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구름 널리 편 화엄강백

환성지안(喚醒志安)

 

 

咄這老和尙 

曠刼結緣大 

坐斷海東四十年 

到處自成折床會 

慈雲徧布 

慧澤霶霈 

眞可謂刹海章程法門 

蓍蔡如何末後 

擔得須彌渡大海 

金山大會作話欛 

笑看八風括地號 

誰道從來償宿債 

 

돌! 저 노화상은

광겁에 맺은 인연이 크다.

앉아서 해동 사십년을 끊고

이르는 곳 마다 스스로 절상회를 이루었다.

자비의 구름을 널리 펴고

지혜의 연못에 폭우를 내렸다.

진실로 찰해의 장정법문으로 옳은데

끝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수미산을 짊어지고 대해를 건너면

금산대회에서는 이야기꺼리가 되고

웃으며 팔풍 괄지호를 보면서

누가 끝내 묵은 빚을 갚았다 말하리오.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스님의 3세손인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스님이 지은 영찬이다. 환성스님은 서산휴정의 4세손으로 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설제의 법맥을 이었으며, 연담스님은 환성스님의 여러 제자 가운데 호암체정의 법을 계승했다.

 

환성스님은 1690년 직지사에서 모운진언이 개설한 화엄법회의 강석을 물려받을 정도로 교학에 뛰어났으며 1725년 금산사 화엄법회에서는 1400여 명이 운집할 정도로 화엄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다. 환성문중이 호남을 비롯해 호서, 영남 등지에서 교학과 강맥을 상징하는 문중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연담스님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연담스님은 문중의 숙부인 함월스님의 부촉을 받아 1762년 대흥사에 환성스님 비를 건립하면서, 스승인 호암스님의 비도 함께 세워 자신의 문중의 위상과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드러냈다. 이처럼 누구보다 환성스님을 잘 알고 있던 연담스님은 찬문을 통해 수많은 절상회와 찰해법문으로 교화를 펼쳤던 환성스님의 공덕을 찬탄하면서 이를 보답하지 못하는 후손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비록 연담스님의 영찬이 적힌 환성스님의 진영은 전하지 않지만 선사의 공덕을 기리고 그 명성이 영속되기를 바라는 후손의 마음은 통도사에 모셔진 환성스님 진영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799년에 영월우징(影月禹澄)스님 주관 하에 화승 옥인(玉仁)스님이 조성한 통도사 환성스님 진영의 뒷면에는 “환성삼대의 진영을 사대후손이 열어 천년 동안 안위하여 법손에게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네(喚惺三代影 四代後孫開 安位千載下 法孫濟濟來)”란 짤막한 찬문이 적혀 있다. 진영에 적힌 찬문 내용대로 통도사에는 환성, 호암, 용파 3대로 이어지는 진영이 모셔졌으며, 20세기 전반까지 환성문중에서 통도사 주지가 선출될 정도 번성을 누렸다.

 

해제=정안스님 설명= 이용윤 [불교신문32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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