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모습
능파교
고성 건봉사지 사적569호
소 재 지; 강원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냉천리 36) 일원
건봉사(乾鳳寺)는 전국(全國) 4대사찰(四大寺刹)의 하나로 월정사(月精寺)와 더불어 전국 31개 사찰의 본산(本山)으로 승려수만 700여 명을 헤아리는 큰 사찰이었다 한다. 이 절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7년(520)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금강산(金剛山) 남쪽 명당을 찾아 이곳에 당시 원각사(圓覺寺)를 건립(建立)하였다. 그 뒤 경덕왕(景德王) 17년(758)에 발징화상(發懲和尙)이 중수(重修)하고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7년(1358)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건봉사(乾鳳寺)라 이름을 바꾼 것은 이 절의 서쪽에 새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어 건(乾)과 봉(鳳)을 합쳐 지은 이름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선조(宣祖)의 명(命)을 받들어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 겸(兼) 의병대장(義兵大將)의 직책을 받게 되자 그 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승병(僧兵)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6,000여 명의 승병이 이곳에 합집, 왜적(倭敵)을 무찔렀다 한다. 한국전쟁으로 불타 지금은 옛 절터만 남아있다. 「고성 건봉사지(乾鳳寺址)」는 문헌기록상 6세기경 창건되었으며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극락에 오르기 위해 10,000일 약 27년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외우며 기도하는 모임)의 발상지이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교신앙의 중심도량(道場, 불도를 닦는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원당(元堂, 왕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우거나 육성한 불교 사찰)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僧兵,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로, 승군이라고도 함)을 일으킨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고성 건봉사 능파교(보물)’, ‘건봉사 불이문(문화재자료)’ 부도군 등 다수의 문화유산이 현존하고 있다. 「고성 건봉사지(乾鳳寺址)」는 1990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2002년부터 2020년까지 9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와 2회에 걸친 학술발표회(세미나)를 통해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 고려후기 건물지까지 확인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능파교(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를 기준으로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 낙서암 영역으로 구분되어 각 영역 내에 예불, 승방이 조성되고 이후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모셔놓는 건물) 영역이 새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고성 건봉사지(乾鳳寺址)」가 일반적인 조선시대 사찰배치에서 보이는 예불공간 중심의 구성이 아닌 예불공간과 승방(僧房,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이 균일하게 구성되어 있는 양식을 보여주었던 고려시대 다원식(多院式, 건물지가 구역별로 구분되는 형태) 구조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각종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성과, 사역 전체에 분포하고 있는 석조유물 등을 종합하여 미루어볼 때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사지이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