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1(睿宗一) 즉위년

 

예종 문효대왕(睿宗 文孝大王)의 이름은 우(俁)이고 자(字)는 세민(世民)이다. 숙종(肅宗)의 장자이고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로 문종(文宗) 33년(1079) 정월 정축에 태어났다. 속이 깊고 도량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유학을 좋아하였다. 선종(宣宗) 11년(1094) 검교사공 주국(檢校司空 柱國)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올라 태위(太尉)가 되었다. 숙종 5년(1100) 왕태자로 세웠는데, 책문(冊文)에서 이르기를,
“내가 조상의 위업을 이어받아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나라의 영토는 더 넓어지고 처리해야할 일은 더욱 번거로워져서, 태자[元良]의 도움을 받아 왕업이 창성하고 흥기하는 것이 계속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아! 너는 장자로 하늘로부터 영특한 자질을 받아서 날마다 명망이 높아졌다. 덕행을 안으로 갖추고 위엄과 은혜는 밖으로 떨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정해졌고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아름답게 돌아갔다. 나라를 이어받아 지킬 자가 네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러하므로 왕[霄極]의 다음가는 의례를 갖추어 태자[震宮]의 은총을 받는 자리에 있게 하며, 점을 쳐서 날짜를 따라 왕의 윤음(綸音)을 내려 명령한다. 지금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왕태자로 책봉한다. 아아! 문안을 드리고 음식을 살피는 효도가 어찌 다만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군대를 통솔하고 나라 일을 보살피는 데 그 적당함을 알기에 족하니, 시종일관 잘 하여 소홀함이 없고 태만함이 없게 하라. 진(晋) 왕실의 육부(六傅)를 본받아 상산(商山)의 사공(四公)〈과 같은 훌륭한 스승〉을 좌우에 두고, 교만하고 사치한 것을 멀리 배척하며 학문에 힘쓰도록 하라. 지극히 귀하다고 하여 자기만을 믿지 말며, 스스로 현명하다고 하여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 자기에게 병이 있으면 침과 약으로 치료하듯이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준을 두어 시정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자신을 경계하라.”
라고 하였다. 〈숙종〉 9년(1104) 요(遼)에서 사신을 보내 삼한국공(三韓國公)에 책봉되었다. 〈숙종〉 10년(1105) 10월 병인 숙종이 훙서하자 유조(遺詔)를 받들어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을해.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왕의 이름과 같은 운(韻)인 우(噳)·우(麌)·우(㒁)·(喁) 글자를 고쳐서 휘(諱)를 피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갑신. 숙종(肅宗)을 영릉(英陵)에 장사지냈다.

무자. 요(遼)에 중서사인(中書舍人) 김연(金緣)을 보내 〈숙종(肅宗)의〉 부음을 알렸다.

경인. 양반이나 평민(士庶)이 내관(內官)과 서로 통하여 청탁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계사. 요(遼)에 형부시랑(刑部侍郞) 최위(崔緯)를 보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어머니 유씨(柳氏)를 왕태후(王太后)로 높이고 수녕궁(壽寧宮)을 대녕궁(大寧宮)으로, 장경궁(長慶宮)을 숭덕궁(崇德宮)으로, 연평궁(延平宮)을 안수궁(安壽宮)으로 고쳤다.

갑오. 맏공주에게 대녕궁(大寧宮)을, 둘째 공주에게 숭덕궁(崇德宮)을, 셋째 공주에게 안수궁(安壽宮)을 하사하였다.

11월 무술. 종실(宗室)인 왕영(王瑛)을 수태위(守太尉)로, 왕원(王源)을 검교태위 수사도(檢校太尉 守司徒)로, 위계정(魏繼廷)을 수태위 문하시중 상주국(守太尉 門下侍中 上柱國)으로, 최홍사(崔弘嗣)와 이오(李䫨)를 모두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윤관(尹瓘)을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로, 임의(任懿)를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 叅知政事)로, 정문(鄭文)을 검교사공 예부상서(檢校司空 禮部尙書)로, 김경용(金景庸)을 태자태사 수사공(太子太師 守司空)으로, 왕하(王嘏)를 이부상서 추밀원사(吏部尙書 樞密院使)로, 오연총(吳延寵)을 지추밀원사 어사대부(知樞密院事 御史大夫)로, 이위(李緯)를 형부상서 지제고(刑部尙書 知制誥)로, 고영신(高令臣)을 비서감 직문하성(秘書監 直門下省)으로, 강증(康拯)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각각 임명하였다.

기해. 최정(崔挺)을 상서우복야 응양군상장군(尙書右僕射 鷹揚軍上將軍)으로, 최유정(崔惟正)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고의화(高義和)를 용호군상장군 형부상서(龍虎軍上將軍 刑部尙書)로, 황유현(黃兪顯)을 흥위위상장군 호부상서(興威衛上將軍 戶部尙書)로 각각 임명하였다.

경자. 필광찬(畢光贊)을 검교태자태사 상호군(檢校太子太師 上護軍)으로, 혁련정(赫連挺)을 장악전학사 판제학원사(長樂殿學士 判諸學院事)로 임명하였다.

신축. 제서(制書)를 내려 왕이 세자 시절부터 즉위하는 날까지 시위(侍衛)한 장교(將校), 관리(員吏), 승려로 공로 있는 자에게 특별히 관작과 상을 더하여 주었다.

임인. 〈왕이〉 신봉루(神鳳門)에 나아가 사면령을 내렸다.

갑진.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민간에서 사고파는 데 사용하는 미곡(米穀)과 은(銀)의 품질이 매우 나쁘다고 한다. 따라서 전대(前代) 이래로 엄한 법으로 이를 금지하였는데, 지금까지 그것을 징계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대개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법으로 금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여, 이에 모래나 흙을 쌀에 섞고 구리나 쇠를 은에 섞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천지신명의 뜻이 아니며, 백성이 빈곤한 것은 실제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므로 법으로 징계해야 하겠다. 그러나 요(堯)‧순(舜)은 〈범죄자에게 실형(實刑)을 가하지 않고〉 그 자의 의관(衣冠)에 색칠로 표시만 해 놓아도[畵衣冠] 백성이 법을 범하지 않아 형벌을 버려두고 쓰지 않았으며[刑措不用], 집집마다 봉작하여 줄 만큼[比屋可封] 되었다고 하니 나는 이를 대단히 흠모한다. 바라건대 전국의 군민(軍民), 공상(工商), 잡류(雜類)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착하게 변하여 죄를 멀리한다면, 자연히 형벌은 맑아지고 덕의 가르침이 흡족해져 부유하고 오래 사는 일과 태평한 풍조를 어찌 이루기 어렵겠는가? 만약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의로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처벌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병오.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형벌이 폐지되어 쓰이지 않는 것[刑措不用]은 제왕의 성덕(盛德)인데, 지금 감옥[囹圄]이 텅 비었으니 옥공(獄空)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법사(法司)의 남쪽 거리에 걸어 성조(盛朝)에서 형조(刑措)하는 아름다움을 보이소서.”

라고 하였으며 재상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당시에 감옥은 대사면령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죄인이 모두 석방되었는데, 어사대가 방을 걸자고 청하고 재상들이 감옥이 빈 것을 하례한 것이었다.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비웃었다.

무신.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구정(毬庭)에 행차하여 음악연주를 관람하였다.

정사. 왕하(王嘏)를 서북면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 知中軍兵馬事)로, 오연총(吳延寵)을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 兼 知行營兵馬事)로 임명하였다.

임술. 내시지후(內侍祗候) 지녹연(智祿延)과 주부동정(注簿同正) 은원충(殷元忠), 사천소감(司天少監) 허신경(許藎卿)과 최자호(崔資顥) 등을 보내 동계(東界)의 산천을 둘러보게 하였다.

이번 달 11월 회상대왕(懷殤大王)의 시호(諡號)를 공상(恭殤)으로 고치고, 묘호(廟號)를 헌종(獻宗)이라 하였다.

12월 병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죽었다.

무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선대의 유물을 제왕(諸王)과 재추(宰樞)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임신.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유자유(柳子維)를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로, 내시지후(內侍祗候) 최홍정(崔弘正)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하였다.

을해. 건명전(乾明殿)으로 재추(宰樞)를 불러 동계(東界)의 변방상황을 물었다.

기묘. 오연총(吳延寵)을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로, 김기감(金奇鑑)을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임신행(任申幸)을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임언(林彦)을 별감(別監)으로, 김준(金晙)을 판관(判官)으로, 지녹연(智祿延)과 김인석(金仁碩)을 장주분도(長州分道)로, 곽경심(郭景諶)을 선덕분도(宣德分道)로, 유익(庾翼)과 척준경(拓俊京), 유영약(兪瑩若)을 병마녹사(兵馬錄事)로, 최자호(崔資顥)와 박성정(朴成正)을 군후(軍候)로 각각 임명하였다.

임오. 대녕궁(大寧宮)에 화재가 났다.

갑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나의 선대를 생각해보면 혼란한 시기를 잘 다스려 나라를 세우고, 여러 어진 임금이 잘 지켜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지금 여러 도(道)·주(州)·군(郡)의 사목(司牧)으로 청렴하고 백성을 가엾게 여기고 구휼하는 자는 열에 하나 둘도 되지 않는다. 이익을 좇고 거짓으로 명예만을 구하여 대체(大體)가 손상되었으며, 뇌물을 좋아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여 백성에게 해를 끼쳐 유망(流亡)이 서로 잇달아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으니 나는 매우 가슴이 아프다. 이것은 실로 인사고과[殿最]가 시행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없었기 때문이며, 명망 있는 신하를 파견하여 군현(郡縣)을 순행(巡行)하고 수령의 인사고과를 살펴서 듣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이제 마땅히 상과 벌을 명백하게 밝히는 데 힘쓰려 하니, 추밀대신(樞密大臣)은 모두 나의 뜻을 체득하여 조종의 법령과 제도를 추검(推檢)하여 백료(百僚)에게 징계하고 타이르는 것을 법식[程式]으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신묘. 현화사(玄化寺) 승려 덕창(德昌)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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