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
황금사찰을 더 빛나게 하는 또 하나의 성보
조성당시 삼존불 주존 복장서
의경세자 극락왕생 발원 사찰
정인사 창건 관련 중요 경전
금속활자로 인출된 금강경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기록만 전하던 밀교대장 등
밀교계통 경전도 다수 발견
옷 직물 연구 중요 자료도
황금사찰 수국사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고려후기, 보물). 복장에서 창건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경전과 다라니 등 중요한 유물이 다수 발견됐다.
서울 서쪽 끝 서오릉 인근에 법당을 금으로 입힌 것으로 유명한 수국사가 있다. 수국사 대웅보전에 햇살이 비칠 때 사찰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여지는 광경을 보면, 과연 서울의 황금사찰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수국사는 세조 5년(1459) 세조의 맏아들 의경(懿敬)세자가 요절하자 고양 봉현(蜂峴)에 장사 지내고, 그의 극락왕생을 위해 능 근처에 정인사(正因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성종 2년(1471)에는 인수대비(仁粹大妃)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행해져서 총 119칸의 대가람이 되었다. 연산군 10년(1504)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몇 번의 중수를 거치며 이름도 수국사(守國寺)로 바뀌었다. 광무 4년(1900)에 월초(月初)스님에 의해 또 한 차례 중창되었다. 이는 고종이 재물을 희사하여 이루어진 불사다. 1898년 당시 세자였던 순종이 병으로 눕게 되자 왕실에서 월초스님에게 백일기도를 부탁했는데, 기도 80일째 되던 날 병이 낫게 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조선 전기 왕실 지원을 받은 원찰로 수국사에는 당시 사세가 상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목조아미타불상이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복장유물과 함께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한국불교조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조성시기의 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복장에서 수습된 불교전적 24점, 다라니 20점 등을 토대로 1239년경 전후에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삼존상 주존불로 조성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104cm로 거의 등신대의 크기이다.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불상은 오른손 손바닥이 바깥을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설법인을 짓고 있다. 머리는 둥근형으로 육계가 크게 표현되어 있으며, 중간 계주가 있다. 얼굴은 통통하고, 상체는 장대하고 당당하다. 무릎 높이는 낮고, 거의 직각의 형태이다. 둥그런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있고, 눈은 반개했으며 눈썹의 선과 연결되어 내려온 코는 작은 편이다. 인중선이 뚜렷하며, 턱과 볼에는 살이 많다.
대의(大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형태로 입었으며, 오른쪽 어깨에는 반달형으로 걸쳐졌다. 왼쪽 어깨는 옷깃과 같은 세 개 주름, 왼쪽 어깨 아래로 팔꿈치까지 촘촘하게 주름진 옷자락은 '오메가' 모양을 하고 흘러내려 오고, 드러낸 발 위로 내려오는 대의의 옷자락 끝단에 나뭇잎 모양을 자연스럽게 새겼다.
홍무22년 원문(願文,1389년).
불상의 복장에서 불상을 조성할 당시의 조성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중수 개금한 시기의 홍무(洪武)22년 원문(願文,1389년), 가정(嘉靖)42년 개금기(1562년) 발원문, 후령통과 사리, 불교 전적 17종, 다라니 등 중요한 복장품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중수발원문에는 기록한 연대가 있어 불상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홍무22년 개금기에 따르면 아미타불 외에도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개금 내용도 있어 본래 삼존으로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7월22일 개금을 시작하여 각각 소요된 금의 양을 적는 등 당시 개금불사의 장면을 보여준다. 화주(化主)는 지식행(智識幸)이며, 개성 영성군부인(寧城郡夫人) 신씨가 시주하였다.
다음은 가정(嘉靖)42년 원문과 발원문(1562년)으로, 하나는 개금중수 당시 시주자였던 신사지(愼思智)의 발원문이다. 살아계시고 돌아가신 부모와 자손들 모두 함께 정토에 태어나 불법(佛法)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칠보(七寶)와 안양(安養), 즉 극락에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원문으로 당시 무량수불 개금으로 니금 두 돈이 소요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1차 중수와 달리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등장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2차 중수 당시에는 이미 두 보살이 사라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준 시주 다라니(1239년).
문하시중 지낸 철원최씨 가문 참여
이외에도 이 불상의 복장에서는 고려시대 다라니가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 기해십월일 시중 최종준(一切如來全身舍利眞言 己亥十月日 侍中 崔宗峻)이라고 창건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의 다라니는 중요하다. 기해년 10월 시중 최종준의 시주로 다라니 불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최종준(?~1246)은 최유청(崔惟淸, 1095~1174)의 손자로 대몽항쟁 기간이었던 고종(高宗) 재위 시에 15년간 고려 무신정권 당시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이었다. 이 다라니를 통해 무신정권 기간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철원 최씨 가문이 1239년에 이 불상의 조성에 참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소개 판본, 유일본 경전 주목
또한 발견된 경전에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판단되는 불경이 모두 6종 7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처음 소개되는 판본과 유일본이 많아 그 가치가 크다.
이 가운데 특히 세 점의 전적이 주목된다. 첫 번째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1457년)>으로 수국사 아미타불 복장에서 발견된 판본 중 유일하게 금속활자로 인출된 경전이다. 이 책은 세조가 1457년 요절한 의경세자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본인이 큰 글자의 자본을 직접 써서 주성한 정축자(丁丑字)로 경문을 대자로 찍고, 오가의 주해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었다. 권말에는 세조의 발문을 비롯하여, 김수온, 한명회, 조석문, 임원준 등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어 이 책의 간행경위를 알 수 있다. 의경세자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창건된 정인사의 창건 역사와도 관련되는 중요한 경전이다.
두 번째는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羅尼經)>이다. 석가여래께서 이 경을 서사하고 독송하면 아픈 아이도 병이 낫게 되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49일 내에 이 경을 향을 사르고 공양하면 현세에서 장수하게 되고 악도(惡道)의 고통을 잊게 된다는 내용을 문수사리보살에게 설법한 경전이다. 이 책은 권말에 복위 황제폐하낸낸억재(伏爲 皇帝陛下낸낸億載)라는 축원문이 있어 원 간섭기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표지에는 성인시납(性仁施納)이라는 묵서명이 있는데, 성인은 심원사 스님으로 1562년 불상 중수 당시 불상의 중수를 주관했던 인물이다.
다양한 색깔의 비단 보자기.
마지막으로 밀교대장 권9(密敎大藏 卷9, 고려 1389년)이다. <밀교대장>은 그동안 고려 충숙왕 이전에 90권본이 간행되었다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서문과 조선 세종 23년(1424)에 왜인에게 밀교대장경판과 주화엄경판을 보내주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만 있을 뿐 실물은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국사 아미타불 복장에서 밀교대장이 처음으로 발견되어 그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수국사 아미타불 복장의 고려본 경전 중에는 밀교대장 외에도 <지천경(支天經)> 등 밀교 계통 경전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고려후기 밀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서지, 전적 외에도 모시저고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색깔의 비단 보자기와 직물 등이 납입되어 있어, 옷과 직물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교에서 부처님이 계신 법당을 금당(金堂)이라고 한다. 이는 법당이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넓은 의미의 부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이 완연한 4월이 가기 전에 황금사찰 수국사에 들러, 아미타부처님께 예배하고 황금처럼 빛나고 굳건한 마음을 다시 잡아보길 바란다.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ㆍ불교중앙박물관 팀장 [불교신문 37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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