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獻宗) 즉위년
헌종 공상대왕(獻宗 恭殤大王)의 이름은 욱(昱)이고, 선종(宣宗)의 원자(元子)로 어머니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이며, 선종 원년(1084) 6월 을미에 태어났다.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고 9살에 글과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무릇 보고 들은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선종〉 11년(1094) 5월 임인. 선종이 훙서하자 유언을 받들어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갑인. 선종(宣宗)을 인릉(仁陵)에 장사지냈다.
6월 경오. 초하루 〈왕의〉 어머니를 높여 태후(太后)로 삼았다.
갑신. 소태보(邵台輔)와 이자위(李子威)를 모두 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門下侍郞平章事 上柱國)으로, 유석(柳奭)을 상서좌복야 주국(尙書左僕射 柱國)으로, 임개(林槩)를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이자의(李資義)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최사추(崔思諏)를 동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事 左散騎常侍)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유. 문종비(文宗妃) 숭화궁주(崇化宮主) 김씨가 죽었다.
무자.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대사면령을 내렸다.
송(宋)의 도강(都綱) 서우(徐祐) 등 69인과 탁라(乇羅)의 고적(高的) 등 194인이 와서 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기해. 조선공(朝鮮公) 왕도(王燾)와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를 수태사(守太師)로, 상안공(常安公) 왕수(王琇)와 부여공(扶餘公) 왕수(王㸂)를 수태보(守太保)로, 진한후(辰韓侯) 왕유(王愉),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 낙랑백(樂浪伯) 왕영(王瑛)을 수사도(守司徒)로 각각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정묘. 송(宋)의 도강(都綱) 서의(徐義)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8월 경오. 초하루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정주(定州) 선덕진(宣德鎭) 경내에 황충(蝗虫)으로 재해가 일어났으니,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이에 대한 대책을 올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갑술. 송(宋)의 도강(都綱) 구보(歐保), 유급(劉及), 양보(楊保) 등 64인이 왔다.
겨울 11월 임자. 구정(毬庭)에서 나이 80세 이상 되는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였다.
12월 요(遼)에서 칙제사(勑祭使) 소존열(蕭遵烈), 부사(副使) 양조술(梁祖述), 위문사(慰問使) 소치(蕭褫), 기복사(起復使) 곽인문(郭人文) 등이 왔다.
을유. 칙제사(勑祭使)가 반혼당(返魂堂)에 나아가 선종(宣宗)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이 조서(詔書)를 받고 이 제사를 거들었다. 조서에서 말하기를,
“짐이 귀국의 선왕(先王)을 생각해보면 높은 절개를 보전하였으므로 장차 변경 지방에 총애를 내리려 하였는데 갑자기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영혼이 멀지 않을 것이므로 두터운 은혜가 미치는 것이 마땅하며, 진설할 제뢰(祭酹)를 보내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소준열(蕭遵烈)과 위위소경(衛尉少卿) 양조술(梁祖述)을 파견하여 칙제사와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제사에 쓸 여러 물품은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어 보낸다.”
라고 하였다. 제문(祭文)에서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영령은 기량이 넓고 외모가 뛰어났다. 경사스럽게도 풍운의 때를 만나 일월의 빛남에 공손하게 의지하여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였고, 번국을 계승하여 다스림을 이어갔다. 바닷가에 봉해진 봉토에서 구복(舊服)에 순종하여 조정을 받드는 것에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웠다. 진실로 의방(義方)을 타고났으며, 오로지 충절(忠節)을 갖추었다. 장차 큰 은총을 더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들은 이래로 은혜로운 포상이 미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특별히 사신을 빨리 보내 전(奠)에 술을 올리게 하니, 정혼(貞魂)은 진심으로 생각하여 오로지 깊은 뜻을 헤아려 달라.”
라고 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왕이 궁으로 돌아왔다. 위문사(慰問使)가 건덕전(乾德殿)에서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조서에서 이르기를,
“상주문을 살펴보고 고려국왕이 훙서한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짐은 귀국의 선왕(先王)이 동해에서 나타나 이제 막 보좌하는 공적에 세울 것을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고려국왕이 훙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대가 어린 나이로 이 같은 흉사(凶事)를 당한 것이 애처로우나, 마땅히 왕위를 계승할 것을 생각하여 슬픔을 억눌러 조금만 절제하고 예문(禮文)에 따라 나의 깊은 뜻에 부응하라. 지금 광주방어사(廣州防禦使) 소치(蕭褫)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위문하고, 더불어 부의(賻儀)로 보내는 물품은 별록(別錄)과 같이 하사한다.”
라고 하였다.
병술. 기복사(起復使)가 건덕전(乾德殿)에서 〈요(遼) 황제의〉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조서에서 말하기를,
“왕은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곧 대를 잇는 것을 맡게 되었다. 흙덩이나 거적에 있는 것이 마땅하며 정을 다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여야 하지만, 전쟁 같은 상황에는 형편에 따라 변통하여 오로지 정무에 복귀하여 정사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애영(哀榮)에 이른 것이 지극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간곡한 생각에 부응하여 힘쓰도록 하라. 지금 승록경(崇祿卿) 곽인문(郭人文)을 파견하여 그대에게 기복하라는 관고(官告)와 칙명(勅命)을 각 1통씩 보낸다.”
라고 하였다. 관고(官告)에서 말하기를,
“효를 다하는 것은 다만 친(親)한 것이므로 상(喪)에 있을 때에는 끝까지 슬퍼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지만, 나라에 충성을 한다면 순응하여 전쟁에서의 일은 권도(權道)를 좇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옛날 조양자(趙襄子)는 명령이 나왔기 때문에 즉시 전쟁에 나갔으며, 백금(伯禽)은 능력이 있었으므로 일을 맡았던 것이다. 내가 고전(古典)을 살펴서 여러 나라를 어루만지는데, 청사(靑社)는 이름 있는 봉지(封地)로서 이에 황가의 튼튼한 울타리로 생각하여 왔다. 상제(上帝)가 무심하여 국왕이 훙서하였으나 후사로 하여금 잇도록 하여 다스리던 영토를 계승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사스러운 길일을 가려서 알리고 견복(牽復)의 글을 상고하여 실행하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한 것을 합쳐서 나의 은총을 알린다.
고려국왕을 계승한 왕욱(王昱)은 경륭(慶隆)하는 뒤를 이은 아들로서 재주가 많고 사람됨이 빼어나다. 용성(龍星) 7수(宿)의 정기를 타고 일찍부터 지략이 가득하였으며, 목신(木神) 오행(五行)의 빼어남을 얻어 태어나면서부터 인자함이 많았다. 이에 어린 나이에 있으면서 일찍부터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바야흐로 국가를 계승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아버지를 여위는 곤란함을 당하여 부음을 알려오니 슬프고 상심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버지를 잃은 비통함에 잠겼을지라도 3년 동안이나 그 정성을 빼앗는 것을 차마 말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번국을 맡은 중요한 임무는 하루라도 그 직책을 비워 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특별히 윤음의 명령을 내려 시묵(始墨)의 길을 따르도록 하고, 아울러 인장[駞鈕]의 숭고한 권리를 더하여 봉지(鳳池)의 준질(峻秩)을 올려 품계를 넉넉하게 주어 훈호와 식읍을 모두 새롭게 하고 봉국(國封)을 이어받아 여러 사람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려 한다.
아아! 귀국의 선조를 생각해보면, 우리 조정에 신속(臣屬)하면서 태산(泰山)을 두고 분명하게 맹세하였으며 동해(東海)의 모범이 되었다. 황제를 받들고 백성을 감싸면서 관대함이 있었고, 자손에게 물려주고 자식에게 도움을 주어 계승하게 하였다. 돌아보면 다만 8세대에 걸쳐 큰 번영을 누리면서 모두 일구(一卣)의 하사하심을 얻었다. 그대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풍부하고 원대한 계책[令圖]을 오랫동안 생각하라. 근검하여야 민을 보호할 수 있으며 신의가 있어야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있을 것이니, 이 훈계를 명심하여 조심하고 삼가도록 하라. 표기대장군 검교태위 겸 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驃騎大將軍 檢校太尉 兼 中書令 上柱國 高麗國王)과 식읍(食邑) 7,000호와 식실봉(食實封) 700호로 기복하게 한다. 담당 관청에게 날짜를 택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상사는 이야기 > 고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가(世家) 숙종(肅宗) 즉위년 (0) | 2024.02.29 |
---|---|
세가(世家) 헌종(獻宗) 원년 (0) | 2024.02.24 |
세가(世家) 선종(宣宗) 11년 (0) | 2024.02.14 |
세가(世家) 선종(宣宗) 10년 (0) | 2024.02.09 |
세가(世家) 선종(宣宗) 9년 (0) | 2024.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