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宣宗) 11년

 

선종(宣宗)〉 (갑술) 11년(1094) 봄 정월 계유.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임진. 해 옆에 혜성이 나타났다.

2월 병오. 여러 차례 천변(天變)이 있자 사면령을 내렸다.

무신. 왕이 군대를 사열하려 하자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병(兵)은 금(金)이어서 목(木)을 이깁니다. 바야흐로 봄이 한창이어서 덕(德)이 목(木)에 있으니, 군대를 사열하는 것은 생기(生氣)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3월 갑술. 왕이 반혼전(返魂殿)에서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제사를 지냈다.

갑신. 국자좨주(國子祭酒) 한검삼(韓儉三)이 글을 올려 나이가 많은 이유로 사직을 청원하자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병술.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잉우(仍于) 등이 와서 말 9필을 바쳤다.

정해. 구정(毬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갑오. 정극공(鄭克恭) 등을 급제시켰다.

여름 윤4월 임진. 왕이 병들었다.

갑오. 재신(宰臣)과 추밀(樞密) 및 종실(宗室)이 연영전(延英殿) 북문에 나아가 왕의 병문안을 올렸다.

5월 임인. 왕이 연영전(延英殿) 내침(內寢)에서 훙서하자 그 날 선덕전(宣德殿)으로 빈소를 옮겼다. 나이는 46세였고 재위는 11년이었다. 시호(諡號)는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廟號)는 선종(宣宗)이라 하였으며, 성 동쪽에 장사지냈고 능은 인릉(仁陵)이라 하였다. 인종 18년(1140) 관인(寬仁)이라는 시호를 더하고, 고종 40년(1253) 현순(顯順)을 더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贊)하여 말하기를,
“시(詩)라는 것은 그것에 뜻이 있는 것이어서, 마음에 있는 것이 뜻이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시다. 선종(宣宗)이 문덕전(文德殿)에서 지은 이약시(餌藥詩)를 보니, 조맹(趙孟)의 「시음개일(視蔭愒日)」의 시와 비슷한 종류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조맹은 열국(列國)의 재상으로 그 말이 구차하다고하여 군자(君子)들이 오히려 그것을 조롱하였는데, 하물며 왕은 어떠하겠는가? 선종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므로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아 구차스러운 뜻은 없었다. 그러나 현명한 군주와 훌륭한 신하[明良]가 갱재(賡載)하는 시가(詩歌)는 존중하였으나, 「대풍가(大風歌)」 같이 강개한 작품과는 어찌 비슷하지도 아니한가? 3년도 되지 않아 여러 신하를 버렸으니, 슬프도다!”
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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