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으로 빛나던 사자국

 

구법승의 필수 순례지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

 

스리랑카를 방문하거나 감상을 남긴   
순례자 중에서는 법현, 현장, 의정,    
금강지가 주목…특히 고대 중국과의   
교섭에서 중요자료는 법현의 ‘불국기’  

정화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중국  
황제가 보내는 다양한 선물을 지참했다 
목록은 중국어 페르시아어 타밀어로 …

사자국(獅子國)의 상징인 사자. 스리랑카 시리가야 왕성 입구의 사자발톱이다.
 
사자국(獅子國)이라는 나라는 머나먼 신라 땅에도 ‘불국토’의 전형으로 전해졌다. 그 먼 바다를 건너 사자국의 소식들이 때로는 정확하게, 때로는 침소봉대로 확대 전파되었을 것이다. 천축으로 가는 구법의 길에 이 섬나라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불경(佛經)이 완비되지 않은 조건에서 천축에서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구법승들은 천신만고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졌다. 북천축을 목표로 순례를 떠났으나, 귀환 길에는 스리랑카에 들리는 스님들이 많았다. 어떤 스님은 무사히 돌아와서 순례기도 남기고 역경사업에 전념하였으나, 이름도 없이 사라진 스님도 상당수다. 그리하여 기록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궤적’일 뿐이다.


스리랑카에서 사자는 일찍이 사라졌으나 본디 드넓게 서식하던 동물이다. 인도아대륙과 스리랑카가 육지로 붙어 있다가 간빙기에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섬이 형성된다. 그 덕분에 사자 같은 동물이 스리랑카에 잔존하였으며,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법의 수호신으로 등장한다. 한반도 ‘쌍사자 석등’ 같은 전통도 여기서 유래했다. <신당서>에서 사자국의 기원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자는 서남해 가운데 있다. 길이가 2000여 리이며 능가산(稜伽山)이 있고, 기이한 보화가 많아서 보화를 섬 위에 놓아두면 상인의 선박이 그 값어치를 지불하고 곧 갖고 가버린다. 후에 이웃나라 사람이 자주 가서 살았다. 사자를 능히 길들여 키운다고 하여 나라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남사(南史)>에 따르면, 동진 의희(義熙, 405~418) 연간에 사자국에 사자를 보냈다. 옥으로 만든 불상을 공헌하였는데 10년이 걸려서야 겨우 도착했다. 이 옥불상은 동진과 유송 양대를 거쳐 와관사(瓦官寺)에 보관되었다. 428년에 사자국 왕 찰리마가(刹利摩訶)가 사자를 보내 표를 올리고 공헌했다. 1435년에 또 사자를 보내 봉헌했다. <양서(梁書)>에 이르길, 대통(大通) 원년(527)에 사자국 왕 가섭가라가리야(伽葉伽羅訶梨邪)가 사자를 보내, “비록 산과 바다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소식이 때마다 통합니다”라고 표를 올린다. 사자국과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지 소통했다는 증거다.


중국 스님들이 스리랑카로 들어가기 전에 많은 사자국 스님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426년 남경에 스리랑카 비구니 여덟 명이 도착했다. 이어서 서기 429년에는 세 명이 도래했다. 434년에는 세 번째 비구니들이 방문했고, 서임식이 진행됐다.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러 들어가기 전에 그쪽에서 먼저 능동적으로 전교에 나섰다는 증거다.


스리랑카를 방문하거나 스리랑카에 대한 감상을 남긴 중국 순례자 중에서는 법현, 현장, 의정, 그리고 금강지가 주목할 만하다. 스리랑카와 고대 중국의 교섭에서 중요 자료는 법현스님의 <불국기>다. 399년 중국을 떠난 법현스님은 402년 인도에 당도하며, 두루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귀국길에 스리랑카에서 2년여 머문다. 당시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머물렀는데 도시의 도로가 정연하고, 5~6만 명의 승려가 주석했다고 기록한다. 엄청났던 불교력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동서남북 길모퉁이에 모두 설법당을 만들고 매월 8일과 14일, 그리고 15일에 높은 법상을 만들어 승속을 막론하고 사부대중이 모두 모여서 설법을 들었다. 승려가 대략 6만여 명이고 모두 대중공양을 한다. 왕은 별도로 성 안에서 5~6000명에게 대중공양을 하고 있으며, 중식을 받는 승려는 모두 발우(鉢盂)를 가지고 가서 받는다고 했다. 법현스님의 시대에 왕성하던 스리랑카 불교를 짐작케 한다.

정화(鄭和)가 남긴 중국어와 페르시아어, 타밀어 3개 국어 비문. 불공을 드린 기록도 담겨있다.
 
무역상이 주도한 스리랑카 뱃길
3년이 넘는, 만만한 바닷길이 아니었다. 삼불제(스리비자야)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난 다음에 스리랑카로 넘어오는 수도승이 늘어났다. 불법을 실어 나르는 뱃길은 무역 상인이 이끌었으며, 불경뿐 아니라 불상 같은 무거운 물건, 스리랑카의 보석 같은 진귀한 무역상품도 포함되었다. 중국으로 스리랑카의 수많은 패엽경이 들어갔다.


일찍이 7세기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이 나라는 본래 보물섬(寶渚)으로 불렸다’고 했다. 현장스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불치정사를 기록하면서 보석을 언급했다. “높이가 수백 척에 달하며 보배 진주로 장식하여 그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다. 정사 위에는 표주(表柱)를 세우고 발담마라가(鉢曇滅加, Padma-raga)라는 거대한 보석을 올려두었는데 그 보석의 광채가 크게 빛을 발하고 잇닿은 빛이 눈부시게 사방을 비추었다”고 했다.


기원전 중국이나 서방의 항해기술상 논스톱으로 서방에서 중국까지, 아니면 중국에서 서방까지 항해하기 어려웠다. 중간에 위치한 스리랑카는 중개무역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중간 거점에서 스리랑카의 물건을 사거나 중국 등에 파는 식으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두 나라의 교류에서 불교가 매우 중요했다. 5세기에 스리랑카의 유명한 조각가인 난테(Nante, Nanda)가 건너가서 자신의 조각품을 전하고, 중국에 남아 조각술을 가르쳐준 이후에 불상이 유행했다는 증거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지 중국불교 조각 및 사원 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많은 산스크리트 불경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7세기에 이르러 중국인은 나침반을 발명했다. 송과 원 시절 조선업이 발달했고, 외국으로 향하는 선박이 늘어났다. <제번기>에 스리랑카를 세란국(細蘭國)으로 표기하고, 외래 상인들이 단향, 정향, 뇌자, 금은, 자기, 말, 코끼리, 명주실, 비단 등으로 교역한다고 했다. 조선에서도 스리랑카를 세란국으로 불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에서 “석란산(錫蘭山)은 큰 바다 속에 있다. 임금은 불교를 숭상하여 코끼리와 소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다.

사자국과 중국의 교섭
15세기 초기에 정화(鄭和)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정화는 스리랑카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정화 대항해 연대기 작가였던 마환(馬歡)은 스리랑카를 석란(錫蘭)으로 표기했다. 정화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중국 황제가 보내는 다양한 선물을 지참했다. 선물 목록은 중국어와 페르시아어, 타밀어로 적힌 명문에 포함됐다. 제2차 원정은 영락 5년(1407년) 남경에서 출발했다. 정화는 무사히 여기까지 찾아온 항해에 감사드리는 불사를 개최하고, 기념 비석을 세웠다. 오른쪽에 한자, 왼쪽은 타밀어, 왼쪽 아래는 페르시아어, 3개 언어다. 남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통용되던 타밀어, 당대 해양세계에서 두루 통용되던 페르시아어가 인상적인데, 정화 자신이 무슬림으로서 페르시아 언어를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문에 각각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 등장한다. 한문 부분은 정화가 항해자들이 기원하던 사원에서 공양했다는 사실과 불교의례에 바쳐진 품목이다. 타밀어 부분은 명의 황제가 힌두교 신 비슈누를 찬양하여 공물을 바침으로써 당대 바다를 누비던 힌두교 무역 상인을 배려한다. 페르시아어 부분은 이슬람교와 알라신과 성인의 영광을 찬양하여 공물을 바치고 비석을 세움으로써 당대 페르시아 무슬림 상인들을 배려한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37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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