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景哀王)
경애왕(景哀王)104 신라의 제5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924~927년이다. 경애왕 4년(927)에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내어 고려를 돕는 등 고려와의 밀착 외교를 노골화함으로써 결국 견훤에게 살해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0쪽).닫기이 즉위하였다. 휘는 위응(魏膺)이니, 경명왕(景明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원년(924년) 9월에 태조(太祖)에게 사신을 보냈다.
겨울 10월에 친히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하였다.
2년(925년) 겨울 10월에 고울부(高鬱府)05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그런데 《고려사》 권57 지리 1 영주(永州)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에 신라시대의 임고군(臨皐郡)과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을 합하여 설치한 것으로, 일명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고 한 점에서 현재의 경북 영천 지방이 곧 고울부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0쪽). 경상북도 영천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53쪽).닫기 장군(將軍) 능문(能文)이 태조(太祖)에게 투항하였으나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보냈으니, 그 성이 신라의 왕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의 경북 영천 지방 호족이다. 경애왕 2년(925)에 능문이 고려에 귀부하자 능문의 휘하에 있던 시랑 배근(盃近)과 대감 명재(明才), 상술(相述), 궁식(弓式)등을 고려에 머물러 있도록 하고 능문은 타일러 돌려 보냈다고 한다(《고려사》 권1, 태조 8년 10월조). 한편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영천군(永川郡)조에 보이는 “金剛城將軍 皇甫能長”을 능문(能文)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旗田巍, 《高麗王朝成立期の府と豪族》,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1972, 11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0~381쪽).닫기
11월에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107 《삼국사기》 권50 열전 궁예전과 《삼국유사》 권2 기이편 후백제 견훤조에는 진호를 견훤의 ‘외생(外甥)’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진호(眞虎)는 견훤의 처남으로 성은 진(眞)씨였으며, 광주(光州)에 토착해 있던 구백제 귀족집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신호철, 「후백제의 지배세력에 대한 분석」, 《이병도박사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 1987, 144~145쪽). 한편 《고려사》 권1 태조 8년 10월조에서는, 고려와 후백제의 인질교환 및 화친 사실을 이 해 10월의 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견훤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내자 왕건도 그의 조카인 원윤(元尹) 왕신(王信)을 후백제에 볼모로 보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1쪽).닫기 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太祖)에게 말하기를,
3년(926년) 여름 4월에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었다. 108 《고려사》 권1 태조 9년 4월조에 의하면, 진호가 병으로 죽자 왕건이 시랑 익훤(弋萱)을 보내 진호의 시신을 옮겨 주었는데, 견훤은 그 보복으로 고려에서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였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1쪽).닫기견훤(甄萱)은 고려 사람이 고의로 죽였다고 하며,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웅진(熊津)에까지 진군하였다. 태조(太祖)가 여러 성에 명령하기를 벽을 견고히 하고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파견해 말하기를,
“견훤(甄萱)은 맹세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절대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북 한 번 치는 위세만 떨쳐도 견훤(甄萱)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사신에게 말하기를,
4년(927년) 봄 정월에 태조(太祖)가 몸소 백제를 정벌하니109 《고려사》 권1 태조 10년 정월조에 의하면, 927년 정월에 왕건이 정벌한 지역은 용주(龍州)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1쪽).닫기, 왕이 병사를 내어 그를 도왔다.
2월에 병부시랑(兵部侍郞) 장분(張芬)110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 고려전에서는 ‘장(張)’으로 표기하였다. 장분(張芬)은 경애왕 4년(927)에 신라의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되었고, 2년 후인 929년(태조 12) 8월에는 고려의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된 바 있는데 당시 관직은 광평시랑(廣評侍郞)이었다(《책부원귀》 권972, 외신부 조공 천성(天成) 4년 8월조). 이런 점으로 보아 장분은 경애왕 4년 직후에 고려에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장분을 후당에 보내어 조공한 사실은 《오대회요》 권30 고려전, 《구오대사》 권38 천성 2년조, 《책부원귀》 권972 외신부 조공 천성 2년조, 《신오대사》 권6 천성 2년 2월조에서도 확인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1~382쪽).닫기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에서 장분(張芬)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111 검교(檢校)는 가관(加官)의 하나로서 검교태사(檢校太師)부터 검교원외랑(檢校員外郞)까지 모두 이것이 있었다. 그리고 공부상서(工部尙書)는 공부의 장관으로 관품은 정3품이었다. 후당에서 장분(張芬)에게 준 위의 관직은 실직이 아니라 명예직인 이른바 허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쪽).닫기를 제수하고, 부사(副使)112 사절단의 장관인 대사(大使)를 보좌하고 대사의 부재시 그 임무를 대행하던 사절단의 차관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쪽).닫기 병부낭중(兵部郎中) 113 병부 제감(弟監)을 경덕왕 때 고친 이름으로 병부 대사(大舍)라고도 하였다. 병부낭중은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나마(奈麻)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쪽).닫기박술홍(朴術洪)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114 어사중승(御史中丞)은 관리를 감찰·탄핵하던 관서인 어사대(御史臺)의 차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정4품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7쪽).닫기을 겸하게 하였으며, 판관(判官)115 원래는 당대 절도사, 관찰사, 방어사 등의 속관이었으나, 여기서는 사절단 중의 대사(大使), 부사(副使) 아래의 세번째 관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쪽).닫기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116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창부(倉部)에 원외랑(員外郞)을 두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집사성(執事省)의 속관인 사지(舍知)를 한때 원외랑이라 한 점으로 보아, 창부의 조사지(助舍知) 혹은 사창(司倉)의 별칭이 창부원외랑이 아니었을까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원래 정원 외의 관을 원외랑이라 하였으나, 수·당대에는 상서성(尙書省) 24사(司) 낭중(郞中) 아래의 관직으로 원외랑이 두어졌다. 관품은 정6품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쪽).닫기이충식(李忠式)에게 시어사(侍御史)117 당대 어사대에 소속된 관원으로, 정원은 4명이고 관품은 종6품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쪽).닫기를 겸하게 하였다.
3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太祖)가 친히 근암성(近巖城)118 현재의 경북 문경시(聞慶市) 산양면(山陽面) 일대이다. 《삼국사기》 권37 참조. 한편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전과 《삼국사절요》 권14 경애왕 3년 3월조 및 《고려사》 권1 태조 10년 3월조에는 모두 ‘근암성(近品城)’으로 되어 있으나 같은 지명이다. 또는 ‘근암성(近嵒城)’으로도 표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2~383쪽).닫기을 깨뜨렸다.
당(唐) 명종(明宗)119 후당의 제2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925~933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120 처음에는 현재의 경남 의령(宜寧) 지방에 근거지를 둔 호족이었으나 후에 현재의 경남 진주 지방까지 석권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으며, 927년에 후당의 명종(明宗)으로부터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작을 받았다.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경명왕 8년(924년)에 왕봉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낸 사실은 《신오대사》 권5 동광(同光) 2년 정월조와 《책부원귀》 권972 외신부 조공 동광 2년 정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79쪽). 천주(지금의 진주)지사였는데 그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행정을 하면서 후당과 외교 관계를 가졌으며 후당의 관작을 받았다(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333쪽).닫기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121 당나라 정3품의 무관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122 처음에는 현재의 경남 의령(宜寧) 지방에 근거지를 둔 호족이었으나 후에 현재의 경남 진주 지방까지 석권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으며, 927년에 후당의 명종(明宗)으로부터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작을 받았다.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경명왕 8년(924년)에 왕봉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낸 사실은 《신오대사》 권5 동광(同光) 2년 정월조와 《책부원귀》 권972 외신부 조공 동광 2년 정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79쪽). 천주(지금의 진주)지사였는데 그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행정을 하면서 후당과 외교 관계를 가졌으며 후당의 관작을 받았다(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333쪽).닫기가 사신 임언(林彦)123 《삼국사절요》 권14에서는 ‘임원(林遠)’이라 하였다. 임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파견한 사실은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 고려전, 《책부원귀》 권972 외신부 조공 천성(天成) 2년 4월조, 같은 책 권976 외신부 포이 천성 2년 4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 권1 태조 10년조에는 왕건이 임언(林彦)을 당에 보냈다 하였고, 《신오대사》 권6 명종(明宗) 천성 2년 3월조에는 신라 사신 임언이 왔다고 하여 문헌에 따라 파견 주체를 달리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明宗)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들여 물품을 하사하였다.
강주(康州)가 관할하던 돌산향(突山鄕) 등 4개 향(鄕)124 돌산향(突山鄕)은 현재의 전남 여천군(麗川郡) 돌산읍(突山邑)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사》 권1 태조 10년 4월조에 의하면, 왕건이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을 보내 강주 관할하의 전이산(轉伊山 : 경남 남해군 남해읍), 노포(老浦 : 경남 남해군 이동면), 평면산(平西山 : 경남 남해군 남면 평산리), 돌산 등의 4개 향을 공취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이 태조(太祖)에게 귀부하였다.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125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그런데 《고려사》 권57 지리 1 영주(永州)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에 신라시대의 임고군(臨皐郡)과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을 합하여 설치한 것으로, 일명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고 한 점에서 현재의 경북 영천 지방이 곧 고울부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0쪽).닫기에서 우리 군사를 침범하였다. 왕이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요청하자126 경애왕 4년(927)에 신라에서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은 連式이었다(《고려사》 권1, 태조 10년 9월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127 고려의 구원병을 인솔한 사람은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朱) 등이었다(《고려사》 권1, 태조 10년 9월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견훤(甄萱)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을 공격해 들어갔다.128 견훤이 신라 왕도에 쳐들어간 실제적인 목적은 경애왕이 추진하고 있던 고려와의 결합을 무산시키고 신덕·경명·경애의 3대에 걸친 박씨 왕위의 정통성 때문이었으며, 견훤이 손쉽게 도성의 주연장소에까지 침입하여 경애왕일파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왕실 내부의 박씨계와 김씨계의 분열 결과 김씨 왕족의 동조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신호철, 《신라의 멸망과 견훤》, 《충북사학》 2, 1989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384쪽).닫기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129 현재의 경북 경주시 배동(拜洞) 남산 서쪽에 있던 연회 장소이다. 현재 정자는 없고 포어(鮑魚) 형태의 수구(水溝)만 남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 경상북도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신라 때 유흥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55쪽).닫기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땅을 기면서 노복이 되기를 구걸했으나 면치 못하였다. 견훤(甄萱)은 또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사(公私)의 재물 모두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族弟)130 원문은 족제(族弟)로 되어 있다. 집안의 아우뻘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고려사》 권1에서는 김부(金傅)를 경애왕의 ‘표제(表弟)’라 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김부가 박씨인 경명왕, 경애왕과 이종형제 간으로 모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장동익, 「김부의 책상부고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론집》 3, 역사교육학회, 1982, 59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닫기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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