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惠宗)
혜종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惠宗 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의 휘는 무(武)이고 자는 승건(承乾)이며, 태조(太祖)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912) 임신(壬申)에 태어나 태조(太祖) 4년(921) 정윤(正胤)이 되고,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종군(從軍)하여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공이 제일(第一)로 되었다. 26년(943) 5월 병오(丙午) 태조(太祖)가 훙서(薨)하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였다.
6월 임신(壬申) 태조(太祖)를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
원년(元年, 944) 후진(後晋)에 광평시랑(廣評侍郞) 한현규(韓玄珪)와 예빈경(禮賓卿) 김렴(金廉)을 보내 새 왕의 등극을 알리고, 드디어 거란(契丹)을 격파한 것을 하례하였다.
겨울 12월 한림원령(翰林院令) 평장사(平章事) 최언위(崔彦撝)가 죽었다.
2년(945) 후진(後晋)에서 범광정(范匡政)과 장계응(張季凝)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였다.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아뢴 바를 살펴보고, 선친[先臣]의 유언[遺命]과 관리들의 추대와 요청으로 권지국사(權知國事)의 일을 맡은 것을 잘 알았다. 귀국[圭茅]에 경사가 거듭되고 마음으로 충효(忠孝)를 행하여 일찍부터 일을 잘 처리할 재능이 있다는 명성을 날렸으며[幹蠱之名], 선대의 위업을 이은 훌륭한 자손[象賢]이라는 칭송이 현저하였다. 마땅히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여론에 깊이 부합하여, 부왕이 아들을 알아보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보여주고 후손이 가문을 잘 이어나가는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하라. 멀리로부터 글월을 올려 더욱 정성을 크게 표하였으니, 기쁘고 안심하는 마음을 자나 깨나 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또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경(卿)은 재주와 지략이 빛나고 기이하며 기개[規模]가 세속의 으뜸이고, 순식(荀息)과 같은 충정(忠貞)을 자부하고 윤옹귀(尹翁歸)처럼 문무(文武)의 재능을 아울러 갖추었다. 매가 눈을 부라리며 수리가 우뚝 선 듯한 자세로 만 리에 걸쳐 적을 막아냈으며, 넉넉하고 성대한 온정으로 온 나라를 교화로 윤택하게 하였다. 또한 존숭하고 돕는 정성이 깊으며, 공물(貢物)을 보내 예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강일(剛日)에 밝은 은혜를 내려, 마땅히 당대에 걸출한 인물[命世之英]을 표창하고 진왕(眞王)의 반열로 높이며, 아름다운 절의를 표창하여 높은 품계에 올린다.
그대를 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 충대의군사(持節 玄菟州都督 上柱國 充大義軍使)로 삼고 전과 같이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한다. 이제 정사(正使) 광록경(光祿卿) 범광정(范匡政)과 부사(副使) 태자세마(太子洗馬) 장계응(張季凝) 등에게 명하여 그곳으로 가서 관고(官告)와 칙첩(勅牒)·국신물(國信物) 등을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어 하사한다.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칙사(勅賜)하는 죽책(竹冊)과 법물(法物) 등의 물건. 죽책 1부 80간(簡), 자줏빛 실로 끈을 꼬아 잇고 붉은 비단으로 거죽을 입힌 책갑(冊匣) 1개, 검게 옻칠하고 은을 박아 넣은 금동 자물쇠(金銅鏁鑰) 2개, 고리 무늬가 들어간 붉은 비단으로 안감을 댄 책문(冊文) 2폭, 황색 능직으로 만든 머리띠(帕) 1개, 책갑 뚜껑 3폭, 황색 능직으로 만든 머리띠 1개, 책갑 뚜껑 3폭, 황색 견(絹)에 기름을 먹인 머리띠 1개, 자줏빛 숙사(熟絲)로 만든 책 상자판 2개, 책상을 두르는 자줏빛 숙사에 기름을 먹여 그림을 그린 첨상(檐床) 1장, 다리를 은으로 싸고 모서리와 끝을 금으로 두른 잣나무 책상 1개, 자줏빛 능으로 만든 책상보 1장, 자줏빛 능직에 테두리를 둘러 모든 일을 하는 데 쓰는 방석 1개, 책상 앞에 놓는 자줏빛 능 방석 1개.”라고 하였다.
또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이르기를,
“아뢴 바를 살펴보고 사은(謝恩)의 뜻을 보낸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해·달·용·봉황을 직조(織造)해 넣은 겹옷 2매,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용을 직조해 넣은 상보(床褓) 2개, 금별을 붙인 가죽 갑옷 2개, 계금(罽錦)에 은별을 붙인 가죽 갑옷 2개, 계금을 붙이고 두드린 쇠로 만든 투구 4개, 붉은 계금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꽃과 새를 직조해 넣은 계금 한과(捍胯) 4개, 각궁(角弓) 4개,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용과 물고기를 직조해 넣은 계금 활주머니 4개, 대로 만든 화살 200개 중 100개는 금을 입히고 100개는 은을 입힌 것, 나무로 만든 화살 200개,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구름과 용을 직조해 넣은 화살통 4개, 금과 은으로 칼자루와 칼집을 꾸미고 구름과 하늘을 정교하게 새긴 옥검(玉劍) 10자루, 그 중 2자루는 금은으로 꾸미고 계금으로 만든 칼집, 금은으로 장식하고 계금으로 만든 칼집에 구름과 하늘을 정교하게 새긴 장도(長刀) 10자루, 금은으로 감싼 창 10개, 금은으로 꾸미고 계금으로 만든 칼집에 넣은 비수(匕首) 10자루, 금은으로 장식한 칼집에 넣은 비수 10자루, 가는 모시 100필, 흰 모직물 200필, 가늘게 싼 삼베 300필 등은 잘 받았다.
경(卿)은 대대로 충정(忠貞)이 도탑고 대를 잇는 훈벌(勳閥)로서, 이제 왕위를 이어받는 초기에 멀리까지 공물을 바치는 의례를 받들었다. 무늬를 놓은 비단이 스스로 문장(文章)을 이루니, 동화포(橦華布)보다 귀하며 상자에 넣어 보낸 공물은 모두 진기하다. 또 병기는 예리하고 갑옷은 아름다워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노력을 기울였음을 증명할 수 있다. 가상히 여기고 칭찬함이 깊은 바, 두 번 세 번 해도 그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또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이르기를,
“아뢴 바를 살펴보고, 진헌한 금은(金銀)으로 꾸민 형구 6개, 계금(罽錦)으로 만든 칼집에 금은으로 꾸민 칼 6자루, 금은으로 꾸미고 계금(罽錦)으로 만든 칼집에 넣은 장도 10자루,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꽃과 새를 직조(織造)해 넣은 계금(罽錦) 한과(捍胯) 2개,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꽃과 새를 직조(織造)해 넣은 계금(罽錦) 등받이 2개,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꽃과 새를 직조(織造)해 넣은 계금(罽錦) 치마용 허리띠 6개, 붉은 바탕에 금실·은실·오색실로 직조(織造)해 넣은 계금(罽錦) 칼집에 금은으로 장식한 비수(匕首) 10자루, 도금한 매 방울 20개, 은 자물쇠가 달린 선자(鏇子)에 오색 끈을 달고 은 미동(尾銅)에 전체를 도금한 새매 방울 20개, 은 자물쇠 미동에 전체를 가늘게 짠 흰 모직물 100필, 가는 실로 짠 중급 삼베 100필, 인삼 50근, 머리털 20근, 금은 바탕에 무늬를 놓은 가위 10매, 금은으로 가느다란 무늬를 넣은 가위 20매, 금은으로 가느다란 무늬를 넣은 수염 자르는 가위 10매, 은으로 꽃무늬를 가늘게 넣은 가위 20매, 금은으로 덧 마구리를 한 큰 칼 30자루, 은으로 덧 마구리를 한 큰 칼 40자루, 금은으로 덧 마구리를 한 중간 칼 50자루, 은으로 덧 마구리를 한 중간 칼 50자루, 금은으로 덧 마구리를 한 작은 칼 50자루, 은으로 덧 마구리를 한 작은 칼 100자루, 금은으로 가느다란 무늬를 넣은 별화겸(撇火鎌) 20매, 금은으로 세공한 겸자(鉗子) 20매, 향유(香油) 50근, 잣 500근 등을 모두 잘 받았다.
경(卿)의 땅은 동쪽 바닷가에 있으나 마음은 북궐(北闕)을 향하고 있어, 9구(九丘)를 받들어 공물(貢物)을 마련하여 만리(萬里)를 달려와 입조(入朝)하였다. 무기는 단단하고 직조한 무늬는 아름답고 고우며, 모시와 삼베는 눈처럼 희고 약에 이르러서는 신통하기까지 하다. 머리꾸미개와 장난감은 기이하며, 향유와 과실류는 명품이 이미 많은데 벌려 놓으니 아주 많아 몸소 살펴보면서 참으로 극진히 칭찬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이르기를,
“올려온 표문(表文)을 살펴보고, 지난해 3월 1일에 내가 친히 전주(澶州)로 가서 거란(契丹)을 무찌른 일을 하례하였음을 잘 알았다. 짐(朕)은 거란(契丹)이 신의(信義)를 크게 어기고 여러 번 침략하였기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걸(傑)과 같은 오랑캐(虜)를 평정하였다. 우리의 영기(靈旗)를 한 번 들자 광분한 적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경(卿)이 멀리서 대첩(大捷)의 소식을 듣고 자못 분기(憤氣)를 펼쳐 장표(章表)를 보내 우리 조정에 축하를 하였으니,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마음에 두고 잊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왕의 동생 왕요(王堯)와 왕소(王昭)를 참소(讒訴)하였으나 왕이 무고(誣告)임을 알고 은우(恩遇)가 더욱 두터워졌다. 왕규(王規)가 또 자신의 무리에게 벽에 구멍을 뚫고 왕의 침전(寢殿)에 들어가 난을 일으킬 것을 꾀하였으나, 왕은 거처를 옮겨 피하였을 뿐이고 그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하였지만 여러 신하가 들어가 뵐 수 없었고, 간사한 소인(小人)들이 늘 곁에 모시고 있었다.
무신(戊申). 왕이 중광전(重光殿)에서 훙서(薨)하니, 왕위에 있은 지 2년이고 나이는 34세였다. 왕은 도량이 넓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으나, 왕규(王規)가 반역을 꾀한 뒤로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져 늘 갑사(甲士)들로 자신을 지키게 하였다. 희로(喜怒)를 절제하지 못하여 여러 소인(小人)이 아울러 나아갔으며, 장사(將士)에게 상을 내리는 것에는 절제함이 없어서 안팎에서 탄식하고 원망하였다. 시호(諡號)를 의공(義恭)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혜종(惠宗)이라 하였으며, 송악산(松嶽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순릉(順陵)이라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명효(明孝)를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선현(宣顯)을 덧붙였으며, 18년(1027)에 고평(高平)을 덧붙였고, 고종(高宗) 40년(1253)에 경헌(景憲)을 덧붙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贊)하기를,
“우보(羽父)가 환공(桓公)을 죽이자고 요청한 것은 장차 태재(太宰) 자리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은공(隱公)이 듣지 않았지만 또한 죽이지도 않았다. 끝내 위씨(蔿氏)의 화를 만나게 되었다. 왕규(王規)가 두 왕제(王弟)를 참소(讒訴)한 것도 우보(羽父)의 뜻과 같았다. 혜종(惠宗)은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좌우에 있게 두었으니, 소매 속에 칼을 감추고 벽에 숨은 사람의 꾀함을 면한 것이 다행이라 이를 만하다. 이때는 태조(太祖)가 세상을 버리고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왕규(王規)의 불의(不義)로도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으니, 이는 한(漢)의 조비(曹丕)나 위(魏)의 사마염(司馬炎)과 같다 할 수 있겠구나! 그럼에도 그를 유배(流配)보내거나 죽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아! 소인(小人)을 멀리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상사는 이야기 > 고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가(世家) 광종(光宗) (0) | 2022.09.24 |
---|---|
세가(世家) 정종(定宗) (0) | 2022.09.19 |
세가(世家) 태조(太祖) 21년~26년 (0) | 2022.09.13 |
세가(世家) 태조(太祖) 19년~20년 (0) | 2022.09.08 |
세가(世家) 태조(太祖) 17년~18년 (0) | 2022.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