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권(卷第十五)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3(第三)
태조대왕(太祖大王)·차대왕(次大王)
태조대왕(太祖大王)
태조대왕(太祖大王)국조왕(國祖王)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珫璃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재사(再思)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扶餘) 사람이다. 모본왕(慕本王)이 죽고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어 사직을 주관하기에 부족하여 나라 사람들이 궁(宮)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왕은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였다. 나이가 7살이어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3년(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부지방에 풀무치(누리, 蝗)가 곡식을 해쳤다.
4년(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넓혀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까지 이르렀다.
7년(59) 여름 4월에 왕이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고기낚시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赤翅白魚)를 얻었다.
가을 7월에 서울(京都, 국내성)에 큰물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10년(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白鹿)을 잡았다.
나라의 남쪽에 풀무치(누리, 蝗)가 날아들어 곡식을 해쳤다.
16년(68) 가을 8월에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20년(72) 봄 2월에 관내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내(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서울(京都, 국내성)에 가뭄이 들었다.
22년(74) 겨울 10월에 왕이 환내부(桓那部) 패자(沛者) 설유(薛儒)를 보내 주내(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를 삼았다.
25년(77) 겨울 10월에 부여(扶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三角鹿)과 꼬리가 긴 토끼(長尾兔)를 바쳤다. 왕이 좋은 징조가 있는 물건으로 여겨 크게 사면하였다.
11월에 서울(京都, 국내성)에 눈이 3자나 내렸다.
46년(98) 봄 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다. 책성(柵城)의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서는 흰 사슴(白鹿)을 잡았다. 책성(柵城)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열어 마시고, 책성(柵城)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건을 하사했는데 차등이 있었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이 책성(柵城)에서 돌아왔다.
50년(102) 가을 8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성(柵城) 안정시키고 어루만졌다.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扶餘)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다. 길이가 1장(丈) 2척(尺)이고 털 색깔이 매우 밝으나 꼬리가 없었다.
왕이 장수를 보내 한(漢)의 요동(遼東)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大守)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항거하니,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耿夔)가 맥인(貊人)을 쳐부수었다.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이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자주색 노루(紫獐)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 태수(大守)가 붉은 표범(朱豹)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9척(尺)이었다.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농작물을 거둘 수 없어 백성이 굶주렸다. 왕이 사신을 보내 구제하였다.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漢)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59년(111) 사신을 한(漢)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통감(通鑑)에 이르기를 “이해 3월에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속하기를 청하였는지 혹은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이 남해를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녔다.
겨울 10월에 남해에서 돌아왔다.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눈이 5척(尺)이나 내렸다.
66년(118) 봄 2월에 지진(地震)이 났다.
여름 6월에 왕이 예맥(穢貊)과 함께 한(漢)의 현도(玄莬)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에 풀무치(누리, 蝗)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현명하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고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사람(환과고독, 鰥寡孤獨)과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69년(121) 봄에 한(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풍환(馮煥), 현도태수(玄莬大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大守) 채풍(蔡諷) 등이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 와서 예맥(穢貊) 거수(渠帥)를 공격해서 죽이고 병졸과 군마,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왕이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력 2천여 인을 거느리고 풍환(馮煥), 요광(姚光)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遂成)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풍환(馮煥)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遂成)이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의탁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玄莬)와 요동(遼東)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인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이 선비(鮮卑)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가서 공격하였다. 요동태수(遼東大守) 채풍(蔡諷)이 병력을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막아냈으나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扶餘)에 행차하여 태후(太后) 사당에 제사 지내고, 백성으로 딱하고 곤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紫狐裘)과 흰 매(白鷹), 흰 말(白馬)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
11월에 왕이 부여(扶餘)에서 돌아왔다. 왕이 수성(遂成)에게 군국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이 마한(馬韓)과 예맥(穢貊)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玄莬城)을 포위하였다. 부여왕(扶餘王)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력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漢)의 병력과 힘을 합쳐 대항해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70년(122)에 왕이 마한(馬韓), 예맥(穢貊)과 함께 요동(遼東)을 침략하였다. 부여왕(扶餘王)이 병력을 보내 이를 구하고 쳐부수었다. 마한(馬韓)이 백제 온조왕(温祚王)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병력을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에 다시 일어난 것인가?
71년(123) 겨울 10월에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를 좌보(左輔)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右輔)로 삼아, 수성(遂成)과 더불어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72년(124) 가을 9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한(漢)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1월에 서울(京都, 국내성)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80년(132) 가을 7월에 수성(遂成)이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과 잔치를 열었다. 이에 관내(貫那) 우태(于台) 미유(彌儒)·환내(桓那) 우태(于台) 어지류(菸支留)·비류내(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수성(遂成)에게 말하였기를 “처음에 모본왕(慕夲王)이 죽고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어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再思)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동생이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계획을 세우소서.” 하였다. 수성(遂成)이 말하기를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적자(嫡子)로 하는 것이 늘 지켜야 하는 천하의 도리이다. 왕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엿보겠는가?” 하였다. 미유(彌儒)가 말하기를 “동생이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대는 의심하지 마십시오.”하였다. 이에 좌보(左輔)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는 수성(遂成)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대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86년(138) 봄 3월에 수성(遂成)이 질양(質陽)에서 사냥을 하고 7일을 돌아오지 않았다. 놀고 즐기는 것이 한도가 없었다.
가을 7월에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그 동생 백고(伯固)가 시정해주기를 건의하여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은 문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왕의 동생 몸으로 모든 신료의 으뜸이 되어, 지위가 이미 극에 이르고 공도 역시 큽니다. 마땅히 충의로써 마음을 지키고, 예절로써 사양하며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위로는 왕의 덕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화란(禍亂)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이러한 생각이 없이 즐거움을 탐하여 근심거리를 잊고 있으니, 당신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하였다. 수성(遂成)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람의 심정으로 누가 부귀와 환락을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마는 그것을 얻는 자는 만(萬)에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형편에 있는데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하고, 마침내 듣지 않았다.
90년(142)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 한 마리가 호랑이 꼬리를 물어뜯어서 끊었다. 깨어서 그 길흉을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백수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의 작은 것입니다. 뜻은 왕의 족속으로 대왕의 후손을 끊으려고 모의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하였다. 왕이 기뻐하지 않고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었는데, 점쟁이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선(善)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선한 일을 하면 재앙이 도리어 복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집처럼 근심하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하였다.
94년(146) 가을 7월에 수성(遂成)이 왜산(倭山) 아래에서 사냥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가니 기다릴 수 없다. 주위에서 나를 위하여 도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홀로 나아와 말하기를 “왕자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실 때, 주위 사람들이 바르게 시정을 건의할 수 없어 모두 ‘명령대로 하겠습니다.’고 말하니 간사하고 아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른 말을 하려고 하는데 높으신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수성(遂成)이 말하기를 “그대가 직언을 할 수 있다면 약석(藥石)이 될 것이니 어찌 의심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지금 대왕이 현명하여 서울과 지방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록 공이 있으나 무리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하려 모의한다면, 이는 한 가닥 실로 만균(萬鈞)의 무게를 매어서 거꾸로 끌려고 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비록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왕자께서 의도와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임금을 섬기면, 대왕께서 왕자의 착함을 깊이 알고 반드시 선양할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였다.
수성(遂成)이 기뻐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 곧음을 질투하여 수성(遂成)에게 중상하여 말하기를 “왕자께서는 대왕이 연로하여 국운이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뒤를 이을 것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언하니 저희들은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죽여 입을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수성(遂成)이 그 말을 따랐다.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漢)의 요동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大守)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겨울 10월에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이 왕에게 말하기를 “수성(遂成)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먼저 그를 죽이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遂成)이 나라에 공이 있어 내가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대는 번거롭게 염려하지 마라.” 하였다. 고복장(高福章)이 말하기를 “수성(遂成)의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하여, 오늘 대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내일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질지 못한 동생에게 은혜를 베풀 것만 알고, 죄 없는 자손에게 화가 미칠 것은 알지 못하니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12월에 왕이 수성(遂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 천하의 정치에 싫증이 났다. 하늘의 운수는 너의 몸에 있다. 더욱이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총괄하여 오래 동안 사직을 보존한 공이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부탁할 사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너는 즉위하여 그만둘 때까지 영원히 빛날지어다.” 하였다. 이에 왕의 자리를 넘겨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太祖大王)이라고 칭하였다.《후한서》에는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宮)이 죽고 아들 수성(遂成)이 즉위하였다. 현도태수(玄莬大守) 요광(姚光)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계기로 병력을 보내 저들을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기를 ‘궁(宮)이 전날에 용감하고 영리할 때에는 광(光)이 토벌할 수 없었는데 죽으니 이를 공격하는 것은 의(義)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죽이지는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안제(安帝)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遂成)이 한(漢)의 생포한 포로를 돌려보냈다.”고 하였다.《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癸巳)에 즉위하여 그때 나이가 일곱 살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 146)에 이르러 왕위를 사양하여 친동생 수성(遂成)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궁(宮)의 나이가 백 살이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라 하였다. 즉 건광(建光) 원년은 궁(宮)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한서(漢書)에 기재된 것과 고기(古記)는 달라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혹시 한서(漢書)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