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3(睿宗) 16년

 

〈신축〉 16년(1121) 봄 정월 정유.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기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남녀에 대한 규범은 혼례[大倫]를 가장 중요시하니, 제왕(帝王)이 일어나는 것 또한 그 내조(內助)에 힘을 입은 것이다.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모름지기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에서 말한 대로 좋은 배우자가 있어야 한다. 이제 진한공(辰韓公)의 장녀와 대경(大卿) 최용(崔湧)의 막내딸을 왕후의 자리[內職]에 두려고 하니, 유사(有司)에서는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칭호를 정하여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예사(禮司)에서 왕씨를 귀비(貴妃)로, 최씨를 숙비(淑妃)로 삼기를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신해. 왕태자가 수춘궁(壽春宮)에서 관례(冠禮)를 치르자, 백관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계축. 함녕절(咸寧節)을 맞아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하례를 받고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을묘. 귀비(貴妃)를 맞아들였다.

갑자. 숙비(淑妃)를 맞아들였다.

2월 임진. 중서사인(中書舍人) 한충(韓冲)을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좌천시키고, 좌정언(左正言) 임원준(任元濬)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임명하였다.

3월 무술. 〈왕이〉 창신사(彰信寺)에 행차하였다가, 미복 차림으로 수릉(綏陵)에 들렀다. 왕이 장차 〈수릉으로〉 가려 하자 간관(諫官)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군왕이 친히 후비의 능침(陵寢)을 찾아간 일이 없고, 예전(禮典)을 상고해보아도 또한 그런 글이 없습니다. 무덤[玄宮]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묵은 풀도 거의 말라 죽었으므로, 임금께서 가보시면 어찌 슬픈 감정이 없겠습니까? 신하된 마음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법으로 스스로를 억제하시어 사람들의 소망을 어루만져 달래주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을사. 송(宋)에서 요희(姚喜)를 보내왔다.

임자.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갑인.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을 강론하게 하고, 기거주(起居注) 김부식(金富軾)에게는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을축. 초하루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무진. 죄수를 재심하였다.

을해.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무자.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행차하였다. 환궁(還宮)하는 길에 이자겸(李資謙)의 산재(山齋)에 머물러 술자리를 열었다.

기축. 이자겸(李資謙)을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으로 임명하였다.

5월 정유. 죄수를 재심하였다.

갑인. 상춘정(賞春亭) 및 일월사(日月寺)·왕륜사(王輪寺)·고봉사(高峯寺)·극락사(極樂寺)에서 21일[三七日] 동안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을묘. 죄수를 재심하였다.

계해. 백관이 흥국사(興國寺)에서 5일 동안 비를 빌었다.

윤5월 갑자.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병인. 죄수를 재심하였다.

정묘. 왕사(王師) 덕연(德緣)을 불러 건덕전(乾德殿)에서 5일 동안 비를 빌었으며, 또 불우(佛宇)와 신사(神祠)에서도 빌었다.

신미.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다.

임신. 다시 덕연(德緣)을 불러 산호정(山呼亭)에서 〈비를〉 빌었다.

을해.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시세(時勢)가 순리(順理)를 잃어 가뭄이 재앙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과인에게 덕이 없어 재앙이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죄 없이 죽어 나가는 것이 참으로 가엾다. 재앙은 물러나고 복이 오도록 빌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어 두렵기만 하니, 이제 은혜를 베풀어 조화로운 기운을 부르려고 한다.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참형(斬刑)과 교형(絞刑)의 2가지 죄에 해당하는 죄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놓아주어라. 관리 중에 공법(公法)을 빙자하여 가혹하게 백성을 착취하여 폐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썩은 곡식을 억지로 지급하고 이자를 받거나, 혹은 황폐한 밭에서 세금을 징수하거나, 혹은 급하지도 않은 토목공사를 일으킨 자는 온 나라의 유사(攸司)에 명하여 일체 금지시켜라.”
라고 하였다.

병자. 〈왕이〉 순복전(純福殿)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며 비를 빌었고, 또한 승려들은 산호정(山呼亭)과 불우(佛宇)에 모이게 하여 비를 빌었다.

경진.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임오. 법운사(法雲寺)에서 비를 빌었다.

신묘.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 임존(林存)에게 명하여 『시경(詩經)』의 「운한편(雲漢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6월 계사. 초하루 〈왕이〉 장령전(長齡殿)에 거둥하여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을 강론하게 하였다.

을미. 〈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3일 동안 도량(道場)을 열었다.

기해.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

경자. 백관에게 명하여 나한재(羅漢齋)를 열고 비를 빌게 하였다.

병오. 큰 비가 내렸다.

신유.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로 치사(致仕)한 박경인(朴景仁)이 사망하였다.

가을 7월 기묘. 〈왕이〉 천화사(天和寺)에 행차하였다.

신사. 이수(李壽)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최자성(崔滋盛)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임오.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갔다.

8월 무술.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중죄인의 형량을 결정하였다.

임인.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정미. 〈왕이〉 영릉(英陵)과 숭릉(崇陵)을 배알하고 환궁(還宮)하는 길에 인효원(因孝院)에 들러서 오언시(五言詩) 1수를 지었는데, 시종한 문신들에게 명하여 화답시를 지어 바치라고 하였다.

을묘.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9월 정해.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신묘. 죄수를 재심하였다.

겨울 10월 을미.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갔다.

병신. 회경전(會慶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온 나라에 명을 내려 〈승려〉 30,000에게 반승[齋僧]하였다.

임자. 〈왕이〉 홍원사(洪圓寺)에 행차하였다.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 30여 일 동안 하늘을 가로질렀다.

12월 임진. 〈왕이〉 청연각(淸讌閣)에 거둥하여 송(宋) 황제가 보내준 서적과 그림을 재추(宰樞)와 시신(侍臣)에게 두루 보여주었다.

신축. 〈왕이〉 복원궁(福源宮)에 행차하였다가 그 길로 구산사(龜山寺)와 안화사(安和寺) 두 절에 들렀으며, 옥잠정(玉岑亭)에 거둥하여 호종한 관리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경신. 죄수를 재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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