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개운사 아미타목조여래좌상과 복장유물

 

주불인 비로자나불상이 아닌 아미타불상에서 다량의 화엄경이 발견돼 특이한 사례로 꼽히는 서울 개운사 아미타목조여래좌상(고려 1274년 이전, 보물, 복장 불교중앙박물관).
 
아미타부처님께 봉안된 화엄경의 세계

화엄종 주불 비로자나불 아닌
하나의 아미타 불상 복장서
스무 권에 달하는 화엄경 발견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간행된
필사본 목판본 함께 있어 주목
주본 권24 한 줄 권수제 특이

주본 권28 경전 첫 장 경전명
비로자나불 설법 장면 변상도
고려초기 불화 연구에도 중요

개운사는 한국불교 개혁의 근원지로 서울 안암산 자락에 있다. 김포로 옮긴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다. 조선 태조 5년(1396)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가 사대문과 가까웠던 지금의 고려대학교 이공대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조 3년(1779년) 5월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홍씨가 세상을 떠나 영도사 부근에 묘소를 정하자, 축홍(竺洪)스님이 영도사를 현재의 개운사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사찰 이름을 개운사로 바꾼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중수발원문 가운데 가장 오래 돼
오늘 소개할 성보는 고려 후기인 13세기에 조성되어 개운사 미타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목조여래좌상이다. 좌상임에도 높이가 115.5슛에 달해 이 시기의 목불상 가운데는 비교적 큰 규모이다. 이 불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품(腹藏品)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 불상 복장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1274년)의 것으로 밝혀져 한국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복장유물은 보존상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로 조성되었다. 건장한 신체에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으며, 수인(手印)으로는 가슴으로 모아지는 아미타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풍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미간 사이의 백호는 큰 편이다. 당당하면서 둥근 어깨와 무릎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주름 선은 팽팽한 탄력이 느껴지며, 왼발 위에 걸쳐진 옷자락 끝은 유려하게 흘러내린다. 이 불상은 세련된 조각기법과 균형감 있는 비례를 바탕으로 엄숙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는 대표적인 고려시대 불상이다.

우리 인간이 사바세계에서 정토 극락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으로는 자기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아미타불에 귀의해 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는 타력의 힘에 의지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복잡한 교리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불교의 다른 사상보다 아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의 위대한 원력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앙으로 대중들에게 폭넓게 사랑받았다.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중간대사원문(1274년)


아미타정토 왕생 발원문 발견
개운사 아미타불을 여러 차례 개금 중수하면서 복장에 넣었던 3장의 발원문을 통해서도 이러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간단하게 발원문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1274년에 조성된 발원문은 중간대사(中幹大師)가 쓴 원문(願文)이다. 내용은 지원(至元) 11년(1274년) 4월12일, 고려국 동심접(東深接, 아산)ⓜ에서 중간대사가 오래된 절의 훼손된 무량수불을 개금하고, 그 공덕으로 돌아가신 부모와 친척, 본인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1322년에 개금할 때도 발원문은 2종을 넣었다. 하나는 최춘(崔椿)이 쓴 것으로, 지치(至治) 2년(1322년) 윤5월19일, 고려국 중부속(中部屬, 개경)에 사는 최춘이 금불 복장 조성에 오승포(五升布) 1필을 바치고 그 공덕으로 돌아가신 편모의 정토 종생(淨土 終生), 자신 가족과 형의 무병장수, 매년 편안과 태평, 만년의 소망이 성취되기를 바라며, 무병장생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다른 발원문은 1322년 천정(天正), 혜흥(惠興)스님이 쓴 원문이다. 지치(至治) 2년(1322년) 8월13일, 고려국 아주(牙州, 아산) 취봉사(鷲峯寺)의 도인(道人) 천정과 혜흥이 불상을 중수하면서, 아미타불 개금 공덕으로 금세와 내세에 얻고자 하는 각종 기원을 담은 것이다. 10가지의 큰 소원을 적은 끝에 ⓞ황제폐하 만만세ⓟ와 고려 말기 중국 원나라에 볼모로 있던 ⓞ충선왕과 충숙왕의 조속한 환국ⓟ 그리고 왕실의 안녕과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은 본래 충남 아산의 취봉사(鷲峯寺)에 봉안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찰은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아미타부처님을 개금 중수한 공덕으로 서방정토에 왕생과 여러 기원을 바라는 발원문을 통해 아미타정토사상에 의해 이 부처님이 조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충선왕과 충숙왕의 귀국 등을 바라는 내용도 등장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호국불교의 성격도 살펴볼 수 있다.

아미타불에 봉안된 화엄경 스무 권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에 봉안된 많은 전적들 가운데 스무 권에 달하는 <화엄경>이 발견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대승불교의 최고라 할 수 있는 화엄사상은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큰 줄기로, 당시 유행했던 화엄경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것이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하나의 불상에서 가장 많은 수량의 화엄경이, 특히 화엄종의 주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에서 발견된 것은 이례적이다.

아미타신앙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외우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즐거움이 가득한 극락에 태어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되었다. 따라서 선종(禪宗)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法相), 천태(天台), 밀교(密敎) 등 각 종파에서 폭넓게 수용하였다. 그래서 주존불을 아미타불로 모시고 법당을 무량수전으로 한 화엄종 사찰인 부석사의 예처럼, 종파를 불문하고 여러 사찰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신앙 경향은 고려로 이어지며 더욱 활발해졌다. 이 불상을 조성했던 아산 취봉사도 화엄종 종파의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에 봉안된 화엄경은 손으로 직접 쓴 필사본(筆寫本)과 목판으로 찍어낸 목판본(木版本)이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진본(晉本, 60권), 주본(周本, 80권), 정원본(貞元本, 40권) 등 번역본도 고루 남아있다. 간행시기도 불상이 조성되기 전인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기에 간행된 것들이 있어 희귀한 자료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4(통일신라 말기).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8 변상도(고려 초기).

 

한 줄로 된 권수제 특이 사례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간행된 것으로 판단되는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4>이다. 경전의 첫 장에는 경전의 이름과 경전의 내용을 알려주는 품제(品題), 경전을 한역(漢譯)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를 본문 앞의 제목이라는 의미로 권수제(卷首題)라고 한다. 이 화엄경은 권수제가 한 줄로 이루어져 있는 특이한 사례이다. 이는 삼성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필사본 경전 <대방광불화엄경>(755년)에도 보이는 이른 시기의 형식이다. 이외에도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8 변상도>의 표지는 짙은 쪽빛으로 염색한 한지를 사용하였고, 경전의 첫 장에는 경전의 이름과 비로자나불이 설법하는 장면이 있는 변상도가 그려져 있어 고려 초기 불화 연구에도 중요하다.

개운사는 1926년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스님이 머물렀고, 암자인 대원암에는 탄허(呑虛)스님이 머물면서 역경(譯經) 사업에 종사해 현대 교육불사를 이끈 도량으로 현재에도 이러한 승가교육의 한 현장이 되고 있다.

만물이 생명을 피워내는 봄날 개운사에 들러 미타전 아미타부처님을 뵙고, 싱그럽고 너그러운 개나리꽃같은 마음으로 나를 벗어나 더 큰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해 보았으면 좋겠다.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ㆍ불교중앙박물관 팀장 [불교신문 37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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