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2(睿宗二) 6년

 

〈신묘〉 6년(1111) 봄 정월 병인.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덕음(德音)을 반포하여 참형과 교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는 형을 면제시켜 유배 보내고, 유배형 이하의 죄수도 역시 모두 사면하였다. 온 나라의 노인 및 환과고독(鰥寡孤獨), 절부(節婦)와 의부(義夫), 효자(孝子)·순손(順孫)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아울러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무진. 요(遼)에서 태주관내관찰사(泰州管內觀察使) 대중선(大仲宣)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병자.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북변의 여진(女眞) 촌장(村長) 30인을 접견하였다.

계미. 판합문사(判閤門事) 유택(柳澤)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국자사업 어사잡단(國子司業 御史雜端) 홍관(洪灌)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계사. 상림사(上林司)에 도적이 들어 창고지기 여종[婢]을 죽이고 은붙이를 훔쳐갔다.

2월 을미. 임신행(任申幸)을 섭형부상서(攝刑部尙書)에 임명하였다.

정미.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였다.

3월 병인. 왕원(王源)을 광평백(廣平伯)으로 책봉하였다.

신미. 허경(許慶)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유인저(柳仁著)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자겸(李資謙)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김연(金緣)을 비서감 추밀원부사(秘書監 樞密院副使)로, 최계방(崔繼芳)을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 兼 三司使)로, 유자유(柳子維)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조중장(趙仲璋)을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吏部侍郞 知御史臺事)로, 김고(金沽)를 예부시랑 우간의대부(禮部侍郞 右諫議大夫)로, 박승중(朴昇中)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임명하였다.

계미. 궁정(宮庭)에서 서로(庶老) 및 절부(節婦)와 의부(義夫), 효자·순손(順孫)의 남녀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국로(國老)인 상서(尙書)로 치사(致仕)한 임성개(林成槩)와 유택(柳澤) 등에게는 궁전에서 왕이 친히 음식을 권하였는데, 보는 사람 가운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많았다. 임성개는 간언을 적은 소를 바쳤는데 5개 조항 모두가 나라에 관한 큰 일이었다. 평장사로 치사한 김상기(金上琦)는 81세나 되어 왕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후한 예우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김상기(金上琦)가 노환으로 사양하자, 특별히 좌승선(左承宣) 한교여(韓曒如)에게 명령하여 가마를 탄 채 내전에 들 수 있게 하고 들어온 후에도 큰 절을 하지 말도록 분부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럼에도 김상기(金上琦)는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갑신. 해가 붉고 광채가 없었다.

여름 4월 기해. 태묘(太廟)에서 제향을 지냈다.

경술.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

갑인. 우보궐(右補闕) 한충(韓冲)이 상소하여 당시 정책의 득실(得失)을 말하였다.

5월 갑자. 종묘와 사직 및 여러 능과 산천의 신령에게 비를 빌었다.

기사. 문하시중 윤관(尹瓘)이 사망하였다.

이달에 도병마사(都兵馬使) 및 금강고(金剛庫)의 옥상에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그 화살촉이 기와를 뚫었다.

6월 임진.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정유. 임언(林彦)을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로, 최홍정(崔弘正)을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하였다.

경자. 죄수를 재심하고, 경범죄를 지은 죄인은 석방하였다.

가을 7월 갑자. 〈왕이〉 순복전(純福殿)에서 삼청(三淸)의 신령에게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기묘.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강증(康拯)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박경작(朴景綽)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임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연(金緣)과 소부감(小府監) 임유문(林有文)을 송(宋)에 파견하였다.

경인. 왕태후가 편찮아 법왕사(法王寺)로 거처를 옮겼다.

8월 갑오. 〈왕이〉 대궐 뜰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선조가 창건한 천수사(天壽寺)는 지세(地勢)가 불리하니 약사원(藥師院)을 헐고 그 곳으로 옮기길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경술. 〈왕이〉 친히 행차하여 〈천수사를 지을 터의〉 지세(地勢)를 살폈다.

갑인. 김한충(金漢忠)을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임명하였다.

을묘.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9월 기사. 중양연(重陽宴)을 베풀고, 왕이 시를 짓고는 시종한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화답시를 바치게 하였다.

무인. 시종관(侍從官)에게 활을 쏘게 하여, 과녁을 맞힌 사람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이어서 잔치도 베풀었다.

겨울 10월 갑오.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병오. 형부시랑(刑部侍郞) 이자덕(李資德)을 요(遼)에 보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양부(兩府)가 모여 변방의 일을 의논하였다.

무신. 회경전(會慶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했으며, 대궐의 뜰에서 〈승려〉 10,000명에게, 각 주(州)와 부(府)에서 〈승려〉 20,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정사. 왕이 봉은사(奉恩寺)에서 태후에게 문안을 드렸다.

11월 경신. 초하루 유사(有司)에서 천수사(天壽寺)의 신축 공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자, 왕이 그 의견을 따랐다.

예부시랑(禮部侍郞) 이구(李玽)를 요(遼)에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에 사례하였다.

을축. 〈왕이〉 약사원(藥師院)으로 행차하여 천수사(天壽寺) 지을 터를 살펴보았다.

병자. 전중감(殿中監) 김진(金縝)을 요(遼)에 보내 방물을 바치고, 예빈소경(禮賓少卿) 문공언(文公彦)을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12월 병오. 최홍사(崔弘嗣)를 수태부(守太傅)로, 허경(許慶)을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로, 김한충(金漢忠)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유인저(柳仁著)를 수사공(守司空)으로, 이자겸(李資謙)을 검교사공 형부상서(檢校司空 刑部尙書)로, 김상우(金商祐)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고령신(高令臣)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유자유(柳子維)를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이재(李載)를 전중감(殿中監)으로, 홍관(洪灌)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최유(崔濡)와 이자함(李資諴)은 모두 시어사(侍御史)로, 민세륜(閔世倫)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호종단(胡宗旦)을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知制誥)로 임명하였다.

기유. 요(遼)에서 횡사사(橫賜使) 검교사공(檢校司空) 소준례(蕭遵禮)를 보내왔다.

신해.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요(遼) 황제의〉 조서를 받았다.

을묘. 선덕진(宣德鎭) 군졸 정진(鄭珍)과 정주(定州) 사람 백파(白巴)가 일찍이 죄를 짓고 여진(女眞)으로 도망쳐 들어가 그들과 변방을 침범하려고 모의하였다. 정진(鄭珍)의 어미가 원흥진(元興鎭)에 있었는데 밤 2고(二鼓)에 정진(鄭珍)과 백파(白巴)가 여진인 골부(骨夫)와 함께 몰래 들어와 그 어미를 슬그머니 데리고 가려 하였다. 병마사(兵馬使)가 군졸을 보내 그들을 붙잡아 죽이고 아울러 무기도 노획하자,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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