면, 붓다가 열반한 후 치아사리가 칼링가에 보존되었고, 시리메가바나(301~328년) 통치 기간에 스리랑카로 이양되었다. 진신 사리와 달리 그 숫자가 극히 제한적인 진신 치아사리를 스리랑카로 보냄으로써 바다 위 불국토의 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넌 치아’는 해양을 통한 스리랑카 문명교류의 중요 맥락을 설명해준다. 불치는 왕국의 옥쇄와도 같이 전란을 겪으면서도 끝없이 새로운 왕도와 함께 이동·전승되어 왔다. 불치는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모셔졌다가 폴론나루를 거쳐서 마지막 수도 캔디로 옮겨졌다. 스리랑카 불교 2000년의 역사를 불치와 함께한 것이다.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스리랑카 불교를 여러 대목으로 나누어 묘사했다. 국왕이 불법(佛法)을 돈독하게 믿고 있고, 새로 정사를 짓고 있었다. 불치는 항상 3월 중에 불치정사에서 나오는데, 국왕은 큰 코끼리를 장엄하고, 말 잘하는 사람에게 국왕의 복장을 입혀서 코끼리 위에서 북 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고 했다. 고대에도 불치사가 불교의례와 왕권의 중심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석가여래의 전생 삼아승지겁에 걸쳐서 고행하시면서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셨다. 나라와 성과 처자식 그리고 자신의 눈조차 빼서 남에게 보시하시며 살점을 베어내 비둘기 몸값을 치르셨다. 머리까지 잘라 보시하시고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내주어 뇌수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중생을 위하셨기 때문에 성불하시어 45년 동안 설법과 교화를 하시어 열반에 드셨도다. 그 이후로 세상의 눈을 멸하여 중생들은 긴 근심에 있다. 이제부터 10일 후 불치사리는 정사를 나와 무외산에 이른다. 나라 안 승속과 복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각각 도로를 편안하게 하고 아름답게 꾸며 여러 꽃과 향과 공양기구를 준비할지어다.”

바다로 나아간 칼링가 사람들
불치를 떠나보낸 오리샤는 칼링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다. 예전에는 오리샤 항구를 아예 칼링가로 불렀다. 칼링가는 영역의 지배자가 수없이 바뀌었으나 마하나디와 고다바리강 사이를 지칭한다. 영역이 넓었을 때는 북쪽으로 갠지스강, 남쪽으로 고다바리강에 이르렀다.

칼링가 정복전쟁(기원전 261년경)을 치르면서 마우리아 왕조가 지배했으며, 이후에 굽타왕조 등 여러 다양한 왕조가 칼링가를 지배한다. 당나라 의정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칼링가국 둘레는 5000여 리에 달하고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다. … 정법을 믿는 사람은 적고 외도를 따르는 이는 많다. 가람은 10여 곳 있고 승려는 500여 명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상좌부를 배운다”고 했다.

칼링가국은 인구가 많아서 오가는 사람의 어깨가 부딪히고 수레가 부딪칠 정도로 왕래가 번잡했다고 했다. 성 남쪽에 아소카왕이 세운 수투파가 하나 있는데 높이는 100여 척에 달한다. 그 옆에는 과거 4불께서 앉거나 거닐던 유적이 있다. 국경의 북쪽 지역 거대한 산마루에도 돌로 만들어진 수투파가 있는데 높이는 100여 척에 달한다고 했다.

의정스님이 칼링가에 당도했을 시점에는 이미 불교가 쇠퇴하고 아소카의 흔적만 남은 상태였다. 불교가 쇠퇴하자 한동안 자이나교의 거점이 되었다. 7세기에 자이나교 대신에 힌두교가 부상했다. 무역과 상업이 성장했고 문화가 꽃을 피웠다.

칼링가 동쪽은 벵골만에 면해 있어 해양 진출에 유리하다. 칼링가 상인이던 카운디냐는 나가족의 소마 공주와 ‘국제결혼’을 통해 푸난(扶南) 왕국(오늘의 베트남 메콩강 하구)의 공동 창건자가 된다. 8세기 자바의 사일렌드라 왕조, 참파 왕조도 칼링가 사람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다.

5세기 초반, 법현스님은 참파(瞻波大國)를 찾아간다. <불국기>에 등장하는 갠지스강가의 이 참파국 사람이 이주해 오늘날 베트남의 참파를 세운 것으로 비정된다. <불국기>에 이르길, “갠지스강 따라 동쪽으로 18유연 내려가면 남쪽 강변에 참파대국이 있다. 여래의 정사와 거니시던 곳, 그리고 과거 4불의 좌선처가 있는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고 현재 승려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스리랑카 캔디의 불치사에는 날마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친견하기 위한 불자들이 몰려와 꽃의 바다를 이룬다.


칼링가의 중심인 오리샤 해역권에 전통적으로 고대 해양집단이 웅거했다. 오리샤에는 인도 최대의 해안 석호인 칠리카호가 있어 고대로부터 선박 집결지로 유명했다. 호수를 빠져나온 선박은 벵골만을 무대로 남쪽으로 스리랑카, 동남쪽으로 동남아시아로 항해했다. 중국 현장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며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고대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기원후 150)는 칼링가의 주요 거점 항구가 푸리, 코삼비, 팔루르였다고 했다. 팔루르는 불교 문헌에 언급되는 단타푸라와 같은 곳이다. 단타라는 단어는 치아를 의미하므로, 칼링가의 수도 단타푸라는 ‘부처님의 치아’를 뜻한다.

푸리에는 강가 왕국이 13세기에 세운 칼링가 건축양식의 코락 선 힌두사원이 있다. 뱃길로 번성하던 시절에 세워졌다. 푸리는 코락을 짓기 위해 거대한 돌을 선적한 항구다. 7세기 당시를 기록한 현장스님은 이 항구가 불교와 힌두교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예술적으로 지어진 5개의 불교 수도원이 있었다. 현장이 이 항구를 이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대 중국인에게 국제항구로서 알려졌다는 증거다.

여러 시대의 중국 도자기가 발굴되었고, 수입 도자기는 아랍과의 접촉을 나타낸다. 미얀마와의 무역 관계는 갈색 유약 도자기의 발견으로 입증되었다. 시암의 도자편도 발견되어 말레이반도 동쪽과 무역하였음이 분명하다. 스리랑카 동전(11~12세기)과 한자가 각인된 구리 동전이 12세기까지 동서 해상무역이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인도 동북의 오리샤에서 남방 스리랑카, 동쪽 미얀마와 시암, 남동쪽의 수마트라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를 입증한다. 로마제국의 암포라와 회색·흰색 도자기편도 발굴되어 지중해권과 연결되어 있었다. 칠리카 호수가 무역거점이자 선박 피난처였으며, 자바와 말레이, 스리랑카와 중국으로 떠나는 출항처였다.

2천여 년을 버텨온 보리수나무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에 당도한 후, 비구니 스님이 없음을 알고서 아소카왕에게 스님과 함께 보리수를 간청한다. 아소카왕의 딸 상가미타가 스리랑카로 건너와서 보드가야 보리수나무가 맺은 첫 번째 열매에서 돋아난 여덟 새싹 중 하나를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 보디 사원에 심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바로 그 나무로, 2000여 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키며 묵묵히 불자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스리랑카의 내부 역사는 이처럼 해협을 통한 인도아대륙과의 관계다. 그러나 스리랑카는 북방 타밀에게 번번이 습격당했다. 2000여 년에 걸친 싱할리 왕조의 ‘3대 수도이자 문화 삼각지대’라 할 수 있는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 캔디 등은 북방 힌두 세력의 공격을 자주 받아 초토화되기 일쑤였다. 불맥(佛脈)이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전해 받은 미얀마가 다시금 승려를 보내 불교 재건에 나섰다. 이는 동남아 상좌부 불교 교류의 강력한 해상 네트워크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의 타밀 해협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해협의 긴장’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왜구와의 긴장과 일맥상통한다. 2009년 상황이 종료되기까지 북부 자프라를 중심으로 타밀 호랑이와 스리랑카 군대가 벌인 전투는 북방에서 바다를 건너 내려온 힌두 타밀과 싱할라 불교세력의 종교적 갈등이기도 하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37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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