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3(睿宗三) 14년
〈기해〉 14년(1119) 봄 정월 무신.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무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치사(致仕)한 고의화(高義和)가 사망하였다.
병자. 이유인(李惟寅)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척준경(拓俊京)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였다.
2월 을미. 여진인(女眞人)이 내조(來朝)하였다.
병신. 송(宋)의 조의(曹誼) 등이 귀국하게 되자,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나가 〈그 편에〉 사례하는 표문(表文)을 부쳤다.
정유. 〈왕이〉 순덕왕후(順德王后)의 혼당(魂堂)에 행차하였다.
금(金) 임금이 사신을 내빙(來聘)시키고 그 편에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조유(詔諭)한다. 짐은 군사를 일으켜 요(遼)를 정벌하면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 적병을 무너뜨렸고, 북쪽으로는 상경(上京)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족의 백성을 어루만져 안정시켰다. 이제 발근(孛菫) 출발(朮孛)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아울러 말 1필을 보내니 도착하면 수령하라.”
라고 하였다.
임인.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3월 정미. 초하루 김지화(金至和)를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로, 최지(崔贄)를 우복야 판어서원사(右僕射 判御書院事)로 임명하였다.
병인. 죄수를 재심하였다.
여름 4월 임오.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갑오. 왕의 동생 통의후(通義侯) 왕교(王僑)가 사망하였다.
5월 임술.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행차하였다.
6월 병자.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갑신. 〈왕이〉 대궐의 뜰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인.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갑오. 김연(金緣)을 검교태위 겸 태자태보(檢校太尉 兼 太子太保)로, 조중장(趙仲璋)을 태자태보로, 김준(金晙)을 수사공(守司空)으로, 김지화(金至和)를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이궤(李軌)를 수국사(修國史)로, 박경인(朴景仁)을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로, 왕자지(王字之)를 추밀원사 판삼사사(樞密院使 判三司事)로, 한안인(韓安仁)을 형부상서 겸 태자빈객(刑部尙書 兼 太子賓客)으로, 최덕개(崔德玠)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김고(金沽)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정극영(鄭克永)을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 左諫議大夫)로 각각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신유.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갔다.
기해. 상서우승(尙書右丞) 이소영(李韶永)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호부시랑(戶部侍郞) 김진(金縝)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馬副使)로 임명하였다.
8월 을해. 초하루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정축.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曹舜擧)을 보내 금(金)에 예빙(禮聘)하였으나, 보낸 서신에 ‘하물며 저 근원이 우리 땅에서 시작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자 금 임금이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
을유. 〈왕이〉 순덕왕후(順德王后)의 혼당(魂堂)에 행차하였다.
정해.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행차하였다.
정유.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계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조중장(趙仲璋)이 사망하자, 강회(康懷)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거란(契丹)에서 소공청(蕭公聽)과 야율준경(耶律遵慶)을 보내왔다. 동로병마사도부서(東路兵馬使都部署)에서 첩을 보내 이르기를, “추밀원(樞密院)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보내온 차자(箚字)에 따르면 ‘최근에 고려(高麗)의 도로가 막혀서 공물과 하례를 통하기 어렵고, 반포하고 하사하는 은혜와 의례도 역시 여러 해 동안 소원하였으므로, 사신을 파견하여 그 편에 조서를 전하고 아울러 의복도 하사한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정축.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갔다.
계미. 내전(內殿)에서 백좌회(百座會)를 열고, 대궐의 뜰에서 3일 간 반승[齋僧]하였다.
11월 신해.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게 하였다.
무진. 왕이 청연각(淸讌閣)에서 활쏘기를 사열하였다.
임신. 왕이 중광전(重光殿)에서 활쏘기를 사열하고 과녁을 명중시킨 자에게 상을 주었다.
12월 계미.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행차하였다.
이해에 장성(長城)을 3척(尺) 증축하였다. 금(金)의 국경의 관리가 병사를 출동시켜 제지하였지만, 따르지 않고 대답하여 이르기를, “옛 성을 보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갈라전(葛懶甸)의 발근(孛菫) 호라고습현(胡刺古習顯)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금의 임금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국경을〉 침범하여 괜한 일을 만들지 말고, 다만 군영(軍營)과 보루(堡壘)를 견고히 하고 정찰이나 강화하라.”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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