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1(文宗一) 4년
〈경인〉 4년(1050) 봄 정월 기축.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동북면도병마사(東北面都兵馬使) 박성걸(朴成傑)이 아뢰기를,
“작년 10월에 해적이 진명(鎭溟)에서 병선(兵船) 2척을 빼앗아 갔으므로, 병마녹사(兵馬錄事) 문양렬(文揚烈)이 즉시 병선을 이끌고 원흥도부서판관(元興都部署判官) 송제한(宋齊罕)과 더불어 적의 소굴까지 추격하여, 가옥을 불사르고 20급을 목 베고 돌아왔으니 그 공이 상 줄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제서를 내리기를,
“도병마사에 회부하라.”
라고 하였다.
계묘. 〈왕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충(崔冲)을 수태부(守太傅)로 삼았다.
병오. 동북면병마녹사 위위주부(東北面兵馬錄事 衛尉注簿) 박용재(朴庸載)가 임지로 떠나면서 왕에게 인사를 하였다. 제서를 내리기를,
“번인(蕃人)으로서 내조(來朝)하려는 자가 있어도 적의 우두머리 나불(那拂)이 아니면 입조(入朝)를 허락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이는 번류(蕃類) 300인이 서울 광인관(廣仁館)에 억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을묘. 김원충(金元沖)을 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尙書刑部事)로, 이자연(李子淵)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정걸(鄭傑)을 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中樞院使 翰林學士 承旨)로 임명하였다.
3월 병오. 동여진(東女眞) 영새장군(寧塞將軍) 염한(鹽漢) 등 12인, 유원장군(柔遠將軍) 아가주(阿加主) 등 30인, 중윤(中尹) 잉우헌(仍于憲) 등 4인, 장군(將軍) 요라나(要羅那) 등 38인이 와서 좋은 말을 바치고, 회화장군(懷化將軍) 아가주(阿加主) 등 6인은 표서피(豹鼠皮)를 바치므로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염한 등 15인은 일찍이 변경을 침범했으므로 억류하도록 하였다.
여름 4월 신유. 태조의 능[顯陵]과 현종의 능[宣陵]에 배알하고 죄인을 사면하였다.
계유. 발해(渤海) 개호(開好) 등이 내투(來投)하였다.
계미. 유사(有司)에 명령하기를, “동여진(東女眞) 대걸라니촌(大乞羅尼村)과 소걸라니촌(小乞羅尼村)의 경계를 조사, 확정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라고 하였다.
6월 무진, 동번(東藩) 해적이 열산현(烈山縣) 영파수(寧波戍)를 침범하여 남녀 18인을 약탈하여 갔다.
기묘. 제서를 내리기를,
“동북계(東北界) 연해(沿海)에 있는 성보(城堡)의 군민(軍民)이 생활에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회유하려면 원수(元帥)를 신중히 뽑아야 할 것이니, 마땅히 병부상서(兵部尙書) 양감(楊鑑)을 올해 추동번병마사(秋冬番兵馬使)로 삼아라.”
라고 하였다.
가을 7월 병술. 초하루 동번(東蕃)의 적(賊)이 파천현(派川縣)을 침략하였다.
경자. 삼복더위로 나성(羅城) 보수 공사를 중지시켰다.
무신. 동여진(東女眞) 추장(酋長) 골라개(骨羅介)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또 번인(蕃人)에게 납치된 남녀 4인을 속환(贖還)하였으므로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8월 신사. 동여진(東女眞) 아가주(阿加主)·염한(鹽漢)·사이라(沙伊羅) 등이 번인(蕃人)에게 납치되었던 우리의 정변진부사(靜邊鎭副使) 황보충(皇甫沖)과 대정(隊正) 송영(宋迎)을 돌려보냈다.
9월 정해. 거란(契丹)이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충용군도지휘사(忠勇軍都指揮使) 고장안(高長安)을 보냈다.
기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해적이 열산현(烈山縣)에 침범하여 약탈하니, 병마녹사(兵馬錄事) 문양렬(文揚烈)을 보내 전함(戰艦) 23척으로 초자도(椒子島)까지 추격한 후 맹렬히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패퇴시켰습니다. 〈문양렬이〉 적 9급을 목 베고 부락(部落)의 가옥 30여 곳을 불살랐으며 전함 8척을 파손하고 병기(兵器)를 노획한 것이 수백이나 되므로, 그 공을 포상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을사. 회경전(會慶殿)에서 3일 동안 백고좌인왕도량(百高座仁王道場)을 열었다.
겨울 11월 기유.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김경응(金敬應)이 수군을 거느리고, 해적(海賊)의 배 3척을 열도(烈島)에서 쳐서 패퇴시켜, 수십 급을 목 베어 바쳤으며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줄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윤11월 임술. 거란(契丹)에서 횡선사(橫宣使)로 광의군절도사(匡義軍節度使) 소질(蕭質)이 왔다.
신미. 거란(契丹)에서 〈살던〉 한족[漢兒] 조일(曹一)이 내투(來投)하였다.
12월 갑신. 거란(契丹)이 고주관찰사(高州觀察使) 소옥(蕭玉)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상사는 이야기 > 고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가(世家) 문종(文宗) 6년 (2) | 2023.04.26 |
---|---|
세가(世家) 문종(文宗) 5년 (1) | 2023.04.23 |
세가(世家) 문종(文宗) 3년 (1) | 2023.04.17 |
세가(世家) 문종(文宗) 2년 (0) | 2023.04.14 |
세가(世家) 문종(文宗) 원년 (0) | 2023.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