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1(毅宗一) 6년
〈임신〉 6년(1152) 봄 정월 정유. 초하루 조하(朝賀)를 생략하였다.
신해.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계축. 강안전(康安殿)에 거둥하여 채붕(綵棚)과 악관[伶官]이 연주하는 양부악(兩部樂)을 관람하였다. 전날 저녁 이미 연등대회(燃燈大會)를 행하였으므로 모두 이미 〈채붕 등을〉 철거한 뒤였으나, 왕이 빨리 다시 설치하라고 명하고 피로를 잊고 즐겁게 구경하다가, 한낮이 되어 파하였다.
2월 경오. 왕이 친히 외제석원(外帝釋院)에서 재(齋)를 열었다.
을미.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가 이윽고 흥성사(興盛寺)에 행차하였다.
3월 병신. 초하루 지진이 났다.
경자. 간관(諫官)이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3일간 시사(時事)를 간언하였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임인. 명인전(明仁殿)에서 불사(佛事)를 행하고 왕이 행향(行香)하였다.
병오.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무신. 내전(內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을묘. 상춘정(賞春亭)에서 연회하면서 악관[伶官]으로 하여금 연주와 잡희(雜戱) 번갈아 하게 하였다.
임술.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한발(旱魃)이 혹심하므로 짐이 심히 우려하여 장차 널리 충언을 듣고 힘써 다스림으로써 화기(和氣)를 부르려 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臺諫)이 각자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지적하고 진술하였다.
여름 4월 을축. 초하루 내전(內殿)에서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인. 지진이 났다.
정묘. 만수정(萬壽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새벽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임신. 내전(內殿)에서 북두(北斗)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정축. 밤에 상춘정(賞春亭)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기묘. 산천(山川) 및 여러 신사(神祠)에서 비를 빌었다. 내전(內殿)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내고, 복원궁(福源宮)에서 태일(太一)에 초제를 올렸다.
경진. 문공원(文公元)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유필(庾弼)을 수국사(修國史)로, 김영석(金永錫)과 최자영(崔子英)을 검교사도(檢校司徒)로, 최윤의(崔允儀)를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문공유(文公裕)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김자의(金子儀)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김택(金澤)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삼았다.
신사. 간관(諫官)이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격구(擊毬)에 대해 간언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간관이 마침내 한림원(翰林院)에서 유숙(留宿)하니, 왕이 술을 내려 위로하고 회유하여 말하기를, “간언한 바가 지극히 간절하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음날 남김없이 〈격구용〉 여러 말을 내보내고 일관(日官)에게 명하여 북문(北門)을 닫도록 하였다.
병술. 산천(山川) 및 여러 신사(神祠)에서 비를 빌었다.
경인. 김의(金儀) 등에게 급제(及第)를 하사하였다.
병신. 밤중에 환자(宦者)인 급사(給事) 이균(李鈞)이 동지(東池)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자, 왕이 안타깝게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
5월 임인. 대관전(大觀殿)에 거둥하여 친시(親試)를 행하고 유희(劉羲)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갑진. 왕이 안화사(安和寺)로 거처를 옮기었다.
6월 갑자.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미.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었다.
무인. 왕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기묘. 내전(內殿)에서 태일(太一)에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진. 개국사(開國寺)에서 기근에 시달리는 자와 역질(疫疾)에 걸린 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계미.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을 열었다. 이날 수창궁(壽昌宮)에 돌아와 명인전(明仁殿)에서 72성(星)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태일(太一) 및 16신(神)에게 초제를 올려 역질(疫疾)을 물리쳐 달라 기도하였다.
가을 7월 갑오. 초하루 산천(山川)과 여러 신사(神祠)에 비를 빌었다. 내전(內殿)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갑인. 송(宋) 도강(都綱) 허서(許序) 등 49인이 왔다.
을묘. 대간(臺諫)이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시사(時事)를 논하고 간언하므로, 이에 내시(內侍) 14인과 다방(茶房) 5인을 쫓아내었다.
병진. 송(宋) 도강(都綱) 황붕(黃鵬) 등 91인이 왔다.
8월 병인. 형부(刑部)가 중형(重刑)에 대하여 아뢰니 왕과 대신이 다시 심의하여 처결하였다.
기사. 송(宋) 도강(都綱) 요제(寥悌) 등 77인이 왔다.
경오. 새로 지은 궁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정해. 대관전(大觀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5일간 열었다.
9월 임진. 초하루 대관전(大觀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열었다.
무술. 백관이 만보전(萬寶殿)에 이르러 태후(太后)의 곤령절(坤寧節)을 하례하였다.
경자. 동지(東池)에 거둥하여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자를 선발하고 밤늦게까지 활쏘기를 보았다.
신축.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었다.
병진.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여 나한재(羅漢齋)를 열었다.
겨울 10월 계해.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11월 무술. 유공재(柳公材)를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경자. 박언추(朴彦樞)를 〈금(金)에〉 사신으로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게 하였다.
갑진.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금(金)에서 완안지정(完顔持正)을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이돈(李惇)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임자. 대관전(大觀殿)에서 금(金)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을묘. 민각(閔慤)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12월 병인 유필(庾弼)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최윤의(崔允儀)을 태부(太傅)로 삼았다.
정묘.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관(崔灌)이 사망하자 3일간 조회를 중단하였다.
신미. 경범죄자를 풀어주었다.
을해. 밤에 왕이 내전(內殿)에서 백희(百戱)를 관람하였다.
병술. 문공원(文公元)과 유필(庾弼)을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 同平章事)로, 김영석(金永錫)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최자영(崔子英)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최함(崔諴)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최윤의(崔允儀)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임극충(任克忠)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김자의(金子儀)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문공유(文公裕)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김택(金澤)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오인광(吳仁廣)을 시공부상서(試工部尙書)로, 김이영(金貽永)을 지도성사(知都省事)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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