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섬의 불교유산 ①

 

세계 최대 규모 ‘인공 수미산’ 보로부두르 사원

보로부두르 사원 기획자는 평원에 솟은 인공산을 통해
현실세계 수미산을 염두에 두고 만다라를 설계했다.
욕망·형태·무형의 세계를 통해 정상으로 올라간다.

중앙돔이 있는 6개 정사각형, 3개 원형 플랫폼으로 된
9단계 플랫폼으로 높이가 30m를 넘는다. 사면을 두른
부조에는 붓다일대기, 자바 섬 주민 생활상이 각인
토착민의 삶이 적절하게 결합된 자바식 사원이다.

2672개 부조와 504개 불상, 중앙돔에는 72개 불상을
구멍 뚫린 사리탑에 봉안했다. 사원 내부에 방이 없고
순례객이 사방으로 돌아다닐 수만 있게 설계됐다.

보로부두르는 족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약 40㎞ 거리에 있다. 사진은 보로부두르 사원 상층부 종탑과 불상.

 

어느 날 세상에 현현한 보로부두르
1814년 자바의 영국 통치자였던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경은 자바의 평원에서 독특하고 어마무시하게 큰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을 ‘발견’한다. 영국령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국제적으로 떠돌던 이 사내는 영국의 해협식민지인 페낭에서 식민 관료로 동남아에 발을 내디디며, 자바를 잠시나마 경영했다. 당시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동남아를 둘러싼 패권 전쟁이 본격화한 시대였으며, 영국이 짧게 자바를 점령할 당시에 보로부두르를 ‘발견’한 것이다.

이 거대한 불교사원이 무려 1000여 년간 버려졌던 것은 의문이다. 근처에 활화산 므라피가 지금도 불을 뿜고 있으며, 사원이 화산재로 뒤덮여 있던 것으로 보아 화산 폭발과 어떤 영향이 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서양인이 ‘발견’이라고 명명한 것은 어디까지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고, 평원의 정글에 숨어있던 절집이 어느 날 세상에 현현(顯現)한 것이리라. 래플스가 이 사원을 주목한 것도 원주민으로부터 구전된 정보를 듣고서부터다.

비록 이슬람 왕국으로 변신한 상태였지만 동부자바의 원주민 사이에 보로부두르는 어떤 신화 반열의 건축물로 구전되었을 것이다. ‘앙코르와트 발견’식의 서구 제국주의 시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자바에 전해오는 마자파힛 시대의 불교학자 음푸 프라판카(Mpu Prapanca)가 1365년에 쓴 <나가라크레타가마(Nagarakretagama)> 필사본에도 보로부두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자바사람은 익히 알고 있던 사원이다. 사원은 많이 무너지기는 했으나 기본은 그대로 유지된 채로 서있었다. 20여 년의 발굴을 통하여 1835년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보로부두르의 보로는 ‘위대한’, ‘존경하는’이라는 뜻이며, 부두르는 부처를 뜻하는 ‘Budur’에서 기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부두르가 산스크리트어로 산을 뜻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정확하게 합의된 것은 없다. 래플스가 자신의 저서 <자바의 역사>에서 보로부두르로 명명하고 난 다음부터 서양인에 의해 익히 통용된 것이다. 원주민은 반드시 캔디를 붙여서 ‘캔디 보로부두르’로 부른다. 캔디는 자바에서 고건축 같은 것을 상징하는 단어다.

불교왕국 스리비자야의 영향
8~10세기, 해상제국 스리비자야가 전성을 구가할 때 자바에서는 건축 붐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불과 200여 년이 채 안 되어 메게랑(Megelang)에서 족자카르타(Jogjakarta)에 이르는 화산지대의 산비탈과 평원에 많은 사원이 건축됐다. 7세기 말 워노소보(Wonosobo) 북서 16마일 거리의 화산지대에 세워진 디엥 고원(Dieng Plateau) 힌두사원군이 그 시작을 알렸으며, 프람바난(Prambanan) 힌두사원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대인 8~9세기에 족자카르타에서 북서 26마일 거리의 광활한 케두(Kedu) 평원에 보로부두르 불교사원이 축성된다. 적도의 높은 생산력과 중앙집중화된 강력한 왕국의 탄생을 바탕으로, 어떤 종교적 열망의 바람이 자바를 강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축성에 불교왕국 스리비자야의 영향이 있다고 여겨진다. 동시대 최강의 불교왕국이 수마트라에 좌정하여 해상무역을 경영하고 있었던 조건에서 자바에 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마트라에서 스리비자야가 불교왕국으로 번성을 구가할 당시, 자바섬에는 사일렌드라는 왕국이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수마트라와 자바는 경쟁관계이자 동반관계였다. 자바섬은 광활한 경작지대로 비옥한 화산토에서 수전을 경작하여 많은 쌀을 생산했다. 해상제국이었던 스리비자야는 자바섬의 식량을 가져다 먹는 처지였다. 자바는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하면서 세력을 뻗치던 상황이었다. 프람바난 힌두사원군과 보로부두르 불교사원 축성이 동시대에 이루어진 것은 두 종교가 동부자바에서 각축하면서 세력을 확산시키던 정황을 설명해준다.

보로부두르는 족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약 40㎞ 거리에 위치한다. 두 화산과 두 강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보로부두르는 케두 평원의 다른 두 불교사원인 파원(Pawon)과 멘두트(Mendut)와 매우 가깝다. 학자들은 세 사원이 일직선상에 있어서 사원 사이에 일종의 관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논쟁거리다. 분명한 것은 기름진 수전 농업지대의 방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이 거대한 사원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사원 축성에 드는 엄청난 인력과 경비, 이 정도 규모의 사원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과 재정 능력이 평원의 쌀농사에서 배태되었다.

서양인이 그린 보로부두르. 평원에 사원이 서있고 나무들이 자라고 있던 모습을 보여준다.

 

평원에 솟은 인공 수미산
보로부두르 불교사원은 미얀마의 파고다처럼 흩어진 상태가 아니라 거대한 단독 건축물이라는 특장을 지닌다. 이는 앙코르와트의 거대한 축성물에 비견된다. 그 자체가 산이다. 200만 장의 큐빅으로 만들어진 화산암을 쌓아올려 그 자체 하나의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 정상에 오르면 광활한 평원이 굽어보인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기획자는 평원에 솟은 인공산을 통해 현실세계의 수미산을 염두에 두고 만다라를 설계했다. 카마다투(욕망의 세계), 루파다투(형태의 세계), 아루파다투(무형의 세계)를 통해 정상으로 올라간다. 불교의 우주관이 건축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중앙돔이 있는 6개의 정사각형, 3개의 원형 플랫폼으로 된 9단계의 플랫폼으로 높이가 30여 m를 넘는다. 사면을 두른 부조에는 붓다의 일대기를 비롯하여 자바 섬 주민 생활상이 각인되어 있다. 굽타양식으로 추정되지만, 인도식 불교만이 아니라 자바식으로 수용되고 선택된 형식을 취하여 자바인 활동상을 적극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교와 토착민의 삶이 적절하게 결합된 자바식 사원이다. 2672개의 부조와 504개의 불상, 중앙돔에는 72개의 불상을 구멍 뚫린 사리탑에 봉안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내부에 방이 없고 순례객이 사방으로 돌아다닐 수만 있게 설계됐다. 아마도 이 사원을 경영하던 스님들은 인근의 목조 건축물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수미산에는 어디고 침식할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자바인이 보로부두르를 건설한 기간과 그 과정은 여전히 전설과 신비에 싸여 있다. 알려진 것은 불교도들이 중세 초기에 보로부두르를 순례하고 불교의식에 참여해 1400년대의 어느 시점에서 사원이 버려지기 전까지 존속했다는 것이다. 아랍, 페르시아, 구자라트 무역상이 8세기와 9세기 초에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사원은 건재했다. 15세기에 이르러 자바인이 이슬람으로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그때쯤부터 사원의 기능이 멈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논으로 둘러싸인 평원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팻말을 걸고 관광객만 끌어들이는 버려진 사찰이지만, 한때 많은 스님이 불법(佛法)을 닦고 부처님의 말씀을 자바섬에 전하던 거대한 거점이었다. 자바가 중국 등과도 많은 무역 거래를 하였음을 볼 때, 외국 순례객도 이 사원을 방문했음 직하다. 과거의 영화가 사라진 절집에 서서 해양불교사의 도도한 맥락을 반추해본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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