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1(顯宗一) 2년

 

신해(辛亥) 2년(1011) 봄 정월 을해(乙亥). 초하루 거란주(契丹主)가 개경(開京)에 들어가 태묘(大廟), 궁궐(宮闕), 민가[民屋]를 불살라서 모두 탔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묵었다.

정축(丁丑). 왕을 호종하던 여러 신하가 하공진(河拱辰) 등이 잡혔다는 것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 뿔뿔이 도망쳤으며, 오직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채충순(蔡忠順),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만이 떠나지 않았다.

무인(戊寅). 왕이 광주(廣州)에서 출발하여 비뇌역(鼻腦驛)에 묵었다.

임오(壬午). 장곡역(長谷驛)에 묵었다.

을유(乙酉). 거란군[丹兵]이 물러났다.

병술(丙戌). 왕이 인의현(仁義縣)을 지나 수다역(水多驛)에 묵었다.

정해(丁亥).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들어갔다.

을미(乙未). 왕이 가마를 돌려 복룡역(伏龍驛)에 묵었다.

무술(戊戌). 고부군(古阜郡)에 묵었다.

기해(己亥). 금구현(金溝縣)에 묵었다.

경자(庚子). 전주(全州)에 도착하여 7일 동안 머물렀다.

임인(壬寅).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거란군(契丹軍)과 싸우다 죽었다.

계묘(癸卯). 거란주(契丹主)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물러났다.

채충순(蔡忠順)을 비서감(秘書監)으로, 박섬(朴暹)을 사재경(司宰卿)으로, 주저(周佇)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禮部侍郞 中樞院直學士)로, 한창필(韓昌弼)을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으로 임명하였다. 박섬(朴暹)은 안북(安北)에서 도망쳐 개경(開京)으로 돌아와서 가족을 이끌고 그의 고향인 무안현(務安縣)으로 갔는데, 도중에 왕의 수레를 만나 왕을 따라 나주(羅州)까지 왔으나 얼마 뒤에 사직하고 돌아갔다. 또 거란군(契丹軍)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왕을 알현하였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으나, 당시 여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2월 정미(丁未). 전주(全州)를 출발하여 여양현(礪陽縣)에 묵었다.

무신(戊申).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6일 동안 머물면서 김은부(金殷傅)의 큰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경술(庚戌). 김계부(金繼夫)를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이단(李端)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으로 임명하였다.

정사(丁巳). 청주(淸州)에 묵었다.

기미(己未). 행궁(行宮)에서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이후로는 항례적으로 2월 보름에 행하였다.

경신(庚申). 청주(淸州)를 출발하였다.

정묘(丁卯).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갔다.

기사(己巳). 형부(刑部)에서 아뢰기를, “유언경(劉彦卿)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은혜 갚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솔선하여 적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그의 처자를 유배보내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3월 무자(戊子). 탁사정(卓思政)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였다.

신축(辛丑). 유진(劉瑨)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조지린(趙之遴)과 최사위(崔士威)를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정미(丁未). 탁사정(卓思政)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오래도록 가물었기 때문에 종묘(宗廟)에서 기우제[禱雨]를 지냈다. 시장[市肆]을 옮기고 도축을 금지하며 일산(日傘, 繖)과 부채(扇)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사하며 가난하고 처지가 곤란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기유(己酉). 황보유의(皇甫兪義)와 최창(崔昌)을 모두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고, 유소(柳韶)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김종현(金宗鉉)과 박종검(朴從儉)을 모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하였다.

임자(壬子). 전쟁에서 죽은 중승(中丞) 노정(盧頲)을 예빈경(禮賓卿)으로 추증하였다.

병진(丙辰). 전쟁에서 죽은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과 신영한(申寧漢), 낭장(郞將) 원태(元泰), 별장(別將) 최원(崔元), 습유(拾遺) 승리인(乘里仁), 태사승(太史丞) 유인택(柳仁澤)의 집에 쌀과 베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정사(丁巳). 유사(有司)에 명하여 전국의 전사자(戰死者) 해골을 수습하여 묻어주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재상(宰相)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논어(論語)』에서 이르기를, ‘위태로운데도 지키지 않고 넘어지는데도 붙들지 않는다면 장차 저런 재상(宰相)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였고, 『서경(書經)』에서 이르기를,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인(聖人)이 된다.’라고 하였다. 군신(君臣)의 의리상 바로잡고 구제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스스로 외람되게 왕위를 계승하여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두루 겪었으며, 밤낮으로 부끄러움과 다투며 그 허물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은 부족한 것을 힘써 도와주고, 또 면전에서만 순종함은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정(李靖)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최보성(崔輔成)을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하였다.

신유(辛酉). 송악(松嶽)에서 기우제[禱雨]를 지냈더니, 큰 비가 내렸다.

을축(乙丑). 공부낭중(工部郞中) 왕첨(王瞻)을 거란(契丹)에 보내 군대를 돌린 것을 사례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려고 태사(太史)에 명하여 점을 쳤는데, ‘건지고(乾之蠱)’의 괘가 나오자 아뢰기를, “건(乾)은 임금이요 아비이므로 건(乾)이 튼튼하면 어떤 일도 통하지 않음이 없고, 구오(九五)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라고 합니다. 고(蠱)괘는 ‘높은 자가 위에 있고 낮은 자가 아래에 있다.’는 것으로, 이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형상이므로 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묘(丁卯). 영빈관(迎賓館)과 회선관(會仙館)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5월 을해(乙亥).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추장(酋長) 조을두(鉏乙豆)가 무리 70인을 인솔하고 와서 토산물[方物]을 바쳤으므로 각각 의복과 은그릇을 하사하였다.

무인(戊寅). 유방(庾方)을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상장군(上將軍)으로, 최현민(崔賢敏)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김심언(金審言)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최충(崔冲)을 우습유(右拾遺)로 임명하였다.

정해(丁亥). 평양(平壤)의 목멱(木覓)·교연(橋淵)·도지암(道知巖)·동명왕(東明王) 등의 신령에게 훈호(勳號)를 더하였다.

정유(丁酉). 박승(朴昇)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하였다.

6월 계묘(癸卯). 초하루 강감찬(姜邯贊)을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 承旨)로 임명하였다.

정묘(丁卯). 이정(李靖)을 전중감(殿中監)으로, 손몽주(孫夢周)를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계유(癸酉). 최사위(崔士威)를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장연우(張延祐)와 채충순(蔡忠順)을 모두 중추사(中樞使)로 임명하였다.

갑신(甲申). 형부(刑部)에서 아뢰기를, “낭중(郞中) 백행린(白行隣)은 남행(南行)하실 때 도읍에 머물러있으면서 스스로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 칭하고, 이인례(李因禮)·거정(巨貞) 등과 함께 노비[徒奴]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었지만 적을 만나 싸워보지도 못하고 와해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삭제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임진(壬辰).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작년 거란(契丹)이 서경(西京)을 포위하였을 때, 승려[沙門] 법언(法言)이 의를 보고 용맹을 떨쳐 살기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므로 수좌(首座)에 추증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8월 계묘(癸卯). 형부(刑部)에서 아뢰기를, “조용겸(趙容謙)·유승건(柳僧虔)·이재(李載)·최즙(崔檝)·최성의(崔成義)·임탁(林卓)이 남행하실 때 행궁(行宮)에서 경거망동하였으니, 이름을 삭제하고 유배 보내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갑진(甲辰). 양진(梁稹)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였다.

을사(乙巳). 문인위(文仁渭)를 우복야(右僕射)로, 박충숙(朴忠淑)을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임명하였다.

경술(庚戌). 장연우(張延祐)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병진(丙辰). 강조(康兆)의 당여를 논책하여 탁사정(卓思政)·박승(朴昇)·최창(崔昌)·위종정(魏從政)·강은(康隱)을 섬으로 유배보냈다.

정사(丁巳).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이부낭중(吏部郞中)으로, 유소(柳韶)를 시어사(侍御史)로, 조자기(曹子奇)와 이택성(李擇成)을 모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이인택(李仁澤)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하였다.

을축(乙丑).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원신(崔元信)을 거란(契丹)에 보냈다.

병인(丙寅). 왕이 관인전(寬仁殿)의 문에 행차하여 늙은이[耆老], 고아(孤獨), 자식이 없는 사람[篤疾者],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잔치를 열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기사(己巳). 참지정사(叅知政事) 최사위(崔士威)를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임명하였다.

이 달에 송악성(松嶽城)을 더 수리하고, 서경(西京)에 황성(皇城)을 쌓았다.

동여진(東女眞)의 배 1백여 척이 경주(慶州)를 침략하였다.

9월 병자(丙子).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 조지린(趙之遴)이 죽었다.

최사위(崔士威)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박섬(朴暹)을 장작감(將作監)으로, 강의(康義)를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박종검(朴從儉)을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였다.

을유(乙酉). 탐라(耽羅)가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기(朱記)를 하사할 것을 간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임진(壬辰). 이방(李昉)을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경자(庚子). 초하루 병부상서(兵部尙書) 유방(庾方)을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叅知政事 西京留守 兼 西北面行營都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을축(乙丑). 도관낭중(都官郞中) 김숭의(金崇義)를 거란(契丹)에 보내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상서(尙書) 장연제(張延䄞)에게 명령하여 궁궐을 수리하게 하였다.

11월 임오(壬午). 형부시랑(刑部侍郞) 김은부(金殷傅)를 거란(契丹)에 보내 생신을 하례하였다.

12월 기유(己酉). 문인위(文仁渭)를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이 달에 거란(契丹)이 하공진(河拱辰)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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