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권제12(卷第十二) 고려사12(高麗史十二)

 

숙종2(肅宗二) 8

 

〈숙종(肅宗)〉 8년(1103) 봄 정월 계미. 왕원(王源)을 검교사도 수사공 상주국(檢校司徒 守司空 上柱國)으로 임명하였다.

기축. 동여진(東女眞)의 고라골(高羅骨) 등 30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신묘 서여진(西女眞)의 망간(芒間) 등 24인이 내조(來朝)하였다.

2월 병진.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두문소(豆門小) 등 3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동여진의 장군 고부로(高夫老) 등 30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기미.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유. 소태보(邵台輔)를 수태부 판호부사 서경유수사(守太傅 判戶部事 西京留守事)로, 최사추(崔思諏)를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 判吏部事)로, 임간(林幹)을 수사도 판병부사(守司徒 判兵部事)로, 위계정(魏繼廷)을 수사도 판예부사(守司徒 判禮部事)로, 이오(李䫨)를 검교사도 수사공 판형부사(檢校司徒 守司空 判刑部事)로, 오수증(吳壽增)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김경용(金景庸)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각각 임명하였다.

임술. 곽상(郭尙)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하여 치사(致仕)하도록 하였다.

기사. 송(宋)의 명주교련사(明州敎練使) 장종민(張宗閔)과 허종(許從) 등이 강수(綱首) 양소(楊炤) 등 38인과 함께 내조(來朝)하였다.

동여진(東女眞)의 두문(豆門)과 회팔(恢八) 등 90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을해. 오수증(吳壽增)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유신(柳伸)을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유녹숭(庾祿崇)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 叅知政事)로, 윤관(尹瓘)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 同知樞密院事)로, 왕하(王嘏)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3월 기축. 직사관(直史館)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쓰게 하였다.

여름 4월 정사. 붉은 무지개가 해를 범하였다.

경신.  우박이 내렸다.

5월 신사. 김한충(金漢忠)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의(任懿)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김경용(金景庸)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다.

6월 기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임자. 송(宋)에서 국신사 호부시랑(國信使 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拭)을 파견하여 왕의 의대(衣帶)와 필단(匹段), 금으로 만든 그릇과 옥으로 만든 그릇, 활과 화살, 안장 얹은 말[鞍馬]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갑인. 왕이 회경전(會慶殿)에서 〈송(宋)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았다. 조서에서 말하기를,
“경(卿)은 대대로 왕위를 이어받아 동쪽의 영토[日域]를 다스리면서, 문서[奏文]를 여러 차례 보내 항상 우리나라의 무사함을 바라는 마음을 품었고, 공물 보내는 것도 항상 풍성하게 하여 멀리서 조공[旅庭之實]을 보냈다. 이에 당신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큰 은혜를 내리려고 시종하는 근신(近臣)을 선발하여 장차 특별한 대우로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 일은 비록 예전부터 하던 것이나 예절은 평상시의 배가 넘으니, 마땅히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은혜를 입고 더욱 충성을 다하여 보답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아울러 의관(醫官) 모개(牟介), 여병(呂昞), 진이유(陳爾猷), 범지재(范之才) 등 4인을 보냈는데, 표문을 보내 요청한 것을 따른 것이다.

병인. 요(遼)에서 보책사(報冊使) 변당영(邊唐英)을 파견하여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짐은 8대[八聖]의 큰 위업을 이어받아 천년을 이어갈 왕업을 계승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생각하면 감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는데, 이제 여러 해가 지나면서 천하가 태평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여러 제후들이 계속하여 글을 보내 휘명(徽名)으로 부덕한 나의 덕을 추숭할 것을 청하므로, 이를 굳이 사양할 수 없어 간곡한 정성을 따라서 금년 겨울에 책례(冊禮)를 시행하기로 이미 정하였다. 경(卿)은 영광스러운 번국의 제후로서 충성스럽게 왕실을 받들었으니 성대한 의례를 거행한다는 것을 들으면 마땅히 크게 기뻐할 것이라 믿는다.”
라고 하였다.

정묘. 이오(李䫨)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오수증(吳壽增)을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로, 유신(柳伸)을 좌복야 정당문학(左僕射 政堂文學)으로, 최홍사(崔弘嗣)를 추밀원사 겸 태자빈객(樞密院使 兼 太子賓客)으로, 윤관(尹瓘)을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 승지(知樞密院事 兼 翰林學士 承旨)로, 최저(崔翥)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이계위(李繼膺)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문익(文翼)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각각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신묘. 송(宋)의 국신사(國信使) 유규(劉逵) 등이 돌아가게 되자, 왕이 사례하는 표문을 보냈다. 겸하여 이름을 고친 것을 알렸다.

송(宋)의 의관(醫官) 모개(牟介) 등이 흥성궁(興盛宮)에 머무르며 의생(醫生)을 가르쳤다.

을미.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곤두(昆豆)가 사람을 보내 황모(黃毛) 1만 조(條)를 바쳤다.

정유.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盈歌)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盈歌)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다면 내가 즉시 사람을 시켜 너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완치되자 영가(盈歌)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사신으로 왕래하기 시작하여 이후로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영가(盈歌)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알려주고 우리도 다시 사신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였다. 영가(盈歌)가 그의 족제(族弟) 사갈(斜葛)을 보내 답례로 방문하니, 왕이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8월 경술. 헌관(憲官)이 형서(刑書)를 평정(評定)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대장군 고문개(高文盖), 장홍점(張洪占), 이궁제(李弓濟)와 장군 김자수(金子珍) 등이 몰래 역모를 꾀할 마음을 품었다.

경신. 어사대(御史臺)에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여 남쪽 끝으로 유배 보냈다.

9월 경진. 왕이 국청사(國淸寺)에 갔다.

을미. 내시(內侍)와 시종 문신(侍從 文臣)을 중광전(重光殿)으로 불러 제목을 내어 시를 짓게 하고 술을 하사하였다.

임인. 요(遼)에 이계응(李繼膺)과 박경작(朴景綽)을 보내 존호(尊號)를 더한 것을 축하하였다.

을사. 최사추(崔思諏)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간(林幹)을 문하시랑평장사(爲門下侍郞平章事)로, 이오(李䫨)를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각각 임명하였다.

병오. 1만 명을 반승(飯僧)하였다.

겨울 10월 정미. 초하루 제서(制書)를 내려 벽상공신(壁上功臣)의 직호(職號)를 고쳐 적도록 하였다.

갑인. 최홍사(崔弘嗣)를 서북면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 知中軍兵馬使)로 삼았다.

병진. 송(宋) 황제의 〈생일〉 천녕절(天寧節)이므로, 태자에게 명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재를 지내고 의관(醫官) 모개(牟介) 등이 가서 이를 관람하게 하였으며, 모개 등에게 술과 폐백(幣帛)을 하사하였다.

경신. 요(遼)에서 동경회례사 예빈부사(東京回禮使 禮賓副使) 고유옥(高維玉) 등이 왔다.

요(遼)에 송임(宋琳)을 보내 천흥절(天興節)를 축하하였다.

경오. 조서(詔書)를 내려 무등산(無等山)에 있는 처사(處士) 은원충(殷元忠)을 불러들였다.

임신. 〈왕이〉 동지(東池)에 행차하여 활쏘기를 관람하고, 정곡(正鵠)에 명중한 사람에게는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였다.

갑술. 요(遼)에 김국진(金國珍)을 보내 횡선사(橫宣使) 파견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11월 을유. 요(遼)에 최계방(崔繼芳)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에 사례하였다.

기축.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개경[京城]에 지진이 일어났다.

병신.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고쇄(古洒), 솔부(率夫), 아로(阿老) 등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정유. 요(遼)에 조경(趙卿)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치고, 심후(沈侯)는 신년을 하례하였다.

12월 무신. 요(遼)에서 오흥경(烏興慶)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무오. 개경[京城]에 지진이 일어났다.

임신. 북번(北蕃)의 장군 종곤(從昆)과 아로(阿老) 등 47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