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景哀王)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하였다. 휘는 위응(魏膺)이니, 경명왕(景明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원년(924년) 9월에 태조(太祖)에게 사신을 보냈다.

겨울 10월에 친히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하였다.

2년(925년) 겨울 10월에 고울부(高鬱府) 장군(將軍) 능문(能文)태조(太祖)에게 투항하였으나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보냈으니, 그 성이 신라의 왕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11월에 후백제견훤(甄萱)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太祖)에게 말하기를,

견훤(甄萱)은 언행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거짓이 많으니 화친(和親)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태조(太祖)도 그렇게 여겼다.

3년(926년) 여름 4월에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甄萱)은 고려 사람이 고의로 죽였다고 하며,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웅진(熊津)에까지 진군하였다. 태조(太祖)가 여러 성에 명령하기를 벽을 견고히 하고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파견해 말하기를,

견훤(甄萱)은 맹세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절대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북 한 번 치는 위세만 떨쳐도 견훤(甄萱)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사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견훤(甄萱)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惡)이 가득 차서 저절로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4년(927년) 봄 정월에 태조(太祖)가 몸소 백제를 정벌하니, 왕이 병사를 내어 그를 도왔다.

2월에 병부시랑(兵部侍郞) 장분(張芬)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에서 장분(張芬)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를 제수하고, 부사(副使) 병부낭중(兵部郎中) 박술홍(朴術洪)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하게 하였으며, 판관(判官)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이충식(李忠式)에게 시어사(侍御史)를 겸하게 하였다.

3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太祖)가 친히 근암성(近巖城)을 깨뜨렸다.

당(唐)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가 사신 임언(林彦)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明宗)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들여 물품을 하사하였다.

강주(康州)가 관할하던 돌산향(突山鄕) 등 4개 향(鄕)태조(太祖)에게 귀부하였다.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침범하였다. 왕이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견훤(甄萱)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을 공격해 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땅을 기면서 노복이 되기를 구걸했으나 면치 못하였다. 견훤(甄萱)은 또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사(公私)의 재물 모두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族弟)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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