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통일신라-고려 조각전통 조화 아름다운 삼존불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보물 1747호 ‘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조선 1450년, 11.2×11.4cm)’ 앞 뒷모습.

 

조선 초기 불교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불상 복장 발원문(34.2×36.4cm)’.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佛寶)사찰 영축산 통도사는 646(선덕여왕 15)년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와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다. 진신사리는 금강계단에 모셨다. 스님들은 이곳에서 계를 받아 득도했다. 출가 수행자들은 부처님 진신사리 앞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을 서원했고, 영축산의 품에서 수행하며 깨달음을 구했다. 이렇듯 역대 조사들의 지혜와 수행이 깃든 통도사에는 많은 성보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오늘 소개할 성보문화재는 1450년 400여명이 함께 조성한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通度寺銀製鍍金阿彌陀如來三尊像)’이다.

금강산 발(發) 아미타삼존불
흥선대원군이 쓴 ‘영축산 통도사’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시원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키가 크고 밑동이 굵은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통도사의 장중한 역사가 그대로 느껴진다. 소나무 숲길로 접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으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이 통도사성보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성보박물관으로 사찰 박물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사찰 성보문화재를 현대적으로 관리하고 대중들에게 불교 사상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곳이다. 특히 괘불을 비롯하여 규모가 큰 불화를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소장된 문화재의 종류도 많다.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은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대표문화재이다. 이 불상은 크기가 11.2×11.4cm로 작은 규모이지만, 온화한 부처님의 얼굴, 균형 있는 신체표현과 정교한 조각솜씨가 뛰어난 불상이다. 본래 금강산에서 조성되었으나 스님이 원불로 통도사에 모셔왔다고 전한다. 스승에서 제자에게 이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불상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에는 불상과 사리를 신령스러운 산이나 암벽, 계곡 등에 봉안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는 산악을 숭배하는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강산은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산이라 하여, 불교의 성지로 여겼다. 고려 말기 원나라(1234~1367) 황실을 중심으로 금강산을 숭배하였고, 명나라의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금강산을 참배했다고 한다.

전통문화와 새로운 문화의 조화
이 불상에 대해 한동안 학계에서 통일신라작이라는 설과, 조선 초기작이라는 주장으로 나누어질 만큼 논란이 컸다. 복장이 남아 있어 1450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음에도 이러한 논란에 휩싸였던 이유는 이 불상에 전통적 요소와 새로운 요소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재는 조선시대 불상 양식에 대한 연구가 선학자들에 의해 진척되어 이 불상이 1450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불상의 복장발원문은 조선 초기 불교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존상은 대좌를 포함한 높이가 11cm의 작은 불상이지만 당시 꽤 비쌌던 은을 재료로 조각하고, 그 위에 금을 입혔다. 중앙에 아미타부처님이 삼단으로 된 팔각의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은 본존불의 대좌 좌우에서 뻗은 가지에 있는 대좌에 서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아미타부처님은 항마촉지인(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관음과 대세지보살은 손에 두루마리 경권(經卷)으로 추정되는 가는 봉을 쥐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적당한 신체비례로 안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명상에 잠겨있는 얼굴에 머리 정상의 계주는 뾰족하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도록 대의를 입고 있다. 가슴에 유두를 표현하였고 옷주름은 간략하다.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은 아미타부처님과 흡사한 모습이나 나무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다. 부처님과 다르게 보살상에 어울리는 화려한 목걸이, 팔찌, 귀걸이 장식을 하고, 하늘거리는 천의를 입고 있다.

이 삼존상의 존명은 복장발원문에 ‘미타삼존불’이라고 쓰여 있다. 좌협시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우협시 대세지보살은 보관에 정병이 새겨져 있어 <관무량수경>에 등장하는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이 아미타부처님은 왜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유한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짓고 계신 걸까.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중국 원명 교체기의 중국불상에는 불상의 존명과 상관없이 촉지인을 한 불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중국불상의 영향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삼존상에 나타난 전통과 새로운 양식은 무엇일까. 전통적 요소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불상 양식이 반영된 것을 뜻한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대좌에는 삼단의 형태가 종종 표현되는데,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보살상의 천의와 U형으로 흘러내린 부드러운 옷주름의 표현도 통일신라시기 특징이다.

반면 새로운 요소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불상에 영향을 주었던 티베트밀교인 라마교(喇嘛敎)의 미술양식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원대 왕실에서 크게 성행하였고 명대와 청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요소이다. 이러한 외래문화의 유입은 우리나라 불상뿐만 아니라 사리기와 탑 등 불교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미타부처님의 뾰족한 정상계주, 촉지인을 한 수인, 한쪽 어깨와 가슴을 드러낸 채 옷을 입은 형식, 명상에 잠긴 얼굴, 보살상의 나무형의 보관 장식 등은 티베트불상의 영향이 반영된 특징들로 꼽을 수 있다.

 

400여 대중과 나옹화상 발원문
아미타부처님의 대좌 바닥에는 2.2㎝의 복장공이 있다. 그 안에서 복장기록을 비롯한 다량의 복장물이 발견됐다. 아미타부처님의 대좌와 불신(佛身)에 4단으로 구분하여 빈틈없이 충전하는 식으로 복장이 꽉 채워진 채,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었다. 복장기록에는 아미타삼존을 조성하며 발원한다는 제목과, 나옹화상의 발원문, 그리고 400명에 가까운 시주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복장기록의 마지막에는 화주(化主)한 스님들, 해료(海了)스님이 조각했다는 사실, 끝으로 1450년(景泰元年)이라는 조성연대와 함께 극락왕생하자는 서원이 적혀 있다.

통도사 아미타여래삼존상은 정확한 부처님의 존명과 조성연대와 발원내용, 작가와 시주자들을 알 수 있어서 더욱 중요한 불상이다. 또한 조선 초기의 새로운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통일신라와 고려의 조각 전통을 결합하여 조성한 아름다운 불상이다.

“원컨대 저희로 하여금 세세생생 나는 곳마다(願我世世生生處) 언제나 반야 지혜에서 물러나지 아니하여(常於般若不退轉) 우리 본사 세존처럼 용맹한 지혜를 얻게 하시며(如彼本師勇猛智) 노사나 부처님처럼 큰 깨달음을 얻고(如彼舍那大覺果) …(중간생략)… 원하노니, 모든 천룡과 팔부중이(願諸天龍八部衆) 이내 몸을 옹호하여 잠시라도 뜨지 말고(爲我擁護不離身) 아무리 어려운 곳에서도 어려움 없게 하오며(於諸難處無諸難) 이같은 큰 서원 모두 다 성취하여지이다(如是大願能成就).”

옹호하여 잠시라도 뜨지 말고(爲我擁護不離身) 아무리 어려운 곳에서도 어려움 없게 하오며(於諸難處無諸難) 이같은 큰 서원 모두 다 성취하여지이다(如是大願能成就).”

-나옹화상 가송(歌頌), 발원(發願)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보면 영축산 아래 새벽어둠 속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무릎을 꿇고 지극지심으로 외웠던 나옹화상의 발원문 암송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나옹화상의 발원문은 지금도 사찰의 예불에서 불려진다.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을 통해 신분의 차별이 엄격했던 시대에도 부처님 앞에서는 귀천의 구분 없이 평등했던 승속과 남녀가 함께 발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중앙박물관 팀장 [불교신문36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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