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2(文宗二) 14년~15년

 

〈경자〉 14년(1060) 봄 정월 신묘.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계축. 문덕전(文德殿)에서 7일 동안 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을 열었다.

2월 계해.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갔다.

갑술.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3월 정사. 이정공(李靖恭)을 시어사(侍御史)로 삼았다.

여름 4월 기미. 왕총지(王寵之)를 수태위(守太尉)로, 김원정(金元鼎)을 수사도(守司徒)로, 김현(金顯)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하였다.

5월 갑오. 왕이 친히 구정(毬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6월 경오. 김의진(金義珍)을 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로, 양국정(楊國楨)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을사. 송(宋) 상인 황조(黃助) 등 3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계축. 동남해선병도부서(東南海船兵都部署)에서 아뢰기를,

“대마도(對馬島)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풍랑으로 표류해 간 예성강(禮成江) 백성 위효남(位孝男)을 돌려보내 왔습니다.”

라고 하자, 왕이 그 사자(使者)에게 예물을 후하게 하사하였다.

8월 무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억울한 죄수가 있어 화기(和氣)를 상했는지 염려되므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박충(朴忠)‧좌부승선(左副承宣) 강원광(姜源廣)‧좌습유(左拾遺) 최석(崔錫)‧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조옥(曹玉) 등에게 죄수를 재심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

계해. 송(宋) 상인 서의(徐意) 등 3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을해. 송(宋) 상인 황원재(黃元載) 등 4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9월 무술.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아린(阿藺) 등 1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계묘. 송(宋) 진사(進士) 노인(盧寅)이 글재주가 있으므로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였다.

을사. 이유충(異惟忠)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삼았다.

계축. 죄수를 재심하였다.

겨울 11월 경인. 거란(契丹)에서 선사사(宣賜使)로 고주관내관찰사(高州管內觀察使) 소오(蕭奧)가 왔다.

무술.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동여진(東女眞)의 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 아가주(阿家主) 등 37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2월 병진. 초하루 거란(契丹)에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야율렬(耶律烈)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갑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 화재가 나서 회경전(會慶殿)의 동남쪽 행랑까지 연소되었다.

〈신축〉 15년(1061) 봄 정월 무자.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보였다.

계축. 이유충(異惟忠)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김화숭(金化崇)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무숭(王懋崇)을 호부상서 판어사대사(戶部尙書 判御史臺事)로, 김원황(金元晃)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임명하였다.

2월 신유. 임종일(任從一)을 상서좌복야 중추사(尙書左僕射 中樞使)로 삼았다.

계미.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형정(刑政)은 제왕의 덕화[王化]로는 첫째가 되니, 준엄하면 백성이 해를 당하고 관대하면 백성이 태만해진다. 형벌이 중도(中道)를 얻으면 음양이 조화롭고 기후가 순조로우나, 법이 그 마땅함을 잃으면 원망의 기운이 쌓이고 재앙이 생긴다. 포악한 신하와 혹독한 관리는 세상에 항상 있으므로 내가 선대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전형(典刑)을 신중하게 삼가고 있으나, 매양 신하가 포악하고 관리가 혹독하여 적중(適中)함을 얻지 못하였다. 이제부터 형부[秋部]의 관원을 엄정하게 선택하고 위임하여 억울한 옥사가 없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3월 임진. 최순한(崔順漢)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정층(鄭層)을 섭공부상서(攝工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정유. 지난 해 문하성(門下省)에 숙직하던 날에 화재가 있었으므로, 참지정사(叅知政事) 김현(金顯)을 좌복야(左僕射)로,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최원준(崔爰俊)도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강등하였다.

기유. 나계함(羅繼含) 등을 급제시켰다.

여름 4월 병진. 거란(契丹)에서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소수사(蕭嗽思)가 왔다.

갑술. 장중영(張仲英)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삼았다.

6월 계축.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그 길로 국자감(國子監)에 거둥하여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공자[仲尼]는 모든 군왕의 스승이니 감히 공경을 다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고, 드디어 왕이 두 차례 절하였다.

정사. 송(宋) 진사(進士) 진위(陳渭)를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으로, 소정(蕭鼎)과 소천(蕭遷)을 합문승지(閤門承旨)로, 엽성(葉盛)을 전전승지(殿前丞旨)로 임명하였다. 진위는 문예에 재능이 있고, 소정 등 3인은 음률에 밝았다.

기묘. 왕의 아우 내사령(內史令) 왕기(王基)의 관직을 고쳐서 중서령(中書令)으로 삼고, 그 나머지도 일찍이 내사(內史) 〈관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중서(中書)로 고쳤다.

가을 8월 임자.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정주(定州) 별장(別將) 경보(耿甫)가 20여 인을 거느리고 적을 정탐하다가, 갑자기 적의 괴수 아하비(阿下費) 등 200여 인을 만나 싸워서 이를 패퇴시키고 10여 명을 목 베었습니다. 그 공로를 표창하시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김행경(金行瓊)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무진. 최유선(崔惟善)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로 삼았다.

병자, 송(宋) 상인 곽만(郭滿)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윤8월 신사. 초하루 태묘(大廟)에서 고삭(告朔) 의식을 치렀다.

9월 정묘.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적의 추장(酋長) 아라불(阿羅弗) 등이 변경을 침범하여 변방 백성을 약탈하므로, 평로진병마녹사(平虜鎭兵馬錄事) 강영(康瑩)과 서북면병마녹사(西北面兵馬錄事) 고경인(高慶仁)이 병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항마진(降魔鎭)까지 이르러 적을 격퇴하고 수십 명을 목 베고 사로잡았으며 병기(兵器)도 많이 노획하였으므로, 포상(褒賞)함을 보이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무인. 임종일(任從一)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왕무숭(王懋崇)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정미. 한공서(韓功敘)를 검교사공 수상서좌복야(檢校司空 守尙書左僕射)로 임명하였다.

11월 경술. 초하루 최유부(崔有孚)와 김양(金陽)을 태자좌‧우서자(太子左右庶子)로, 최상(崔尙)과 이유적(李攸績)을 좌‧우유덕(左右諭德)으로, 박충(朴忠)을 중윤(中允)으로, 정공지(鄭功志)와 황항지(黃抗之)를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로 임명하였다.

신미. 최유선(崔惟善)을 참지정사 권판한림원사(叅知政事 權判翰林院事)로 임명하였다.

12월 경진. 초하루 거란(契丹)에서 검교태부 영주자사(檢校太傅 寧州刺史) 소술(蕭述)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병신.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로, 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최유선(崔惟善)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이유충(異惟忠)을 참지정사 주국(叅知政事 柱國)으로, 김원황(金元晃)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김의진(金義珍)을 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左散騎常侍 同知中樞院事)로, 김양지(金良贄)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

병오. 송인(宋人) 소종명(蕭宗明)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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