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난의 불교유산①

 

로마와 교역, 메콩강 항시(港市)국가는 바로 여기

옥에오 발굴 유물 대부분은 호찌민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목불이 남아있는 것이 경이롭다.
불교와 힌두, 그리스 양식이 융합적으로 메콩강
유역에서 만나 새로운 해양문명을 만들어냈다.

푸난의 군주는 신왕 지위를 고수하고 시바신을
숭배했지만, 일반계층에는 불교가 퍼져 있었다.

고대 인도인이 당도한 만큼 산스크리트어 비문
한나라 때의 거울 불상, 인도 문자가 있는 호부,

힌두교 신상, 2세기 로마 황제의 금화 등 당시
중국과 서아시아, 나아가 로마를 연결하는 무역이
활발했음을 시사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됐다.

푸난의 목불(호찌민 역사박물관).
 
푸난의 중심은 항시국가 옥에오
일찍이 중국 <한서>에 부남(扶南)으로 등장하는 국가가 있다. 일명 ‘푸난’이라고 부른다. 메콩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넓게 퍼진 푸난의 성립은 1세기 무렵이다. 크메르어로 브남(Bnam, 현대어 Phnom), 중국어로 음역해 푸난이며, ‘산’을 뜻한다. 이 산은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신이 사는 메루산(수미산, 須彌山)이다. 메루산은 힌두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중시하는 산이어서 불교의 우주관에서도 세계의 중앙에 솟아 있다는 산이다.

메콩강 유역은 그야말로 기름진 땅이다. 강과 강이 얽혀지며 삼각주를 만들어 옥토를 만들어낸다. 비옥한 땅인 만큼 생산량이 높아서 쌀이 풍부한 곳이다. 이러한 물적 기반은 왕국을 탄생시킬 적절한 환경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가야왕국이 탄생한 것에 비견된다. 메콩강 상류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연결되며, 하구는 시암만으로 열려있다. 푸난 위쪽에는 참파 왕국이 있었고, 인근에 크메르가 있었으며, 타이만 지역에는 오늘의 방콕을 중심으로 여러 항시(港市) 국가가 성장하고 있었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의 관점에서 푸난은 고대 동남아시아 거점 해상왕국이었다. 푸난은 말레이반도의 해항 도시 및 동남아시아, 중국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심지어 로마에서 오는 사신이 오기도 했다. 실제 로마 사신이 도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그리스 상인의 배가 남인도의 어느 국제항에 다다른 이후 동진을 거듭하여 푸난에 도착했을 것이다. 사신을 빙자하여 통킹만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과 교섭하고자 했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금화가 푸난에서 발굴되었다.

 

옥에오는 푸난의 중심 무역도시다. 옥에오에서 발굴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금화(호찌민 역사박물관).

 

푸난의 도시 중에서 단연 무역도시 ‘옥에오’가 중요하다. 옥에오 문화는 기원후 1~7세기에 메콩강 삼각주의 광활한 지대에서 발달했다. 메루산이 솟아 있는 토아이손 구역이 그 중심지로 여겨질 뿐, 옥에오는 메콩강 지류를 따라서 넓게 산재한다. 강은 크고 작은 지류와 본류로 연결되어 어디서나 운하로 이어진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 이들 크고 작은 수로가 푸난을 이어주는 동맥 역할을 했다.

옥에오는 본질적으로는 상업 중심지였다. 수출과 수입에 의존하는, 식량 외에는 특별한 물산이 생산되지 않는 전형적인 무역 거점이었다. 규칙적으로 구획 배치된 계획도시로서 주요 항구와 거대 운하로 연결됐다. 물품의 집산지이자 가공지로도 기능했다. 옥에오 거주민은 배후의 광활한 논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 그리고 도시의 수공업 지대에서 정밀한 금은가공품, 유리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자 등으로 계층이 나눠졌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옥에오를 발굴하고 기록을 남겼다. 유물들은 대거 현재의 호찌민 국립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일본도 한때 이곳을 발굴한 적이 있다. 뒤늦게 한국도 옥에오에 관심을 갖고 여러 번 전시회를 개최했다. 중국을 거쳐 한반도 백제와도 관련이 있는 나라이기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중이다.

불교와 힌두, 그리스 양식의 융합
메콩강 유역 역시 인도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옥에오에도 인도의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당대의 선진문명권인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종교, 정치, 문학예술, 수공업 기술 등이 들어왔다. 유리구슬 제작법, 힌두교 사원과 만다라, 아마라바티 양식의 조각상, 초기 인도 문자와 힌두교도상이 새겨진 금판과 인장,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진 주석판과 비문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옥에오 발굴 유물의 대부분은 호찌민 역사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옥에오 석상의 대부분은 불교와 힌두 양식이 혼재된 형태다. 힌두 양식이 중심을 이루지만 빼어난 석불과 목불도 남아있어 불교 역시 문화적 구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은 그렇다 치고 목불이 남아있는 것이 경이롭다. 헬레니즘 양식의 간다라 미술도 옥에오에 영향을 미쳤다. 조각의 세련미가 남다르다. 매우 세련된 자태의 석조각이 곳곳에서 출토되었다. 간다라 양식이 인도 북서부에서 바다를 건너 옥에오에 이른 것이다. 불교와 힌두 그리고 그리스 양식이 융합적으로 메콩강 유역에서 만나 새로운 해양문명을 만들어냈다.

브라만 문화를 받아들인 푸난의 군주는 신왕의 지위를 고수하고 시바신을 숭배했지만, 일반 피지배 계층에서는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박물관에는 많은 불상이 전해온다. 고대 인도인이 당도한 만큼 산스크리트어 비문도 전해온다. 중국 한나라 때의 거울, 불상, 인도 문자가 있는 호부, 힌두교 신상, 2세기 로마 황제의 금화 등 당시 중국과 서아시아, 나아가 로마를 연결하는 무역이 활발했음을 시사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됐다.

푸난 무역상은 중국 교역을 독점했다. 이들은 지중해ㆍ인도ㆍ중동ㆍ아프리카의 수입 상품, 보석과 장신구류, 유황, 몰약, 기타 식물 수지와 향료 제조에 사용되는 물품을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로 교환하는 중계무역을 행하는 한편, 인도네시아 제도에 메콩강 지역의 상품을 유통시켰다. 옥에오에서는 청동기를 만들거나 구슬과 장신구류를 제작하는 등 수공업 생산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도시를 둘러싼 환호와 성벽의 존재는 당시 교역 활동이 철저하게 관리ㆍ통제됐음을 알 수 있다.

옥에오의 수미산.


천축과 중국불교 교섭의 징검다리
푸난은 중국 사서에 자주 등장한다. 3세기는 중국의 위ㆍ촉ㆍ오 삼국시대다. 손권의 명을 받은 강태와 주응은 동남아시아 제국에 10여 년간 체류하면서 100여 개국의 정보를 수집했다. 손권의 위는 기본적으로 해상세력이었다. 남만(南蠻) 탐사를 위해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바다에 관심이 많았다. 귀국 후 주응은 <부남이물지(扶南異物志)>를, 강태는 남해 여러 나라의 견문록인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과 <부남토속전(扶南土俗傳)>을 저술했다. 이들 문헌의 원본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다른 문집에 끼어 있어 그런대로 주요 내용은 전해오고 있다. 3세기의 중국 대외교섭 능력을 잘 보여주는 문헌들이다.

<오시외국전>에서는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서남아시아까지 가는 광범위한 항해 노선을 밝히고 있다. 뱃길이 동남아는 물론이고 천축을 거쳐서 이미 오늘날의 페르시아까지 이어졌다는 뜻이다. 푸난은 대항해의 중간 거점으로 활용됐다. <남사(南史)>를 보면 후한 화제(和帝) 시기에 천축과 소통했는데, 서역(西域)이 이반해 마침내 교통이 끊긴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손오(孫吳) 시기에 천축과의 소통 창구가 지속됐다. 손오 시기에 푸난 왕 범전(范旃)이 가까이 신임하는 소물(蘇物)을 천축국으로 보냈다. 중국에서 메콩강 유역의 푸난을 거쳐서 천축과 서남아시아로 갔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반대로 천축에서 푸난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는 뜻도 포함한다. 이처럼 푸난은 동서 교류의 중간 거점으로서 불교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 37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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