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1(肅宗一) 3

 

〈숙종(肅宗)〉 (무인) 3년(1098) 봄 정월 병인.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여 이제 바야흐로 위대한 업적을 맡게 되었으며 요[大遼]에서 사신을 보내 특별히 높여주는 뜻을 보였다. 마땅히 경사스러운 은혜를 반포하여 위로는 요의 후의에 보답하도록 하겠다. 책명(冊命)을 받는 날 사신을 접대한 관리 이하와 단에 올라가 의례를 집행한 내외의 여러 관청의 관원 및 객사(客使) 접반관(接伴官)에게는 관작 1급을 하사하고, 법을 어겨 벌을 받는 자는 사면할 것이며 지휘한 군인에게는 차등 있게 물건을 하사하라.”
라고 하였다.

갑술.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여 나한재(羅漢齋)를 지냈다.

2월 갑신. 〈왕이〉 구정(毬庭)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기축.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갑오.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임인. 동여진(東女眞)의 창곤(昌昆)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정미.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3월 갑인. 〈왕이〉 창릉(昌陵)을 참배하였다.

신유. 〈왕이〉 대릉(戴陵)을 참배하였다.

계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지만 원자(元子)를 두었으니, 마땅히 태자의 자리[震位]에 올려야 한다.”
라고 하고 특별히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태자를 세웠으며, 첨사부(詹事府)와 좌춘방(左春坊), 연경궁사(延慶宮司) 등의 관청을 갖추고 조예(皂隷)와 채읍(采邑)을 모두 소속시켰다. 소태보(邵台輔)를 태사(太師)로, 김상기(金上琦)를 태부(太傅)로, 최사추(崔思諏)를 태보(太保)로, 김선석(金先錫)을 소사(少師)로, 황영(黃瑩)을 소부(少傅)로, 임간(林幹)을 소보(小保)로, 위계정(魏繼廷), 이오(李䫨), 조인충(趙藺忠), 곽상(郭尙)을 모두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김한충(金漢忠)과 홍기(洪起)를 좌서자(左庶子)와 우서자(右庶子)로, 유신(柳伸)과 김경용(金景庸)을 좌유덕(左諭德)과 우유덕(右諭德)으로, 윤관(尹瓘)을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로, 최공후(崔公詡)를 가령(家令)으로, 문익(文翼)과 고령신(高令臣)을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와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로, 우원령(禹元齡)을 중사인(中舍人)으로, 이위(李瑋)를 전내(典內)로, 장령(蔣寧)을 세마(洗馬)로, 유재(劉載)를 시독(侍讀)으로, 강증(康拯)을 중윤(中允)으로, 유인무(柳仁茂)를 사의랑(司議郞)으로, 장경(張景)을 약장랑(藥藏郞)으로, 최인필(崔寅弼)을 궁문랑(宮門郞)으로, 이후(李侯)를 솔경(率更)으로, 황유현(黃兪顯)을 시위(侍衛)로, 오손경(吳孫慶)과 최유정(崔惟正)을 좌청도솔부솔(左淸道率府率)과 우청도솔부솔(右淸道率府率)로, 나준(羅俊)과 궁제(弓濟)를 좌감문(左監門)과 우감문(右監門)으로, 최정(崔挺)을 우위(右衛)로, 최현(崔現)을 여분중랑장(旅賁中郞將)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축. 백관이 표문(表文)을 올려 태자부(太子府) 세운 것을 하례하였다.

병인. 동여진(東女眞)의 요진(要眞)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여름 4월 동여진(東女眞)의 고두(古豆)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기축. 이덕윤(李德允) 등을 급제시켰다.

정유.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가서 3,000명을 반승(飯僧)하였다.

기해. 다섯 해신(海神)에게 비를 빌었다.

5월 임자. 우박이 쏟아졌다.

신유. 회경전(會慶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6월 무인.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가을 7월 무신. 송악신사(松嶽神祠)에서 기청제를 지냈다.

기미. 송(宋)에 윤관(尹瓘)과 조규(趙珪)를 보내 왕위 계승을 알리고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황제의 자애로움이 우리나라 끝까지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이미 나타났는데, 신의 간곡한 마음을 어찌 함부로 펼쳐 보일 수 있겠습니까? 감히 지극한 정성을 드러낸다면 문득 황제께 미칩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조상부터 자손까지 모두 대를 이어 영지를 물려받고, 면면히 풍화(風化)를 누리고 제후의 직책을 다하였습니다. 얼마 전 신의 형 왕운(王運, 선종)이 제후의 직을 맡아 귀국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누대로 이어온 정책을 준수하여 지조와 충절을 더욱 굳건히 하였으며 먼 땅을 나누어 맡아 다스리면서 임무를 다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하물며 선왕의 왕후가 홀연히 모의(母儀)를 그만두자, 죽은 형은 간절한 추모의 정으로 곧 사신을 보내 위문하는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긴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갑자기 떠났습니다. 신의 형의 아들인 선왕(先王) 왕욱(王昱, 헌종)이 권한을 계승하여 폐읍(弊邑)을 다스렸으나, 잇달아 병이 들어 마침내 치료하여도 낫지 않고 점차 병이 깊어져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을해년(1095) 10월 8일 번국의 업무를 간절히 사양하고 신에게 맡으라고 명하였으며, 그 부탁이 간절함을 알아 감히 사양하거나 피하지 못하고 외람되게 부족한 몸으로 임시로 종묘[宗祊]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국기(國基)를 새롭게 하고 왕위를 이은 초기에 나라에 일이 많아서 수년이 되도록 일찍 사신을 보내 일을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총명한 당신께서 멀리 바깥에 있는 사정도 상세히 아실 것이지만 〈고려가〉 국가에 겹치는 일이 많아서 늦게 알리게 되는 죄를 지어 예를 갖춤에 부족함이 있게 되었으니 죄를 어찌 감히 피하겠습니까. 지금 갖추어 늦게나마 사유를 알리오니 당신의 밝게 살피심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분노가 멀지 않을 것이니 얼음을 밟듯 근심을 더하기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병인.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8월 병신. 유사(有司)에 명하여 형옥(刑獄)을 가볍게 하였다.

9월 기유. 왕이 국청사(國淸寺)에 갔다.

임자. 회경전(會慶殿)에서 인왕도량(仁王道場)을 7일간 열었다.

겨울 10월 갑신.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묘(太廟)에 가서 합사(祫享)하였다. 신봉문(神鳳門)으로 돌아와 참형(斬刑)과 교형(絞刑)의 2죄(二罪) 이하의 죄를 사면하였다. 참형과 교형을 받은 자는 섬으로 유배 보내고 이미 섬으로 유배된 자는 육지로 나오게 하였으며, 육지에 나온 자는 귀향(歸鄕)하게 하였고 귀향형(歸鄕刑)을 받은 자는 서울로 올라오게 하였으며, 서울에 올라온 자는 알현을 허락하였고 이미 알현한 자는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여러 신령의 호(號)를 더하고 또 배향공신(配享功臣)을 가증(加贈)하였다. 제사를 도운 여러 집사자(執事者)와 태묘와 9릉(九陵)의 시위 원장(員將) 등에게 관작 한 등급을 하사하였다. 묘정(廟庭)의 악부(樂部)의 공인(工人)에게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고,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지 못하여 군대에 있는 자는 면제하여 주었다.

무자. 요(遼)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용(金庸)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조양휴(曹楊休)를 보내 책봉을 사례하였다.

신축. 상서형부(尙書刑部)에서 감옥이 비었다고 아뢰자 재상 소태보(邵台輔) 등이 하례하는 표문(表文)을 올렸으며,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이 선업(先業)을 이어받아 백성을 다스릴 것을 생각하여 날마다 제왕의 업무를 살폈으며 다만 부지런히 일할 생각만을 쌓아왔을 뿐인데, 지금 서옥(庶獄)이 깨끗한 것은 진실로 옆에서 보좌한 사람들의 능력 덕분이다. 어찌 마음을 다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돌리고 표문을 올려 하례를 하는가? 각별한 정성을 생각하니 가상히 여김이 매우 절실하다.”
라고 하였다. 재보(宰輔)가 또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임인. 요(遼)에 김약충(金若冲)을 보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월 경술. 송(宋) 상인 홍보(洪保) 등 20인이 왔다.

무오.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을축. 요(遼)에 왕하(王嘏)와 윤계형(尹繼衡)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장녕(蔣寧)은 신년을 하례하였다.

12월 병술. 요(遼)에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내고부(來告符)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신묘. 아들 왕필(王佖)을 검교태보 수태위 겸 상서령(檢校太保 守太尉 兼 尙書令)으로 삼았다.

계사. 내고부(來告符)가 〈요(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사례하는 표문(表文)을 보냈다.

경자. 김경용(金景庸)을 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尙書吏部侍郞 知御史臺事)로, 이계응(李繼膺)을 상서형부시랑 우간의대부(尙書刑部侍郞 右諫議大夫)로, 문익(文翼)을 급사중(給事中)으로, 고령신(高令臣)을 이부낭중 추밀원우승선(吏部郞中 樞密院右承宣)으로, 오연총(吳延寵)을 기거랑(起居郞)으로, 왕하(王嘏)를 병부원외랑 추밀원우부승선(兵部員外郞 樞密院右副承宣)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병신. 예부(禮部)에 송[宋朝]의 『개보정례(開寶正禮)』 1부를 하사하였다.

 

출처. 국사편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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