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2(太祖二) 19년~20년

 

19년(936) 봄 2월 견훤(甄萱)의 사위 장군(將軍) 박영규(朴英規)가 귀부(歸附)를 요청하였다.

여름 6월 견훤(甄萱)이 요청하여 말하기를, “늙은 신하(老臣)가 멀리 바다를 건너 성군(聖君)의 교화(敎化)에 내투(來投)하였으니, 바라건대 그 위엄에 기대어 역적 아들을 베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처음엔 때를 기다려서 움직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간절한 요청을 불쌍히 여겨 그의 의견을 따랐다. 먼저 정윤(正胤) 왕무(王武)와 장군(將軍) 박술희(朴述希)를 보내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나아가게 하였다.

가을 9월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병력을 합하고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자 신검(神劒)이 무력으로 역공(逆攻)하였다.

갑오(甲午).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陣)을 친 뒤 왕이 견훤(甄萱)과 더불어 군대를 사열(査閱)하였다. 견훤(甄萱)과 대상(大相) 견권(堅權)·박술희(朴述希)·황보금산(皇甫金山) 및 원윤(元尹) 강유영(康柔英) 등이 마군(馬軍) 10,000명을 거느리게 하고,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 원윤(元尹) 능달(能達)·기언(奇言)·한순명(韓順明)·흔악(昕岳)과 정조(正朝) 영직(英直)·광세(廣世) 등에게 보군(步軍) 10,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좌강(左綱)으로 삼았다. 대상(大相) 김철(金鐵)·홍유(洪儒)·박수경(朴守卿)과 원보(元甫) 연주(連珠), 원윤(元尹) 훤량(萱良) 등에게 마군(馬軍) 10,000명을 거느리게 하고, 보천군대장군(補天軍大將軍) 원윤(元尹) 삼순(三順)·준량(俊良), 정조(正朝) 영유(英儒)·길강충(吉康忠)·흔계(昕繼) 등에게 보군 10,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우강(右綱)으로 삼았다. 명주(溟州)의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大相) 긍준(兢俊)·왕렴(王廉)·왕예(王乂) 및 원보(元甫) 인일(仁一) 등에게 마군 20,000명을 거느리게 하고,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과 원윤(元尹)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여러 번(蕃)의 정예 기병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우천군대장군(祐天軍大將軍)인 원윤(元尹) 정순(貞順)과 정조 애진(哀珍) 등에게 보군 1,000명을 거느리게 하고, 천무군대장군(天武軍大將軍)인 원윤(元尹) 종희(宗熙)와 정조(正朝) 견훤(見萱) 등에게 보군 1,000명을 거느리게 하며, 간천군대장군(杆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과 원보(元甫) 조간(助杆) 등에게 보군 1,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또 대장군(大將軍)인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원윤(元尹) 능필(能弼) 및 장군(將軍) 왕함윤(王含允) 등에게 기병 300명과 여러 성의 군사 14,700명을 거느리게 해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으로 삼았다. 북을 울리며 앞으로 전진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생겼는데, 그 모양이 창검 형상으로 우리 진영 상공에서 일어나 적진(敵陣)을 향하여 날아갔다.

후백제(後百濟) 좌장군(左將軍)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 4인은 군세가 크게 성한 것을 보자 갑옷을 벗고 창을 던져 견훤(甄萱)이 탄 말 앞으로 와서 항복하니, 이에 적병(賊兵)이 기세를 잃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이 효봉(孝奉) 등의 노고를 위로하고 신검(神劒)이 있는 곳을 묻자 효봉(孝奉) 등이 말하기를, “중군(中軍)에 있으니 좌우에서 협격(夾擊)하면 반드시 깨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장군(大將軍)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中軍)을 치게 하고는 삼군(三軍)이 나란히 나아가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장군(將軍) 흔강(昕康)·견달(見達)·은술(殷述)·금식(今式)·우봉(又奉) 등 3,200인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머리를 베니, 적병이 창을 반대로 돌려 서로 싸웠다. 아군(我軍)이 쫓아 황산군(黃山郡)에 이르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영(營)을 세워 머무르자, 신검(神劒)이 동생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劒)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劒) 및 문무관료와 함께 항복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힘써 위로하고 해당 관청[攸司]에 명하여 사로잡은 후백제(後百濟)의 장사(將士) 3,200인을 아울러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오직 흔강(昕康)·부달(富達)·우봉(又奉)·견달(見達) 등 40인만은 그들의 처자와 함께 개경(開京)으로 보내었다. 능환(能奐)을 앞에 놓고 꾸짖어 말하기를, “처음 양검(良劒) 등과 더불어 임금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를 꾀한 자는 너였다. 신하된 자의 의리가 이래서야 마땅하겠는가?”라고 하자, 능환(能奐)이 머리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목을 베고 양검(良劒)과 용검(龍劒)을 진주(眞州)로 유배 보냈다가 이후에 죽였다. 신검(神劒)이 왕위에 참람(僭濫)하게 오른 것은 다른 사람들이 협박한 것으로, 죄가 두 아우보다 가볍고 또한 귀부(歸附)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에 견훤(甄萱)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며칠 후 황산(黃山)의 절에서 죽었다. 왕이 후백제(後百濟)의 도성으로 들어가 명령하기를, “큰 괴수가 항복하였으니 나의 백성을 범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어 장병들을 위문하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으며 군령(軍令)을 엄격하고 밝게 하여 조금도 범하지 않게 하니, 이에 고을마다 편안해지고 늙은이나 어린이 할 것 없이 다 만세를 부르면서 서로 경사스러워하며 말하기를, “임금께서 오셨으니 우리가 다시 살아났네.”라고 하였다.

이 달에 왕이 후백제(後百濟)에서 돌아와 위봉루(威鳳樓)에 임어(臨御)하여 문무백관 및 백성의 하례를 받았다.

왕이 이미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신하된 자들로 하여금 예절을 밝히려고 드디어 스스로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지어 전국에 반포하였다.

겨울 12월 정유(丁酉), 대광(大匡) 배현경(裴玄慶)이 죽었다.

이 해에 광흥사(廣興寺)·현성사(現聖寺)·미륵사(彌勒寺)·내천왕사(內天王寺) 등을 창건하고 또 연산(連山)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였다.

20년(937) 여름 5월 계축(癸丑), 김부(金傅)가 금(金)을 상감(象嵌)하고 옥(玉)을 넣은 네모진 허리띠(腰帶)를 바쳤는데 길이가 10발[圍]이고 대구(帶鉤)가 62개였다. 신라(新羅)에서 보물로 간직한 지 거의 400년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 불렀다. 왕은 이를 받고 원윤(元尹) 익훤(弋萱)에게 명하여 물장성(物藏省)에 보관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新羅)의 사신 김율(金律)이 왔을 때 왕이 묻기를, “내가 들으니 신라(新羅)에는세 가지 큰 보물(三寶)이 있는데 장육금상(丈六金像)과 9층탑(九層塔), 아울러 성제대(聖帝帶)라고 하며 세 보물을 잃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소. 탑과 불상은 그대로 있으나 성대(聖帶)는 알지 못하겠는데, 지금 남아 있는가?”라고 하였다.

김율(金律)이 대답하기를, “저는 일찍이 성대(聖帶)에 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귀한 신하가 되어서도 어찌 나라의 큰 보물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니 김율(金律)이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 신라왕(新羅王)에게 보고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으나 능히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때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 아흔 살이 넘은 자가 있어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성대는 진평대왕(眞平大王)께서 걸치던 것으로 여러 대를 이어 전해지다가 남고(南庫)에 보관되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드디어 남고(南庫)를 열었더니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고 낮이 밤처럼 어두워져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날을 잡아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찾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眞平王)이 성골(聖骨)의 왕이었기에 이를 성제대(聖帝帶)라고 일컬었다.

왕규(王規)와 형순(邢順)을 후진(後晋)에 보내 황제의 등극(登極)을 축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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