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景宗)
경종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景宗 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의 휘는 주(伷)이고 자는 장민(長民)이며 광종(光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광종 6년(955) 을묘(乙卯) 9월 정사(丁巳)에 태어나 16년(965)에 태자(太子)가 되었고, 26년(975) 5월 갑오(甲午)에 광종(光宗)이 훙서(薨)하자 왕으로 즉위하였다. 대사면령을 내려 유배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였고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억울하게 연루된 이들의 죄를 씻어 주었다.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던 이들을 발탁하고 관작(官爵)을 복귀시켰으며, 부채[欠債]를 덜어주고 조세(租稅)와 공납(貢納)을 줄였다. 임시 감옥을 헐고 참소(讒訴)하는 글을 불살랐다.
겨울 10월 갑자(甲子). 정승(政丞) 김부(金傅)에게 더하여 상보(尙父)로 삼고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희씨(姬氏)의 주(周)는 성스러움을 연 처음에 먼저 여망(呂望)을 봉(封)하였고, 유씨(劉氏)의 한(漢)은 왕업(王業)을 일으킨 시초에 먼저 소하(蕭何)를 책봉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평정되고 왕업(王業)의 기초가 널리 열려, 왕위[龍圖]는 20대까지 전하고 국운[麟趾]이 400년이나 유지되었습니다. 해와 달이 거듭 밝아지고 하늘과 땅의 사귐이 크니, 비록 스스로는 무위(無爲)의 군주이나 역시 이치에 이르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식읍(食邑) 8,000호 김부(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면서 관직은 왕위를 이었으며, 뛰어난 공훈은 구름을 능가하는 기상을 떨치고 문장(文章)은 땅에 던져 재주를 드날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영토[茅土]는 귀한 곳에 있고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가슴에 품었으며, 자유자재로 적과의 승부를 가려[七縱五申] 잡고 돌이킴이 손바닥 가리키듯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처음 이웃과 화목하는 우호(友好)를 닦으면서 일찍이 여풍(餘風)을 인정하고 이어 부마(駙馬)의 인연을 맺어 안으로 큰 절의(節義)에 보답하였습니다. 나라가 이미 일통(一統)에 돌아오고 군신(君臣)이 삼한(三韓)에 완연히 합쳤는데, 아름다운 이름을 드러내 뿌리고 올바른 규범을 빛내고 높이고자 상보 도성령(尙父 都省令)의 호(號)를 더하고,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며 훈봉(勳封)은 전과 같이 하고 식읍(食邑)은 전과 합쳐 10,000호로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달에 6대의 조상에게 존호를 더하였다.
원년(976) 여름 6월 경신(庚申). 황주원(黃州院)의 두 낭군(郞君)이 아울러 관례[元服]를 행하고, 원(院)의 이름을 고쳐 명복궁(明福宮)이라 하였다.
겨울 11월 송(宋)에서 좌사어부솔(左司禦副率) 우연초(于延超)와 사농시승(司農寺丞) 서소문(徐昭文)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여 광록대부 검교태부 사지절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 대순군사(光祿大夫 檢校大傅 使持節玄菟州諸軍事 玄菟州都督 大順軍事)로 삼고 식읍(食邑) 3,000호를 주었다.
송(宋)에 사신(使臣)을 보내 황제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집정(執政) 왕선(王詵)을 지방으로 추방하였다. 왕이 일찍이 선대 임금 때 참소(讒訴)를 당했던 사람의 자손이 복수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드디어 서로 멋대로 죽이는 바람에 다시 억울하다고 부르짖는 데에 이르렀다. 이때에 왕선(王詵)이 복수를 핑계 삼아 속임수로 태조(太祖)의 아들 천안부원낭군(天安府院郞君)을 죽이자, 이에 왕선(王詵)을 쫓아내고 아울러 멋대로 죽여 복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순질(荀質)과 신질(申質)을 좌우집정(左右執政)으로 삼아 모두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고, 원보(元甫) 수여(壽餘)를 근신(近臣)인 지어주사(知御廚事)로 삼았다.
처음으로 각 품(品)의 전시과(田柴科)를 정하였다.
이 해 송(宋)에 김행성(金行成)을 보내 국자감(國子監)에 입학시켰다.
2년(977) 봄 3월 왕이 동쪽 연못에 있는 용선(龍船)에 나아가 앉아 친히 진사시(進士試)를 주관하고, 고응(高凝)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이 해 송(宋)에 왕자를 보내 좋은 말과 갑옷, 병기(兵器)를 바쳤다.
3년(978) 여름 4월 정승(政丞) 김부(金傅)가 죽으니,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송(宋)에서 태자중윤(太子中允) 장계(張洎)를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4년(979) 봄 3월 원징연(元徵衍)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여름 6월 송(宋)에서 공봉관 합문지후(供奉官 閤門祗候) 왕선(王僎)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여 시중(侍中)으로 삼고 식읍(食邑) 1,000호를 더하였다
이 해 발해인(渤海人) 수만 명이 내투(來投)하였다.
5년(980) 최지몽(崔知夢)을 내의령(內議令)으로 삼았다.
왕승(王承) 등이 반역(叛逆)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6년(981) 여름 6월 왕이 편찮았다.
가을 7월 왕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갑진(甲辰). 당제(堂弟)인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를 불러 왕위를 물려주고 유조(遺詔)를 내려 말하기를,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현명하고 똑똑한 이라도 도망가기 어려우며, 혹 짧거나 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같다. 내가 앞선 4대 왕의 위업을 잇고 삼한(三韓)을 다스릴 패도(覇圖)를 받아 산천과 토지를 보전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안정시키느라 나날이 삼가는 하루가 앞뒤로 7년간이었다. 이 부지런한 노고로 인하여 드디어 병이 생겼으니, 바라건대 이제는 무거운 짐을 벗어 정신을 편히 하고 장차 왕위를 전함으로써 근심을 풀까 한다.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는 나라의 어진 종친(宗親)이고 내가 우애(友愛)하는 바니,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국가의 창성(昌盛)할 기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아! 너희 공경(公卿)과 재신(宰臣)은 나의 큰 동생을 공경하고 지켜서 길이 우리 큰 나라를 편안하게 하라. 내가 매번『예경(禮經)』을 볼 때마다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글을 보며 탄식하고 하늘을 우러르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오늘에 이르러 좌우의 궁녀[嬪御]를 다 막고 물러가게 하였다. 혹시 더 이상 잇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음의 때가 이르더라도 다시 무슨 한탄할 바가 있겠는가? 상복을 입는 기한의 경중(輕重)은 한제(漢制)에 합치됨에 의거하여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해[以日易月] 13일 만에 주상(周祥)을 지내고 27일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며, 원릉(園陵)의 제도는 검약함을 힘써 따르도록 하라. 서경(西京)·안동(安東)·안남(安南)·등주(登州) 등의 여러 도(道)에서 진수(鎭守)의 임무를 받아서 군대를 거느리는 권한이 있는 자는 맡은 바가 가볍지 않으니 어찌 마땅히 잠시라도 비울 수 있겠는가? 맡은 곳을 떠나 궁궐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임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흘 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그 나머지는 모두 다음 임금의 처분에 맡긴다.”라고 하였다.
병오(丙午). 왕이 정전(正殿)에서 훙서(薨)하니, 왕위에 있은지 6년이고 나이 26세였다. 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착하며 어질고 은혜로웠으며 유희는 즐기지 않았다. 말년에는 정치를 싫어하고 게을러져, 날마다 오락을 일삼고 성색(聲色)에 빠져들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小人)을 가까이 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니, 이로 말미암아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하였다. 시호(諡號)를 헌화(獻和)라 하고 묘호(廟號)를 경종(景宗)이라 하였으며, 개경(開京) 남쪽의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영릉(榮陵)이라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성목(成穆)을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명혜(明惠)를 더하였으며, 18년(1027)에 순희(順熙)를 더하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정효(靖孝)를 덧붙였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 공의(恭懿)를 더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贊)하기를,
“등문공(滕文公)이 맹자(孟子)에게 정지(井地)에 관하여 묻자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어진 정치는 반드시 땅의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되니, 경계(經界)가 바르지 않으면 정지(井地)가 고르지 못하고 관리들의 녹봉(祿俸)도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폭군(暴君)과 오리(汚吏)는 반드시 그 경계(經界)를 소홀히 하였다. 경계(經界)가 이미 바르다면 토지를 나누고 녹봉(祿俸)을 정하는 일은 앉아서 정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한(三韓)의 땅은 사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므로, 물산(物産)의 풍족함이나 식화(殖貨)의 이익이 없으니 민생(民生)이 쳐다보는 바는 다만 땅의 힘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압록강(鴨綠江) 이남은 대저 모두가 산이므로 해마다 작물을 심을 수 있는 기름진 토지[不易之田]가 전혀 없고 겨우 조금 있으니, 경계를 정함이 만약 소홀하다면 그 이해(利害)는 중국(中國)에 비하여 그 차이가 만 배는 될 것이다. 태조(太祖)는 쇠약하고 어지러운 신라(新羅)와 사치하고 강포(强暴)한 태봉(泰封)의 뒤를 이어 나라를 세웠으니, 모든 일이 처음 이룩하는 것이었고 하루도 넉넉한 겨를이 없어 다만 구분(口分)의 법만을 만드는 데 그쳤다. 그 후 4대를 거쳐 경종(景宗)이 전시과(田柴科)를 만들었으니, 비록 소략(疎略)함이 있으나 또한 옛날 세록(世祿)의 뜻인 것이다. 생산물의 9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둘 것인가[助], 혹은 10분의 1을 거둘 것인가[賦] 하는 것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를 넉넉하게 만들 방법 같은 데 이르러서는 겨를이 없어 논하지 못하였다. 후세에 여러 번 이를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구차하게 그칠 뿐이었다. 대개 그 처음에 경계(經界)를 바로 잡는 일을 급하다 여기지 않았으니, 그 근원을 어지럽히고서 물줄기의 맑음을 구한들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당시의 여러 신하가 맹자(孟子)의 말을 익혀 법제(法制)를 구하고 사람들을 깨우쳐서 힘써 행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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