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1(明宗一) 3

〈계사〉 3년(1173) 봄 정월 을축. 초하루 〈왕이〉 경령전(景靈殿)을 배알하였다.

신미. 백관(百官)이 〈정월 7일인〉 인일(人日)을 하례하였으므로 인승녹패(人勝祿牌)를 하사하였다.

무인. 〈백관이〉 입춘(立春)을 하례하자 〈왕이〉 춘번자(春幡子)를 하사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전례(前例)를 따른 것이다. 연등회(燃燈)가 있었으므로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기축. 명인전(明仁殿)에서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었다.

윤정월 경자. 예빈소경(禮賓少卿) 권광필(權光弼)을 금(金)에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부소경(大府少卿) 이응구(李應球)는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을사. 내전(內殿)에서 존승법회(尊勝法會)를 열었다.

박육화(朴育和)를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로 삼았다.

기유.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여 나한재(羅漢齋)를 지냈다.

2월 갑술.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여 반승(飯僧)하였다.

무자.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을 열었다.

경인. 〈왕이〉 대명궁(大明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묘. 인종의 기일[忌辰]이므로 낙빈정(樂賓亭)에서 반승(飯僧)하였다.

3월 계사. 초하루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기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여름 4월 을축. 〈왕이〉 태묘(大廟)에서 친히 체제(禘祭)를 지냈다. 왕지(王旨)를 내려 말하기를,
“과인이 박덕한 몸으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아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노라. 조상을 받들고 효(孝)를 생각하여 몸소 체례(禘禮)를 거행하고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냈으니 온 나라에 은택을 널리 베풀려고 한다. 그러나 근자에 원자(元子)를 책봉했으므로 마땅히 큰 은택을 베풀어야 할 터이므로, 이에 체사(禘祀)를 지낼 때와 3릉[三陵]을 참배할 때 집사자(執事者)들과 전국의 옥에 갇혀 고초를 당한 자들에게 은택을 베풀고자 한다. 공사범으로 도형(徒刑), 민사범으로 장형(杖刑) 이하의 죄수 및 속동(贖銅)·징와(徵瓦)에 해당하는 죄는 모두 면제하라. 무릇 체례와 3릉 배알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물품을 하사하라.”
라고 하였다.

임신. 내전(內殿)에서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자. 무당을 모아 비를 빌고, 가까운 신하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산천의 신령[群望]에게 비를 빌게 하였다. 이때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냇물과 우물이 모두 말랐고, 벼와 보리가 말랐으며 전염병[疾疫]도 따라서 발생하였다. 굶어죽는 자가 많았으며 인육(人肉)을 거래하는 자들이 생기기까지 이르렀다. 또 화재가 많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크게 근심하고 한탄하였다.

경진. 양부(兩府)의 재추(宰樞)가 보제사(普濟寺)에서 비를 빌었다.

신사.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정중부(鄭仲夫)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윤인첨(尹鱗瞻)에게 명하여 원자(元子) 왕숙(王璹)을 왕태자(王太子)로 책봉하게 하였다.

정해. 왕의 장녀를 연희궁공주(延禧宮公主)로, 둘째 딸을 수안궁공주(壽安宮公主)로 책봉하였다.

무자.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재추(宰樞)가 신중원(神衆院)에서 비를 빌었다.

5월 임진. 초하루 일식이 일어났다.

병신. 단오(端午)였으므로 경령전(景靈殿)을 배알하였다.

갑진. 문무(文武) 3품관에게서 녹봉(祿俸)을 추렴하여 재(齋)를 올리고 보제사(普濟寺)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6월 임술.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갑신. 송(宋)에서 서덕영(徐德榮)을 보내왔다.

무자. 최시행(崔時幸)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가을 7월 신해. 명인전(明仁殿)에서 본명성(本命星)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8월 을해. 〈왕이〉 경령전(景靈殿)을 배알하였다.

정해. 〈왕이〉 대명궁(大明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진.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東北面兵馬使 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군대를 일으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토벌하고 전왕(前王)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이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였으며, 장순석(張純錫) 등으로 하여금 거제(巨濟)에 이르러 전왕(前王)을 받들어 계림(雞林)으로 나와 거처하게 하였다.

9월 정유. 한언국(韓彦國)을 잡아 죽였다.

계묘.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서 김보당(金甫當) 등을 체포하여 〈서울로〉 보내니, 이의방(李義方)이 그들을 저자에서 죽였다. 무릇 문신(文臣)은 전부 살해하였다.

정사. 경주에 사는 사람들이 전왕(前王)을 객사(客舍)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시켜서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경신/ 초하루 이의민(李義旼)이 전왕(前王)을 데리고 나가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 도착하여 술을 몇 잔 올린 뒤에 마침내 시해하였다. 처음에 전왕(前王)이 금(金)의 사신을 위해 잔치를 열었었는데, 사신이 좌승선(左承宣) 김돈중(金敦中)을 보더니 행사를 진행하던 관리[執禮]에게 “저기 얼굴이 희고 체격이 큰 사람은 귀인이고 글을 잘하는데,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름은 돈중(敦中)이며, 상국(相國)인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입니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금 사신이 말하기를, “과연 그렇군요.”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사신에게 “과인의 수명은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청하자 금 사신이 “국왕의 수명은 길어서 셀 수 없습니다. 지금 조정에 가득한 늙고 젊은 신하들이 모두 죽은 뒤에 왕에게는 냇가 옆의 화[臨川之患]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자신은 반드시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하여 냇가 옆의 화가 무엇인지는 다시 묻지 않았다. 경인년·계사년의 난리(庚癸之亂. 1170년, 1173년) 때 늙고 젊은 문신이 모두 살해되고 왕도 연못가에서 변을 당했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임술. 〈왕이〉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3경(三京)·4도호(四都護)·8목(八牧)으로부터 군(郡)·현(縣)·관(館)·역(驛)의 관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신[武人]을 등용하라.”고 하였다.

무인. 숭문전(崇文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을유.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11월 정유. 내시낭중(內侍郞中) 최균(崔均)을 금(金)에 보내어 새해를 하례하였다.

기해. 태자(太子)를 책봉하였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계묘.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