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2(睿宗二) 8년

 

〈계사〉 8년(1113) 봄 정월 을묘. 요(遼)에서 숭록경(崇祿卿) 장여회(張如晦)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임신. 요(遼)에서 칙제사(勑祭使)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야율고(耶律固)와 대상소경(大常少卿) 왕신(王侁)을 보냈다.

계유. 지형부사(知刑部事) 이재(李載)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태부소경(太府少卿) 지숙연(智淑延)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갑술. 요(遼)에서 칙조사(勑弔使) 태주관내관찰사(泰州管內觀察使) 소천(蕭辿)을 보냈다.

병자. 요(遼) 사신이 우궁(虞宮)에서 태후에게 제사를 지내자 왕도 우궁(虞宮)으로 나아갔다.

무인. 요(遼)에서 숭록경(崇祿卿) 양거직(楊擧直)을 보내 왕에게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고려의 왕은〉 조상의 나라를 이어받아 왕의 봉토를 공손히 지켰다. 얼마 전에 〈태후의〉상을 당하여 지팡이에 의지할 정도로 몸을 해쳤다. 이에 상복(喪服)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리니 나라를 다스리는 권위를 욕되게 하지 말라. 마땅히 위로하는 뜻을 체득(體得)하여 오직 공경히 이행하라.”
라고 하였다. 고신(告身)을 내려 이르기를,
“인수(印綬)와 봉토를 내려주어 선대의 위업을 잇게 한 것은 바로 남다른 은혜를 보이는 것이고, 〈상복인〉 묵최(墨衰)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나랏일을 보게 하여 슬픈 마음을 없애는 것은 잠시 예법을 변통한 것이니 이에 고전(古典)에 의거하여 권고하려 한다. 그대는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신령한 정기[象緯之靈]를 받았고 하늘과 땅[玄黃]의 기운을 타고 나 압록강 너머까지 아름다운 명성을 떨쳤으며 계림을 잘 보전하여 덕망을 널리 전하였다. 또한 백성을 훌륭하게 보호하고 이끌었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도모하였다. 바야흐로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을 정성껏 수행하였는데 어찌 갑자기 댁(宅)에 재난이란 말인가? 이제 길일을 택하고 더불어 기복(起復)을 선언한다.
전 추성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위 겸 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推誠奉國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尉 兼 中書令 上柱國 高麗國王), 식읍(食邑) 3,000호, 식실봉(食實封) 1,500호인 왕우(王俁)는 우리 조정으로부터 활과 도끼를 하사받는 영광과 봉토를 계승하는 경사를 누렸다. 옥이 서로 부딪쳐 낭랑하게 울리듯[桓鎭琅琅] 본래부터 나라의 귀중한 인물이 되기에 흠이 없고 늘 푸른 나무가 엄숙하고 고요하게 뻗듯 나면서부터 으뜸의 인재가 될 재질을 갖추었다. 게다가 가정에서 올바른 규범과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말씨는 명분과 이치를 모두 갖추어, 이어받은 자신의 나라를 흥성케 하고 선조의 공로를 훌륭하게 계승하였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사대(事大)의 정성을 나타내고 제후로서 법에 맞게 행동하여 나라를 지키는 법도를 삼가 조심하였으니, 고려[辰韓]를 잘 다스리기에 흡족하였고 제(齊)와 진(晉)의 지극한 충성을 흠모하였다. 해마다 조공의 예를 소중하게 하여 신하의 도리를 닦는 것[北面之力]을 부지런히 하였으며, 때맞추어 병기(兵器)와 병마(兵馬)를 단단하게 하여 동쪽을 돌아보는 우려를 덜게 해주었다. 근래에 태후의 상[靜樹纏悲]을 당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더 이상 봉양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사람과 같은 예절을 한결같이 하고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 하려고 하겠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하루라도 비울 수 없으니 상을 당해 얼굴이 수척해지도록 슬퍼하고 언행을 조심하는 것[毁容銜恤]을 어찌 3년이나 기약하겠는가? 이에 지금 형편에 따라 다스리게 하려 하니 옷은 금과 구슬로 장식하고, 말과 바퀴를 임금이 타는 수레에 매고 타뉴(駝紐)의 인장(印章)을 더욱 빛나게 하라.
아아! 고려[日域]의 모든 강역은 천명을 받은 귀중한 땅으로, 〈고려왕의〉 위계는 오후(五侯)와 구백(九伯)의 으뜸이 되고, 품계는 사보(四輔)와 삼공(三公)과도 동일하다. 하물며 선대로부터 종묘를 받들 때 쓰는 의례와 제기(祭器)가 모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그대가 몸소 특별하게 갖추어 놓은 의장들이 모두 빛을 내고 있다.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땅히 모든 제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니, 나의 큰 가르침을 힘써 따라서 영원토록 많은 복을 누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2월 경인. 야율고(耶律固) 등이 장차 〈요(遼)에〉 돌아가려고 하면서 『춘추석례(春秋釋例)』와 『금화영주집(金華瀛州集)』을 요청하자, 왕이 각각 1부씩 주었다.

궁궐의 남쪽과 서쪽에 화원(花園) 두 곳을 조성하였다. 당시 환관이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꾸며 왕에게 잘 보이려고 하였다. 누각과 정자를 세우고 담장을 높게 두르며, 민가의 화초를 찾아내어 그 안에 옮겨 심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서 또 송(宋) 상인들로부터 사들이니 그 비용을 내탕(內帑)의 돈과 재물로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전국에 수많은 절을 짓고 온갖 건축공사를 일으켜서 비난하는 여론이 떠들썩하게 일어났다. 이윽고 2개의 화원을 모두 없앴다.

을미. 허경(許慶)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檢校太尉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최정(崔挺)를 검교사도 참지정사(檢校司徒 參知政事)로 삼고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송수(宋秀)를 신호위상장군 공부상서(神虎衛上將軍 工部尙書)로, 윤유지(尹惟志)를 좌우위상장군 섭형부상서(左右衛上將軍 攝刑部尙書)로 임명하였다.

무술.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해.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여 재(齋)를 열었다.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형부(刑部)의 남쪽 거리에 이르렀을 때, 옥에 갇힌 죄수들이 임금의 수레를 바라보고 한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에 왕이 근신에게 명령하여 감옥으로 가서 술을 내려주고, 경범죄를 지은 죄수는 석방하였다.

3월 임자. 초하루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태양(大陽)이 곧 이지러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구름이 두껍게 끼어서 보이지 않았다. 이에 문하시중(門下侍中) 김경용(金景庸)이 모든 관리를 이끌고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병인. 왕이 편찮아, 백관(百官)이 회경전(會慶殿)에서 크게 초제(醮祭)를 열고 〈왕의 쾌유를〉 빌었다.

정묘. 죄수를 윤4월 신유 궁궐의 뜰에서 〈왕이〉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재심하였다.

무신. 백관(百官)이 또 신중원(神衆院)에서 〈왕의 쾌유를〉 빌었다.

무인. 이자겸(李資謙)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김연(金緣)을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 知樞密院事)로, 유자유(柳子維)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강증(康拯)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김지화(金至和)를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이재(李載)를 어사대부 문덕전학사(御史大夫 文德殿學士)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기해. 〈왕이〉 80세 이상의 노인 및 효자·순손(順孫), 의부(義夫)와 절부(節婦),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 그리고 병을 앓는 자들에게 친히 음식을 대접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치사한 임성개(林成槩)에게는 특별히 명을 내려 가마를 탄 채 내전에 들게 하였으며, 궁궐 안에서 잔치를 베풀어 친히 음식을 권하고 의복도 하사하였다.

무신. 구요당(九曜堂)에서 3일 동안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윤4월 신유. 궁궐의 뜰에서 〈왕이〉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진. 죄수를 재심하였다.

경오. 여진(女眞)의 오라골(烏羅骨)·실현(實顯) 등이 와서 9성의 반환을 사례하고 명마(名馬)와 품질이 우수한 금을 바쳤다.

5월 을유. 왕이 태후의 우궁(虞宮)에 참배했다.

무자. 송(宋) 도강(都綱) 진수(陳守)가 백한(白鷴)을 바쳤다.

신축.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인저(柳仁著)가 사망하였다.

6월 경술.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진도현(珍島縣) 백성 한백(漢白) 등 8인이 장사하기 위해 탁라도(乇羅島)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송(宋) 명주(明州)에 이르렀다. 〈명주에서〉 송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이들에게 각각 비단 20필과 쌀 2석을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기미. 죄수를 재심하였다.

기사. 사직(社稷)과 여러 명산[群望]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갑술. 조중장(趙仲璋)을 전중감(殿中監)에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기묘. 초하루 최계방(崔繼芳)을 수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守司空 兵部尙書 叅知政事)로, 고령신(高令臣)을 검교사공 참지정사(檢校司空 叅知政事)로, 유자유(柳子維)를 수사공(守司空)으로, 조중장(趙仲璋)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김준(金晙)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강증(康拯)을 호부상서 삼사사(三司使)로, 김고(金沽)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김숙평(金叔平)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하였다.

을유. 공부상서(工部尙書) 김지화(金至和)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어사잡단(御史雜端) 이순해(李舜諧)를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계사.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초상을 개국사(開國寺)에 있는 숙종(肅宗) 진전(眞殿)에 봉안하였다.

8월 정묘.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9월 을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 안직숭(安稷崇)을 송(宋)에 파견하여 송 명주(明州)에 첩을 보내 이르기를 “지난해 입조(入朝)했던 김연(金緣) 등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자의 궁궐에 입조하니 관반(館伴)인 장내한(張內翰) 등이 내년에도 또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행사[禋祀]가 있을 터이니 사신을 입조시켜 대례를 참관할 것을 국왕께 품신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즉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모친께서 훙서하셔서 상황이 어렵게 되는 바람에 금년에는 사신을 입조시켜 예의와 정리를 전달할 겨를이 없게 되었습니다. 청하건대 밝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을사.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갔다가 경천사(慶天寺)의 낙성식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임술.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영(李永)을 요(遼)에 보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갑자. 왕이 환궁(還宮)하였다.

경오. 예부상서(禮部尙書) 홍관(洪灌)과 형부시랑(刑部侍郞) 김의원(金義元)을 요(遼)에 보내 〈왕태후의〉 상사를 조문한 것을 사례하였다.

신미. 회경전(會慶殿)에서 3일 동안 백좌회(百座會)를 열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하게 하였으며, 구정(毬庭)에서 〈승려〉 10,000명, 주(州)·부(府)에서 〈승려〉 20,000명에게 반승[齋僧]하였다.

11월 경진. 비서소감(秘書少監) 한충(韓冲)을 요(遼)에 보내어 기복사(起復使) 파견에 사례하였다.

을유. 왕이 태후의 우궁(虞宮)에 참배하였다.

병술. 공부시랑(工部侍郞) 이무영(李茂榮)을 요(遼)에 보내어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 사례하였다.

갑오. 전중감(殿中監) 최홍재(崔弘宰)를 요(遼)에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병신.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김연(金緣)과 시강학사(侍講學士) 박승중(朴昇中) 등이 『시정책요(時政策要)』 5책을 편찬하여 올리자 각각 서대(犀帶)를 하사하였고, 편수관(編修官) 김부철(金富轍) 이하에게도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호부시랑(戶部侍郞) 이자함(李資諴)을 요(遼)에 하정사(賀正使)로 보냈다.

12월 무신. 초하루 죄수를 재심하고, 경범죄를 지은 죄수를 석방하였다.

병진. 김경용(金景庸)을 수태부 판상서이부사(守太傅 判尙書吏部事)로, 오연총(吳延寵)을 수태위 판예·병부사 상주국(守太尉 判禮·兵部事 上柱國)으로, 이위(李瑋)를 수태위 상주국(守太尉 上柱國)으로, 최계방(崔繼芳)을 상서좌복야 판삼사사 주국(尙書左僕射 判三司事 柱國)으로, 김연(金緣)을 예부상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禮部尙書 政堂文學 判翰林院事)로, 조중장(趙仲璋)을 병부상서 추밀원사(兵部尙書 樞密院使)로, 유자유(柳子維)를 상서우복야 판공부사(尙書右僕射 判工部事)로, 이자겸(李資謙)을 검교사도 주국(檢校司徒 柱國)으로, 유재(劉載)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강증(康拯)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김준(金晙)을 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 同知樞密院事)로, 김지화(金至和)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사영(史榮)을 섭공부상서 삼사사(攝工部尙書 三司使)로, 김약온(金若溫)을 지상서도성사(知尙書都省事)로, 박경작(朴景綽)을 전중감 한림학사(殿中監 翰林學士)로, 왕자지(王字之)를 예빈경 추밀원지주사(禮賓卿 樞密院知奏事)로 임명하였다.

갑술. 예빈소경(禮賓少卿) 김경청(金景淸)을 요(遼)에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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