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② 한일불교 교섭의 흑역사
일(日), 어떻게 세계 최대 고려불화 소장처가 됐을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약탈 등을 통한
불교유산 훼손, 고려말 왜구는 한반도를
노략질하면서 수많은 사찰을 불태웠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라고 할만 했다
많은 불상과 탱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백제ㆍ신라 등을 통한 합법적 증여가
있었던 반면 왜구와 임진왜란을 통한
무차별적 약탈과 방화가 있었다 …
일본에서 어렵사리 귀환한 고려불화.
견수사와 견당사를 통한 불교 전래
일본은 중국 양나라 등과 바다를 건너 직접 교섭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교섭이 공식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역시 수․당 시기다. 쇼토쿠 태자 시대부터 지배계급 가운데에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율령국가 성립과 더불어 더욱 강렬해졌다. 견수사ㆍ견당사가 나타나고 그들과 함께 유학승이 활약하면서 중국에서 온 고승도 점차 많아졌다.
견당사 파견은 630년 조메이(舒明) 천황 때부터 894년까지 이루어졌다. 유학생ㆍ유학승이 수가 많을 때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8세기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되어 문화사절의 성격이 강해졌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은 매우 험난했으며, 항로 기술의 제한성과 선박의 취약성으로 많은 사고가 뒤따랐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견당사에는 반드시 승려가 포함되었다.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 불법(佛法)을 구하려 중국으로 향했다.
번주의 명령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된 스님의 기록 도송기(渡宋記)
8세기 나라(奈良) 시대에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온 승려와 중국으로 유학 갔던 승려가 돌아와 불교를 포교했다. 그 결과 삼론종ㆍ성실종ㆍ법상종ㆍ구사종ㆍ화엄종ㆍ율종의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 형성됐다. 율종이 가장 늦게 전파됐다. 754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감진(鑒眞, 688~763)이 율종을 전파했다. 당의 유명한 고승인 감진대사는 양주 대명사(大明寺)에서 율을 강의했다. 일본 유학생 후쇼(普照)의 요청에 따라 여러 차례 도일을 시도한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에 들어갔다. 그때 감진은 이미 눈이 먼 상태였다. 천황은 계를 내려 그에게 계율 전교의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계를 전수하는 한편 중국의 건축, 조소, 미술과 의약도 전파하고, 일본 율종의 개조가 됐다. 엔닌이 그의 3대 제자다.
송ㆍ원ㆍ명대도 이어진 중국과 불교교류
송ㆍ원대에 이르러 아시아 바닷길이 무한 번성하면서 일본열도의 교섭 통상도 빈번해졌다. 일본 연안에는 기존 항구뿐만 아니라 신진 항구도 번성했다. 13세기 후반 몽골의 대규모 침략으로 인해 원ㆍ일 간 공식 관계가 단절된다. 그러나 양국 간의 정치 정세와 무관하게 민간에서는 무역이 성행했으며 오히려 활발해졌다. 14세기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승려가 가장 많았던 시기다. 이들을 실어 나르는 상선이 빈번하게 왕래했다는 뜻이다. 군사적 경계를 취하면서도 한편으로 무역을 허용하는 태도는 원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시아 바다는 송(宋)상, 고려상, 일본상 등이 교차하는 열린 바다였다.
송상을 통한 불교 교섭이 자주 이루어졌다. 1095년 10월 약사사(藥師寺) 승려 대방(大房)은 다자이후에서 송상에게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에게서 <극락요서(極樂要書)> <미타행원상응경전장소(彌陀行願相應經典章疏)> 등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1097년 3월에는 송상이 고려 간행 <아미타극락서(阿彌陀極樂書)> 등 13부 320권을 일본에 전했다. 1120년 7월에는 일본 승려 준원(俊源)이 다자이후에서 승려 각수(覺樹)가 송상을 통해 고려에서 가져온 성교(聖敎) 수백 권 중에서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을 필사했다고 했다. 송상이 수백 권의 경전을 중개 무역할 정도로 고려ㆍ일본 사이에서 활약했다는 증거다.
일본 사찰로 향하던 송나라 자기가 신안해저유물선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신안 해저에서 발굴된 유물선도 바로 원ㆍ일본 간 무역선으로 사찰이 화물의 발주자였다. 당시는 사찰이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 1235년 건장사(建長寺) 조영 자금을 얻기 위한 파견, 1332년 스미요시 신사 조영을 위한 상선 파견, 1342년 천룡사선(天龍寺船) 두 척 파견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이용한 항구는 대부분 경원(오늘날 닝보)이었다. 무역선과 사원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사원이 당시 중요한 경제적 주체였던 점과 함께 구법승이 이들 선박을 이용해 왕래했기 때문이다. 박래품에는 당연히 불경, 불상, 불화도 포함되었다.
명나라와도 여전히 불교문화가 오갔다. 중국의 선(禪)문화가 일본에 들어와 일본식의 새로운 선문화를 창조해냈다. 불교회화도 수입됐다. 일본은 받아들인 불교예술을 독창적인 스타일로 구현하여 일본 불교예술을 창조했다, 북송에서 13만 장의 대장경이 수입됐으며, 고려에서도 다량의 판본이 바다를 건너왔다. 일본의 인쇄문화는 송과 고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대의 실력가 오우치는 임제종 학승 사쿠겐 슈로(策彦周良, 1501~1579)화상을 명에 보냈다. 그가 남긴 <도해록>을 통해 당대의 도해 정황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실력가들은 큰스님들을 직접 중국으로 보내어 선진 불교문화를 흡수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불교는 중국과 한반도를 자양분 삼아서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갔다.
바다를 건넌 조선의 약탈품들
일본은 고려와도 활발하게 교역했다. 고려에서 불경을 구하려는 일본의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한반도를 통한 불교문화 바닷길이 장기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려ㆍ일본의 불교 교섭에도 중국 강남의 송상이 큰 역할을 했다. 송상은 고려를 상업 활동의 배경으로 삼고 규수 일대 서부 일본에 기항하며 다자이후를 중심으로 일본인과 사무역을 하거나 승려를 태우고 왕래했다. 바다를 통한 동아시아 3국의 물물 교류가 활발했다.
바다를 통한 양국의 교류는 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일본은 불경 등을 수입하는 등 한반도를 선진 문화지로 인식하면서도 전통적인 적국(敵國) 의식이 발동돼 폐쇄적ㆍ방어적 의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물건은 막연하게 당(唐), 당물(唐物)로 표기되어 중국의 것인지, 고려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대각국사 의천이 간행한 대장경처럼 일본으로 직거래되거나 송에서 만든 복간본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왜구의 약탈과 임진왜란 등을 통한 불교유산의 훼손이다. 고려말 왜구는 한반도를 노략질하면서 수많은 사찰을 불태웠다. 임진왜란은 가히 문화전쟁이라고 할만 했다. 많은 불상과 탱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최대의 고려불화 소장처인 것도 대부분 약탈품 덕분이다. 백제ㆍ신라 등을 통한 합법적 증여가 있었던 반면 왜구와 임진왜란을 통한 무차별적 약탈과 방화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까운 왜구의 본산 중 하나인 쓰시마 사찰에 고려 및 조선의 불교문화가 다량 소장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약탈의 소산이다.
더군다나 20세기 들어와서 일제식민지로 강점되면서 다시금 엄청난 불교유산이 일본으로 향했다. 골동품상 등을 통한 거래 품목도 있지만 그 역시 비법적인 것이었고, 여러 통로로 많은 불교유산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부는 그 목록이 확인되었지만 정체도 모를 수많은 불경과 불구(佛具), 자잘한 탱화 등은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의 불교 교섭에는 화려했던 고대의 역사가 있는 반면에 참담한 흑역사도 놓여있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